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꼴찌에서 최우등으로 박정희가 거듭난 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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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144> 유신 쿠데타, 서른일곱 번째 마당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법이다. 사회 전반의 분위기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른바 진보 세력 안에서도 부박한 담론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역사를 깊이 있게 이해하는 것이 절실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러한 생각으로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를 이어간다.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은 한국 현대사 연구를 상징하는 인물로 꼽힌다. 매달 서 이사장을 찾아가 한국 현대사에 관한 생각을 듣고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열한 번째 이야기 주제는 유신 쿠데타다.


[현대사 이야기 연재 이전 주제 바로 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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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신 쿠데타, 서른여섯 번째 마당] 박정희는 왜 일본 극우를 그토록 칭찬했나


프레시안 : <만주군관학교와 일본 육사 시절, 그리고 만주군 장교로 있던 시기에 대한 향수는 박정희에게 단순한 향수로 끝나지 않았다는 점을 지난번에 살폈다. 한국과 일본의 만주 인맥이 해방 후 박정희의 행보에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는 점도 짚었다. 박정희의 만주국 경험을 더 살펴볼 필요가 있어 보인다. 이 문제, 어떻게 보나.


서중석 :
만주 시대의 박정희를 보도록 하자. 박정희가 1961년 11월, 5.16쿠데타 후 처음으로 일본에 들렀을 때 기시 노부스케를 비롯한 만주 인맥들을 만났다고 지난번에 얘기하지 않았나. 그런데 강상중과 현무암이 쓴 <기시 노부스케와 박정희>라는 책을 보면, 기시 노부스케를 만나기 전부터 박정희는 기시 노부스케와 사신(私信)을 주고받았다고 돼 있다. 기시 노부스케가 박정희의 대구사범학교 동창생을 박정희한테 파견하자, 박정희가 “금후 재개하려는 한일 국교 정상화 교섭에서 귀하의 각별한 협력이야말로 대한민국과 귀국의 강인한 유대가 양국의 역사적 필연성이라고 주장하시는 귀의(貴意)가 구현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내용의 사신을 보낸 것으로 기시 노부스케 관계 문서에 나온다고 한다. 하여튼 박정희는 일본에 들르기 전부터 이미 만주 인맥과는 특별한 관계를 맺었다. 1978년 12월 27일 유신 제2기 체육관 대통령 취임식 때도, 미국과 일본에서도 사절단을 안 보냈고 대만에서조차 ‘사절단을 보내달라’는 요청에도 안 보냈는데 기시 노부스케만 민간인 사절단 12명을 이끌고 온 것도 그런 특별한 관계 때문이다. 한일 국교 정상화 문제도 일본의 만주 인맥과 긴밀한 관계를 맺는 방식으로 처리했기 때문에, 1964∼1965년에 굴욕적 한일 회담 반대 데모가 그렇게 크게 일어난 것 아닌가.


기시 노부스케는 아베 신조 총리의 외조부로 자주 거론되는데, 과거사에 대한 아베 신조의 극단적인 주장이나 극우 행보는 외할아버지의 꿈을 실현시키는 것이라고들 이야기한다. 기시 노부스케는 만주국 총무청 차장, 산업부 차장으로서 만주국을 주물렀는데, 시이나 에쓰사부로(한일 회담 타결 당시 일본 외상)도 이때 만주국으로 건너가 기시 노부스케 밑에서 일했다. 기시 노부스케는 그 후 도조 히데키 내각에 상공대신으로 들어가고, 나중에 패망했을 때 A급 전범으로 분류돼 형무소에서 복역했다. 그러다가 냉전에 따른 미국의 점령 정책 변화로 형무소에서 풀려나 자민당 창당에 참여하고 1957년 수상이 된다. 5.16쿠데타 후에는 박정희 정권의 일본 쪽 후견인 역할을 하게 된다. 이러한 기시 노부스케와 박정희의 관계는 다른 한편으로는 박정희 정치 이념의 성격을 살펴보는 데 시사하는 바가 있다.


박정희가 일제 패망 전 경력을 부끄러워한 흔적은 어디에도 없다


프레시안 : 그 시사점은 무엇인가.


서중석 : 강상중과 현무암은 <기시 노부스케와 박정희>에서 “기시도 박정희도 만주국 건국을 포함해서 전전의”, 이건 일제가 패망하기 전을 말하는데, “역사에 대해 조금도 후회하지 않는 듯 보인다”고 지적했다.


기시 노부스케의 이런 태도를 분명하게 보여주는 일화가 있다. 기시 노부스케는 최고 학교로 꼽히던 도쿄 제1고교 출신인데, 고교 시절 은사가 전범으로 체포된 기시 노부스케에게 “천고에 남을 이름”이 애석하다면 “자결”하라는 단가(短歌)를 보내자 기시 노부스케는 “이름 대신 성전의 정당성을 만대에 전하리라”는 답가를 보냈다. 유명한 일화인데, 여기서 성전은 아시아·태평양 침략 전쟁을 가리킨다. 영광의 역사라고 군국주의자들이 얘기하는 것들에 대한 소름이 돋을 정도의 집념, 오늘날 아베 신조에게서도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집념을 이런 식으로 표출한 것을 볼 수 있다.


박정희에 대해 두 사람은 저서에 이렇게 썼다. “박정희도 전전의 경력에 강한 향수를 품을지언정, 그것을 부끄러워한 흔적 따위는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다. (…) 제국 군인이었던 사실은 내심 자긍심으로까지 느꼈다.”


그러면서 강상중과 현무암은 기시 노부스케와 박정희 둘 다 “강한 반소, 반공 의식 하에 군국주의적 국가 개조와 계획적 통제 경제를 단행”한다는 생각을 가졌다고 볼 수 있고, 그러면서 “기회주의적 ‘전향’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 변모를 거듭하면서”, 이건 최영 교수도 많이 지적하던데, “그때그때 권력의 원천의 차이에 부응하며 자신의 태도를 바꿔가게 된다”고 분석했다. 그런 점에서도 같다는 것이다. 박정희 개인은 미국 문화에 잘 적응하지 못했지만 그럼에도 미국의 요구에 그렇게 잘 부응할 수 없었던 것도 이런 특징과 관련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면서도 <국가와 혁명과 나>에서는 이집트 군사 혁명을 찬양하는, 다시 말해 앞뒤가 안 맞는 모습을 보여준다. 강상중과 현무암은 기시 노부스케와 박정희, 이 두 사람이 “재빠른 변신, 그리고 권력의 원천이 어디에 있는지를 가려내는 본능적 후각의 예민함”이라는 자질을 갖고 있었다고 평가했다.


▲ 1977년 9월 29일 청와대에서 악수하는 박정희 대통령과 기시 노부스케 전 일본 총리. ⓒ연합뉴스


유신 체제는 일본 극우가 꿈꿨던 쇼와 유신의 한국형 변종


프레시안 : 만주 시절 박정희의 경험은 박정희 집권기와 어떤 식으로 이어져 있다고 보나.


서중석 : 박한용 박사는 박정희의 만주국 경험이 5.16쿠데타 이후 집권기, 그중에서도 특히 10.17쿠데타 이후 얼마나 큰 영향을 끼쳤는가를 구체적인 예를 제시하며 설명했다. 5.16쿠데타 직후의 국가 재건 운동, 1970년대의 새마을운동 등 국민 개조 운동, 국민교육헌장, 이건 황국신민서사 부분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이는데, 그리고 국기에 대한 맹세, 애국 조회, 국기 하강식 같은 국가주의 맹세의 의례, 교련과 체육의 (모의) 수류탄 던지기 군사 교육, 충효 교육, 라디오 체조와 내 집 앞 쓸기 운동 및 국민 가요 부르기, 퇴폐 풍조 일소와 미풍양속 고취, 반상회, 고도 국방 체제를 목표로 한 총력 안보 체제와 국가 통제형 경제 개발 5개년 계획 등 유신 체제 운동은 일제가 식민지 조선과 만주국에서 실행했던 국가주의를 본떠 되살린 것이고 특히 유신 체제는 일본 극우가 꿈꿨던 쇼와 유신의 한국형 변종이라고 이야기했다. 이런 주장이 시사하는 바가 있다.


이처럼 박정희는 죽을 때까지 만주 인맥과 끈끈한 관계를 맺었고, 일본 육사 기간까지 포함한 만주 시절에 대한 향수라고 할 수 있는 것을 갖고 있었다. 그러면 왜 박정희는 만주로 갔느냐. 청와대 공보 비서관을 지낸 김종신이 만주군관학교에 간 이유를 묻자 박정희는 “긴 칼 차고 싶어서 갔지”, 이렇게 대답했다. 만주에 가기 위해 문경보통학교 교사직을 떠나던 날 제자들이 울음보를 터트리자 박정희는 “갔다가 큰 칼 차고 대장 되어 돌아오면 군수보다 너희들 선생님이 더 높다”고 얘기했다. 이런 여러 가지를 놓고 볼 때 ‘일제 치하에서 출세하고 상향된 지위로 올라가는 데에는 군보다 빠른 길은 없다. 기회의 땅 만주로 가서 군관학교에 들어가는 길밖에 없다’는 생각을 갖고 만주로 간 것으로 최영 교수를 비롯한 여러 사람이 쓰고 있다.


그러나 박정희는 만주군관학교에 바로 입학하지 못했다. 기혼자였고 연령이 초과돼서 입학 자격이 문제가 됐던 것이다. 그래서 다시 응모했는데, 이때 정황이 일본어 신문인 <만주신문>에 무려 3단 기사로 사진과 함께 ‘혈서 군관 지원, 반도의 젊은 훈도로부터’라는 제목으로 났다는 건 <만주신문>에서 박정희의 ‘혈서 군관 지원’을 얼마나 중요하게 평가했는가를 보여준다. ‘이건 널리 선전할 필요가 있다’고 보고 이렇게 지면을 내주지 않았겠나. “일사봉공(一死奉公) 박정희”, 그러니까 한 번 죽음으로써 충성하고 한목숨 바쳐 나라를 위하겠다고 반지(半紙)에 피로 쓴 편지를 동봉해 보냈는데, 이 혈서 지원 편지가 관계자들을 깊이 감격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그 편지에는 “일본인으로서 수치스럽지 않을 만큼의 정신과 기백으로써 일사봉공의 굳건한 결심입니다. 확실히 하겠습니다. 목숨을 다해 충성을 다할 각오입니다. 한 명의 만주국 군으로서 만주국을 위해, 나아가 조국을 위해 어떠한 일신의 영달을 바라지 않겠습니다. 멸사봉공, 견마의 충성을 다할 결심입니다”라고 적혀 있었다.


‘혈서 군관 지원’은 몇 년 전에야 발견된 것인데, <만주신문> 보도 후 박정희가 바로 만주군관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던 건 아니다. 만주군관학교에 박정희가 들어갈 수 있었던 데에는 신경 교외 제3독립수비대 대장으로 근무하던 관동군 대좌 아리카와 게이이치의 추천이 역할을 했다고 그런다. 대구사범학교 시절 박정희를 특별히 총애했다고 하는 아리카와 게이이치 교련 주임, 바로 그 사람이다. 이 사람은 1945년 6월 오키나와에서 전사한다. 어쨌건 박정희는 그렇게 해서 만주군관학교에 들어갔다.


대구사범학교 시절과 너무나 대조적인 만주군관학교 시절

ⓒ오월의봄

프레시안 : 만주군관학교 시절 박정희는 어떤 학생이었나.


서중석 : 1961년 11월 일본을 찾은 박정희가 만주군관학교 교장이던 나구모 신이치로를 특별히 초청해서 나오게 했다고 지난번에 얘기하지 않았나. 나구모 신이치로는 만주군관학교 시절 박정희에 대해 “천황 폐하께 바치는 충성심이라는 면에서 그는 일본인보다도 훨씬 일본인답게” 행동했다고 말한 것으로 강상중과 현무암의 책에 나온다.


창씨개명의 변화에도 생각해볼 대목이 있다. 만주에 간 초기인 1941년 이때는 창씨개명 이름이 다카키 마사오(高木正雄)였다. 다카키 마사오는 박정희 이름과 연관성이 있지 않나. 다카키의 키(木)는 박(朴)과 연관이 있고 마사오(正雄)도 정희와 닿는 면이 있다. 박정희라는 자기 이름의 흔적을 남긴 상태에서 창씨개명을 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1942년에 가면 오카모토 미노루(岡本實)로 이름까지 완전히 일본식으로 바꾼다. 민족색까지 지울 양으로 오카모토 미노루로 바꿨다고 강상중과 현무암의 책에는 적혀 있다.


박정희는 1942년 만주군관학교에서 우등생으로 선정돼 다른 몇 명과 함께 만주국 황제 부의(푸이)로부터 금장 시계, 그러니까 금으로 도금한 시계를 은사상으로 받았다. 이때 졸업식 답사를 박정희, 그러니까 오카모토 미노루가 했다고 하는데 “대동아공영권을 확립하는 성전에서 나는 사쿠라와 같이 훌륭하게 죽겠습니다”라는 선서가 포함된 답사를 했다고 그런다.


그러고는 다른 성적 우수자와 함께 일본 육사 본과 3학년에 편입해 1944년에는 여기서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다. 일본 육사를 나온 후 박정희는 한때 견습 사관으로 소만(蘇滿) 국경 지대의 치치하얼에 주둔한 관동군에 배속돼 2개월여 동안 근무했다고 한다. 그러고 나서 만주군(만주국 군대) 소속으로 옮기는데 보병 제8단에 배속된다. 이때는 주로 열하 지방에서 많이 활동한 것으로 이야기하는데, 팔로군을 공격할 때 소대장으로 작전에 참여했다. 1945년 7월 만주군 중위로 진급하지만, 한 달 후인 8월에 일제가 패망하는 것을 맛보게 된다.


이러한 박정희가 만주군관학교 시절에 얼마나 의의를 느꼈다고 할까, 충만한 생활을 보냈는가 하는 건 대구사범학교 시절과 비교하면 잘 알 수 있다.


프레시안 : 대구사범학교에 다닐 때 박정희는 어떤 모습을 보였나.


서중석 : 조갑제 글이나 다른 글들을 보면 박정희는 대구사범학교 시절 성적이 참 나빴다. 1학년 말에 97명 중 60등, 2학년 때에는 83명 중 47등이었다. 3학년 때에는 더 떨어져서 74명 중 67등으로 꼴찌에 가까웠는데 4학년 때에는 73명 중 73등, 진짜 꼴찌를 했다. 5학년 때에는 70명 중 69등을 했다. 이렇게 성적이 나빠서 기숙사비 혜택도 받지 못하게 됐고, 그 때문에 돈을 구하러 상희 형을 자주 찾아갔다고 한다. 그리고 문경은 경북에서 외진 곳 아닌가. 문경보통학교에 배치된 것도 성적 불량 때문이라고 보고 있다.


대구사범학교에서 왜 이렇게 성적이 나빴는가에 대해 한 연구자는 시골 출신 우등생이 명문 학교에 가서 좌절을 겪은 것이라고 설명했다. 또 어떤 사람은 2학년 때부터 방황한 건 성적 불량에서 비롯됐는데, 그만큼 자존심이 손상되고 열등감이 작용해 그렇게 된 것 아니겠느냐고 이야기했다. 그런데 그런 것 못지않게 박정희는 공부 체질이라기보다는 군인 체질 아니었느냐고 볼 수 있는 대목도 있다. 성적이 좋지 않던 때에도 교련 과목에는 아주 관심이 많아 시범 조교로 뽑힐 정도였고, 총검술도 잘했다고 나온다.


성적이 불량했을 뿐만 아니라 출석 상황도 좋지 않았다. 결석을 한 날이 많았다. 2학년 때는 10일 결석했고 3학년 때는 41일, 4학년 때는 48일, 5학년 때는 41일이나 됐다. 이렇게 결석률이 높았는데, 학적부를 보면 2학년 때는 ‘아주 음울하다’, 3학년 때는 ‘다소 진실성이 부족하다’, 4학년 때는 ‘불평이 있고 진실성이 부족하다’, 이런 식으로 나와 있다.


그런데 이와 달리 만주군관학교에서는 성적이 아주 좋았다. 만주국 황제로부터 금장 시계도 하사받고 졸업식에서 답사도 읽을 정도였다. 그건 그만큼 만주군관학교의 생이 박정희로서는 얼마만큼 의의를 느낄 수 있는 생이었는가를 이야기해준다고 볼 수 있다.



역사학자 서중석의 진단

“박근혜는 유신의 허깨비가 결코 아니었다”

“박정희 신드롬, 박근혜가 지울 수도 있다”

“<조선> 말대로면, 이명박·박근혜 정부는 빨갱이”



2.26쿠데타를 일으킨 청년 장교들과 기타 잇키, 그리고 박정희


프레시안 : 대구사범학교 시절 꼴찌도 하며 밑바닥에 있던 박정희는 만주군관학교, 일본 육사에서는 최우등으로 변신했다. 자녀 교육에 관심이 많은 요즘 학부모들이 그 비법을 궁금해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의 큰 변화인데, 박정희의 동기와 선택 과정을 보면 ‘본받을 만하다’는 얘기를 꺼낼 수 없게 만드는 씁쓸한 시대상을 느낄 수밖에 없다. 다른 사안을 짚어보면, 박정희는 5.15사건과 2.26사건을 일으킨 일본의 군국주의 장교들에게 심취한 모습을 보였다고 지난번에 이야기했다. 그중에서도 특히 2.26쿠데타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으로 이야기되는데, 박정희는 언제부터 군국주의의 영향을 강하게 받게 된 것인가.


서중석 : 전에 얘기한 것처럼 5.16쿠데타 직전 박정희는 “2.26사건 때 일본의 젊은 우국 군인들이 나라를 바로잡기 위해 궐기했던 것처럼 우리도 일어나 확 뒤집어엎어야 할 것이 아닌가”라고 기염을 토했다고 한다. ‘부패하고 타락한 민간인 정치의 문제를 쿠데타로 일거에 해결하고 국가를 개조하겠다’, 2.26쿠데타 주동자들은 이런 생각을 했다. 그러한 2.26쿠데타의 영향을 박정희는 어느 때 받은 것일까?


예컨대 대구사범학교에 다닐 때 받았을까? 대구사범학교 시절 박정희가 아리카와 게이이치 교련 주임의 영향을 받은 건 사실이고, 거기에는 2.26쿠데타와 관련된 사항이 있었을 것이라고 볼 수는 있다. 그러나 2.26쿠데타를 일으킨 장교들이 품었던 것과 같은 생각을 대구사범학교 시절에 박정희가 직접 품게 됐다고 보는 건 좀 무리인 것 같다. 그러면 문경보통학교 교사 시절엔 어땠을까, 이걸 생각해볼 수 있는데 대구사범학교에 다닐 때에나 교사 시절에 그 영향을 그렇게 많이 받았던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2.26사건 같은 것에 대해 관심은 가졌겠지만 그것을 박정희 자신의 행동 이념, 정치 이념으로까지 삼았겠나 싶다. 이런 점은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준식 박사 글에 따르면, 박정희가 교사 시절에 일본 제국 군대의 승전을 고취하는 놀이를 직접 연출할 정도였다고 한다. 그만큼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 전쟁에 좀 빠져 있었던 것 아니냐고 볼 수 있는 구체적인 사례로 이것을 들고 있다.


그렇지만 난 박정희가 2.26사건의 영향, 군국주의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건 역시 만주에 갔을 때부터라고 보고 있다.


프레시안 : 그렇게 판단하는 근거는 무엇인가.


서중석 : 이준식 박사는 “관동군이야말로 박정희가 꿈꾼 군대의 전형이었다. 만주국은 박정희가 바란 국가의 모범이었다”, 이렇게 썼다. 박정희는 만주군 장교로서 자신의 활동에 대해 상당한 긍지를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면서 만주군관학교, 일본 육사, 만주군 시기에 2.26사건을 일으킨 자들이 가졌던 사고로부터 상당한 영향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만주군관학교 교관 중에는 2.26사건 관련자이지만 초급 장교라는 이유로 처형을 면하고 만주로 추방된 간노 히로시(管野弘) 같은 황도파 출신 장교가 포함돼 있었다고 이준식 박사 글에 나오는데, 이 점이 주목된다. 간노 히로시는 만주군관학교 제2연을 지휘하고 있었다고 하는데, 증언에 의하면 박정희는 이 간노 히로시로부터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또한 일본 육사 동기의 증언에 따르면, 일본 육사 재학 시절 박정희는 2.26사건과 같은 청년 장교들의 국가 개조 운동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고 한다. 이처럼 여러 글과 책에서 박정희가 2.26쿠데타, 일본에서는 이것을 2.26사건이라고 많이 이야기하는데, 이 쿠데타를 일으켰던 청년 장교들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여기서 2.26사건을 개략적으로 살펴보자. 1936년 2월 26일 새벽 청년 장교들이 도쿄의 근위 보병 제3연대, 보병 제1연대와 제3연대 등의 병력 1400여 명을 이끌고 쿠데타를 일으켰다. 이들은 수상 관저, 경시청 등을 습격해 내대신 사이토 마코토, 대장상 다카하시 고레키요, 교육총감 와타나베 조타로를 살해하고 스즈키 간타로 시종장에게 중상을 입혔다. 내대신, 시종장 등은 높은 직위였는데 이때 살해된 내대신 사이토 마코토는 3.1운동 직후 한 번, 그리고 1929년에 다시 한 번 이렇게 두 번이나 조선 총독을 지낸 바로 그 사이토 마코토다. 쿠데타 세력은 수상을 죽이려고 수상 관저를 습격했는데, 수상을 죽이지는 못하고 수상의 처남으로 비서관을 맡고 있던 사람을 수상으로 오인해 살해했다.


무엇을 요구하며 이런 일을 벌였는지를 살펴보면, 이들은 제국 의사당, 수상 관저, 육군 대신 관저, 경시청 일대를 점거하고 가와시마 요시유키 육군 대신을 면담해 국가 개조를 요구했다. 국가 개조를 요구했다는 것, 바로 이걸 빼놓고는 구체적인 내용이 없다. 이 사람들이 무엇을 위해 이런 일을 벌였는지를 분명하게 알 수 있게 할 만한 구체적인 내용이 없다. 다만 대개 청년 장교들이 쓴 여러 글을 가지고 설명하고 있다.

하여튼 내각 기능이 마비된 상태에서 육군 대신이 고시(告示)를 발포한다. 사건을 일으킨 장교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친 황도파 지도자 아라키 사다오 대장(전 육군 대신)의 영향으로, 이 고시는 쿠데타에 동정적인 태도를 보여줬다. 그런데 27일 새벽 계엄령이 발동되고 ‘반란군을 진압하라’는 히로히토 천황의 지시가 내려오면서, 쿠데타군은 29일 오전 8시부터 오후 2시까지 대부분 원대 복귀했다. 이게 2.26사건이다. 이 쿠데타로 관련자 1483명 중 132명이 기소되고 장교·민간인 19명이 사형 선고를 받았다.


박정희와 2.26사건의 관계를 서술하고 있는 일부 논객들은 2.26쿠데타를 일으킨 청년 장교들이 농촌의 참상 때문에 궐기했다는 점을 평가하고 있다. 그러면서 박정희도 그런 점에 끌렸던 것 아니냐는 주장을 하고 있다.


프레시안 : 그러한 주장, 어떻게 보나.


서중석 : 이런 주장에 대해서는 후지와라 아키라 교수가 <천황제와 군대>라는 책과 여러 글에서 면밀히 분석했다. 그것에 따르면, 쿠데타를 일으킨 청년 장교들은 구체적인 정책을 갖고 있지 않았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도쿄의 근위 보병 같은 쪽에서 쿠데타를 일으킨 데서도 알 수 있듯이 주동자들은 대개 좋은 집안에서 자란 이들로 농어촌의 실상을 잘 알지는 못했다는 것이다. 피폐한 농어촌, 농민 구제를 추상적인 구호로 제시했을 뿐 현실적인 구체성은 이 사람들의 국가 개조 운동에서 별로 나타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출신을 살펴봐도 당시 유력한 군인 가정에서 태어났거나 상당히 좋은 집안에서 자란, 그래서 주로 도쿄 같은 도시에 살았던 사람들이다. 이런 점들은 이들이 농어촌 참상 같은 것들 때문에 궐기한 것이라고 볼 수 없는 하나의 이유가 되지 않겠느냐고 후지와라 아키라 교수는 썼다.

기타 잇키. ⓒ위키미디어커먼스

그리고 박정희가 영향을 받은 것으로 여러 사람의 글에 나오는 게 누구냐 하면, 2.26사건으로 사형 선고를 받고 처형된 민간인 중 한 명인 유명한 기타 잇키다. 이 사람이 <일본 개조 법안 대강>에서 주로 설명한 것이 국가 개조이고, 2.26쿠데타를 일으킨 청년 장교들이 이것으로부터 크게 영향을 받았다는 건 많은 사람이 인정하고 있다. 이노우에 키요시 교수가 쓴 <일본의 역사>에서는 2.26쿠데타와 관련해 이런 지적을 하고 있다. 그것에 따르면, 2.26쿠데타 이후 일본은 국민 생활 전반에서 군국주의 일색이 되는데 이건 천황 절대주의 기구의 중핵인 군부가 국가의 독재권을 쥐고 일본 제국주의의 위기를 타개하려는 것이었다. 이것을 천황제 파시즘 또는 군국주의 파시즘이라고 부른다. 기타 잇키는 <일본 개조 법안 대강>에서 실제로는 국가와 대자본을 융합하려고 했다. 중소 지주는 사회에 필요하다는 주장과 더불어 계급투쟁을 절멸시키자는 주장도 했다. 계급투쟁 절멸 이야기는 일반적으로 극우들이 많이 주장하는 것인데, 기타 잇키도 이런 주장을 했다. 계급투쟁을 절멸하고 행정은 재향 군인단 회의와 군인 또는 천황의 관리가 수행하고 국력을 모아 일본을 세계의 크고 작은 국가 위에 군림하는 최강의 국가로 만들자, 이게 바로 기타 잇키의 대아시아주의였다. 기타 잇키의 대아시아주의는 이런 대아시아주의였다. 세계 여러 나라 위에 군림하는 최강의 국가로서 일본이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으로, 팔굉일우 구상이라든가 대동아공영권 구상이 기타 잇키에게서 나왔다는 것을 보여준다. (기타 잇키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건 2.26쿠데타를 일으킨 청년 장교들만이 아니었다. 기시 노부스케도 기타 잇키에게 매료된 사람 중 한 명이었다. 기타 잇키의 책을 밤새워 필사했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다. <편집자>)


유신 체제로 가는 정신적 바탕의 실체


프레시안 : 박정희의 유신 쿠데타와는 어떤 관계를 맺고 있었다고 보나.


서중석 : 황도파와 기타 잇키의 영향 아래에 있었던 청년 장교들은 자본가와 민간인 정치인에 대한 강한 불신, 국가의 유일 영도자인 천황의 권위에 의존해 국가를 개조하자는 사고, 사회 또는 국가가 안고 있는 문제나 모순을 쿠데타라는 수단으로 일거에 해결하려는 생각, 자신들의 행동만이 위란에 처한 국가를 구할 수 있다는 신념을 갖고 있었다. 바로 그런 것들이 군국주의 파시즘 또는 천황제 파시즘의 골간을 이룬다.

이것은 이념성이 강한 조선인 청년이나 군인에게도 영향을 끼쳤던 것으로 보인다. 아울러 박정희는 2.26쿠데타를 일으킨 청년 장교들이야말로 위기에 처한 국가를 구하고 개조하려는 사명감이 투철한, 올바른 군인 정신의 소유자들이었다고 본 것 아니겠는가, 그래서 2.26사건에 대한 강한 공감을 5.16쿠데타를 전후해서도 피력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민간인 정치에 대한 강한 불신, 그것을 중요 내용으로 하는 사회적 문제점을 쿠데타로 해결하고 올바른 군인 정신으로, 박정희 글에 이 ‘올바른’이라는 말이 많이 나와서 내가 이 말을 거듭 쓴 것인데, 고도의 능률을 발휘하는 체제가 필요하다는 사고가 박정희에게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한 사고가 식민지 노예근성을 탈각하지 못한, 이것을 최고회의 의장 시기 언술로 표현한다면 자율 정신과 자각과 책임감을 결여한 한국인이라는 것인데 그러한 한국인에게 강력한 지도자가 필요하다는 사고와 결합해 유신 체제로 가는 정신적 바탕이자 정치 이념이 된 것이 아닌가, 그렇게 생각해볼 수 있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1·2권 서평 바로 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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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덕련 전 기자

<2016-01-13> 프레시안

☞기사원문: 꼴찌에서 최우등으로 박정희가 거듭난 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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