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력 보는 남자] 2005년 1월 17일 ‘1965 한일협정, 판도라의 상자’가 열리다
‘어제’ 뉴스는 여전히 살아 있습니다. 뉴스 그 다음은 우리 삶과 ‘오늘’ 어떤 식으로든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다만 쏟아지는 뉴스에 묻혀 잘 안 보일 뿐입니다. 어제 뉴스를 오늘의 이야기로 엮어보겠습니다. [편집자말] |
“1965년에 체결된 한일 협정 관련 문서가 오늘부터 일반에 공개됐습니다. 이번에 공개된 한일협정 관련 문서는 전체 161권 가운데 5권으로 모두 1천2백 쪽에 달하며 65년까지 진행된 한일 회담 회의록과 협상 대표 보고문, 본부 지시문건 등이 포함돼 있습니다. 정부의 문서 공개는 일제 강점기 피해자들의 요구를 수용한 것으로…” (2005년 1월 17일 YTN)
2005년 오늘(1월 17일)은 ‘판도라의 상자’가 열렸던 날입니다. 우리나라 외교부인지 다른 나라 외교부인지 영 헷갈리는 11년 후 ‘오늘’과 비교하면 어떤가요. 그때와 지금의 외교부는 ‘역시’ 달랐던 걸까요? 한일 협정 문서 공개로부터 3개월이 되는 시점, 2005년 4월 12일 국회 본회의 속기록을 보면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
국회에서 ‘1965년 한일협정’ 공개적으로 옹호한 외교부
▲ 2005년 4월 12일 국회 본회의장에서 1965년 한일협정을 놓고 설전을 벌였던 이태식 당시 외교통상부 차관(왼쪽)과 강창일 당시 열린우리당 의원. 이후 이태식 차관은 주미대사로 발탁된다 | |
ⓒ 오마이뉴스 이종호 |
강창일 : “쿠데타로 집권한 군사정권 하에서 체결된 1965년도의 한일협정에서 한일 간 과거 청산의 첫 단추를 잘못 꿰었기 때문에 오늘날 독도 문제와 교과서 왜곡이나 과거사 관련 망언 등의 사태가 초래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인정하십니까?”
이태식 : “한일협정은 그때 당시의 특수한 상황을 반영해서 14년간 끌었던 협상을 종결했던 것입니다. 따라서 그때 당시의 협정이 잘못되었기 때문에 지금과 같은 상황이 왔다고 말씀하신 데 대해서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중략) 문제는 그렇게 협정을 체결하려고 할 때 상대방이 동의를 하지 않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러면 협정을 성립시킬 수가 없는 난점이 있습니다. 현실적인 애로를 이해를 해주셔야 됩니다.”
강창일 : “자꾸 현실, 현실적으로 그렇게… 반국민적인 반민족적인 반역사적인 발언을 지금 몇십 년 한국 외교부는 주장해 왔습니다.”
당시 이태식 외교통상부 차관과 강창일 열린우리당 의원의 ‘입씨름’이었습니다. 이 차관의 말을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최대한 국익을 위해 노력한 회담이었다는 것이었죠. 이와 같은 ‘포장’이 벗겨질지도 모르는데, ‘굴욕 외교’라는 비판을 맨몸으로 받아낼지도 모르는데, 그럼 그때 외교부는 왜 한일협정 문서를 공개했던 것일까요.
“노무현 대통령 결단으로 공개” 당시 외교부 수장은 반기문
▲ 2005년 8월 26일 외교통상부는 한일협정.한일회담 외교문서 156권 3만5354 페이지를 전격 공개했다. 당시 외교통상부 직원이 외교문서가 기록된 마이크로 필름을 살펴보는 모습 | |
ⓒ 오마이뉴스 권우성 |
사실, 싫었습니다. 법원이 공개하라고 했지만 그래도 싫었습니다. 2004년 서울행정법원이 1965년 한일협정 문서 가운데 대일 청구권 관련 문서를 공개하라고 판결했는데도 항소를 선택했던 게 당시 외교부였습니다. 당시 소송을 진행했던 장완익 변호사와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원들은 다음(Daum) 스토리펀딩 ‘해방 70년, 나는 싸우고 있다’를 통해 그때를 이렇게 돌아봅니다.
“이 소송에서 외교통상부는 ‘문서를 공개하면 국내에 반일 감정이 일어나 우호적인 한일 관계를 해치고, 북일 교섭에서 북한을 이롭게 한다’는 이유를 들며 문서를 공개하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여러분들이 보시기엔 어떻습니까. 황당하죠. 하도 어처구니가 없어서 ‘한일관계를 전담하는 한국 외교통상부 동북아1과는 일본 외무성의 한국 지부냐?’라고 물었습니다. 일본이 주장할 법한 말을 한국 정부가 하고 있으니 말이 안 되는 거죠.
1심 재판부는 판결에서 문서를 지정하여 공개하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러자 외교통상부가 법원의 판결을 받아들이지 않고 고등법원에 항소했습니다. 그런데 이후 갑자기 한국 정부가 입장을 바꿔서 한일협정 관련 문서를 전면 공개하고 항소를 취하했습니다. 일찍부터 강제동원 피해자 문제에 관심을 갖고 있었던 당시 노무현 대통령의 결단으로 문서가 공개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만일 노 대통령의 지시가 없었다면 문서가 공개되는데 또 시간을 기다려야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해 8월 26일, 외교부는 1951년부터 1965년까지 진행됐던 한일협정·한일회담 외교문서를 모두 국민 앞에 내놓습니다. 156권, 3만5354페이지에 이르는 분량이었다고 합니다. 물론 그렇다고 외교부가 종전 입장을 굽힌 것은 아니었습니다. 반기문 UN 사무총장이 수장으로 있던 당시 외교부의 공식 입장은 여전히 이랬습니다. ‘최대한 국익을 위해 노력한 회담이었다’.
2005년 1월, 박근혜 당시 한나라당 대표의 말
▲ 2005년 1월 19일 신년 기자회견 당시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 모습. 한 기자가 “한일협정 문서공개가 박 대표 ‘흠집내기’라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질문하자, “여러분도 그렇게 생각하느냐?”며 웃고 있다. | |
ⓒ 오마이뉴스 이종호 |
외교부와 비슷한 입장을 그때 공개적으로 밝힌 이가 또 한 사람 있었습니다. 박근혜 대통령, 당시 한나라당 대표였죠. 그는 2005년 1월 19일 연두 기자회견을 통해 “협정을 맺을 당시 우리나라는 너무나 가난하고 어려웠다. 그래서 그 돈을 나라 발전에 썼고 나라가 발전했다”면서 ‘아버지의 외교부’를 두둔했습니다. 그때 또 이런 말도 했습니다.
“역사에 관한 일은 역사학자가 판단해야 한다. 어떠한 경우든 역사에 관한 것은 정권이 재단해선 안 된다.”
그 후 이 말의 의미가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지는 잘 아실 겁니다. 1965년 한일협정에 대해 2013년 교학사는 <한국사 교과서>에 처음에는 “일본의 식민지배에 대한 배상은 해결되었다”고 썼다가 국사편찬위의 수정 지시로 ‘부분적으로’란 단어를 넣었습니다. 이런 교과서를 황교안 총리는 “유일하게 편향되지 않은 교과서”라고 극찬했고, 이런 식의 교과서를 대통령은 ‘국정 교과서’라는 이름으로 지금 밀어붙이고 있죠. 아마 교과서에 이런 말이 실릴지도 모르겠습니다.
“물론 이러한 제 문제가 우리만의 희망과 주장대로 해결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내가 자신을 가지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처해 있는 제반 여건과 선진 제국의 외교 관계에 비추어 볼 때 우리의 국가 이익을 확보하는 데 최선을 다했다는 사실입니다.” (박정희 대통령의 한일 협정 관련 1965년 6월 23일 특별 담화 중)
박정희 대통령 한일 협정 특별담화와 그 싱크로율이…
▲ 2006년 3월 30일, 노무현 대통령과 반기문 외교통상부 장관의 모습 | |
ⓒ 연합뉴스 |
“현실적 제약이 있기 때문에 100% 우리가 만족할 수는 없다. 최대한 성의를 갖고 최상의 것을 받아내 제대로 합의되도록 노력한 것은 인정해주셔야 한다”, 위안부 협상에 대해 지난 13일 박근혜 대통령이 대국민 담화에서 한 말입니다. 앞서 소개한 대통령 아버지의 ‘그것’과 참 닮았습니다. 여기서 나아가 박 대통령은 ‘억지’에 가까운 말도 했지요.
“그러나 이 문제가 제기되고 지난 24년 동안 이걸 어떤 정부에서도 역대 정부에서 제대로 다루지 못하고 심지어 포기까지 하고 그랬던 아주 어려운 문제였습니다.”
윤미향 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대표는 <슬로우뉴스>를 통해 “노태우 대통령은 일본을 방문해 일본 국왕에게 진상 규명을 요구, 일본 국회에서 일본 정부가 ‘군 개입이 아니다. 민간업자가 한 일’이란 답변을 하게 만들었으며, 김영삼 대통령 때는 처음으로 피해자 생활안정지원법을 제정해 제도적으로 지원하도록 했다”고 반박했습니다.
이어 윤 대표는 “김대중 대통령은 일본의 법적 책임이 아닌, 민간 위로금 성격의 아시아여성평화국민기금을 반대하면서 정부 세금으로 일본 국민 기금이 지급하려고 하는 지원금을 지원했으며, 노무현 대통령은 한일협정 문서를 모두 공개하고, 민관합동조사기구를 만들어 조사했으며, 한국 정부로서는 처음으로 법적 책임에 대한 중요성을 일본 정부에 공식적으로 요구했다”고 적었습니다. 또 “이명박 대통령은 위안부 문제를 해방 후 처음으로 외교정상회담의 의제로 올렸다”고 평가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박 대통령의 역대 정부에 대한 비판에 동의하십니까. 오히려 박 대통령이 이번 협상에 쏟아지는 비판의 핵심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국익을 위해 노력하지 않았다는 것이 아니잖아요? 왜, 최종적, 불가역적이란 ‘대못’을 박아버렸을까요. 1965년 한일 협정이 그랬던 것처럼, 반대의 목소리를 계엄령으로 억눌렀던 그때처럼.
두 대통령이 외교부를 대하는 자세
▲ 2005년 9월 7일, 노무현 대통령과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 회동 모습 | |
ⓒ 연합뉴스 |
이 대목에서 두 대통령의 차이가 드러납니다. 지금도 외교부가 최선을 다했다고 강조하는 박 대통령과 달리 노무현 대통령은 적어도 한일 협상에 있어서는 외교부만 바라보지 않았습니다. 그보다는 1965년 한일협정 문서를 모두 공개함으로써 여론을 수렴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내는 한편, 그래서 앞으로 어떻게 하면 좋을지 정부와 민간이 함께 머리를 맞대는 방식을 택했습니다.
그래서 나온 것이 2005년 8월 26일 발표된 ‘한일회담 문서 공개 후속 대책 관련 민관공동위원회’의 입장입니다. 만약, 아래와 같은 입장을 박근혜 정부가 ‘계승’했다면 어땠을까요. 적어도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민변)이 이번 한일 위안부 협상 공동 발표문과 관련해 한일 양국이 교환한 서한 등에 대한 공개를 요구하는 일은 없었을 겁니다. 적어도 ‘아버지의 한일협정’과 같은 일이 되풀이되지는 않았을 것이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 가슴에 다시 한 번 대못을 박는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앞서 소개했던 ‘해방 70년, 나는 싸우고 있다’에서 옮깁니다.
① 한일청구권 협정은 기본적으로 일본의 식민지 지배 배상을 청구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고, 샌프란시스코 조약 제4조에 근거하여 한일 양국 간 재정적, 민사적 채권, 채무 관계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었다.
② 일본군 ‘위안부’ 문제 등 일본 정부·군 등 국가 권력이 관여한 반인도적 불법행위에 대해서는 청구권 협정에 의하여 해결된 것으로 볼 수 없고, 일본 정부의 법적 책임이 남아 있다.
③ 사할린 동포, 원폭 피해자 문제도 한일청구권 협정 대상에 포함되지 않았다.
④ 한일협정 당시 한국 정부는 일본 정부가 강제 동원의 법적 배상·보상을 인정하지 않음에 따라 ‘고통받은 역사적 피해 사실’에 근거하여 정치적 차원에서 보상을 요구하였으며, 이러한 요구가 양국 간 무상 자금 산정에 반영되었다.
⑤ 청구권 협정을 통하여 일본으로부터 받은 무상 3억 불은 ‘개인재산권(보험, 예금 등), 조선 총독부의 대일 채권 등 한국 정부가 국가로서 갖는 청구권, 강제 동원 피해 보상 문제 해결 성격의 자금’ 등이 포괄적으로 감안되어 있다.
⑥ 청구권 협정은 청구권 각 항목별 금액 결정이 아니라 정치 협상을 통한 총액 결정 방식으로 타결되었기 때문에 각 항목별 수령금액을 추정하기 곤란하지만, 한국 정부는 수령한 무상자금 중 상당 금액을 강제동원 피해자의 구제에 사용하여야 할 도의적 책임이 있다고 판단된다.
⑦ 한국 정부는 일제 강점하 반인도적 불법행위에 대해서는 외교적 대응 방안을 지속적으로 강구해 나가며,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관해서는 UN 인권 이사회 등 국제기구를 통해서 문제 제기를 계속한다.
이정환 기자
<2016-01-17> 오마이뉴스
☞기사원문: 외교부에 대한 ‘믿음’, 박근혜와 노무현의 결정적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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