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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집념의 검사 프리츠 바우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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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념의 검사 프리츠 바우어 


이재승/ 인권연대 운영위원


<집념의 검사 프리츠 바우어>는 2015년 10월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상영된 독일영화이다. 필자는 아직 이 영화를 보지 못해서 인터넷 장바구니에 담아두었다. 원제가 Der Staat gegen Fritz Bauer(국가 대 프리츠 바우어)이니까 실제로 ‘과거를 덮으려는 국가에 저항하는 프리츠 바우어’, ‘나치제국과 대결하는 프리츠 바우어’로 번역할 수 있을 것도 같다. 작품은 아이히만의 체포와 소송, 나치청산에 관여하는 검사 프리츠 바우어와 주변 인물들에 초점을 맞추었다고 한다. 이스라엘에서 재판이 진행되었지만 나치를 처벌하기 위한 그의 노력은 국경을 넘어 계속되었다. <집념의 검사 프리츠 바우어> 외에도 그에 관한 영화나 방송물들이 다섯 편도 더 있다. 필자가 아직 보지도 않은 영화와 자료들을 이렇게 거론하는 것은 과거청산의 역사에서 프리츠 바우어(1903-1968) 만큼 중요한 인물이 없기 때문이다.


그는 1903년에 독일 슈투트가르트에서 유대인으로 태어났으며, 문화혁명기인 68년 프랑크푸르트에서 사망하였다. 그는 하이델베르크, 뮌헨, 튀빙엔에서 법학을 공부한 후 28년에 슈투트가르트 지방법원의 법관시보가 되었고, 2년 후에 최연소로 바이마르 공화국에서 법관에 임용되었다. 그는 정치적으로 매우 적극적이어서 십대 후반인 1920년에 사회민주당에 가입하였으며, 22년에 <공화주의 법조단(Republikanischer Richterbund)>의 일원이 되었다. 공화주의 법조단은 판사뿐만 아니라 검사, 법학자, 변호사 등으로 구성된 단체로서 바이마르 공화국을 정치적으로 옹호하였다. 바우어는 33년 나치의 집권에 맞서 총파업 모의에 가담하였다가 체포되어 수용소에 8개월간 구금되었다가 석방되었다. 그는 34년 숙청법에 의해 해직된 후 36년에 덴마크로 망명을 하였다. 40년에 덴마크가 독일에 점령당하자 체류자격을 상실하였으며, 43년에 덴마크에 거주한 유대인의 강제이송이 시작되자 스웨덴으로 탈출하여 빌리 브란트 등과 더불어 <사회주의 트리뷴>지를 창간하였다. 그는 나치가 패망한 후 49년에 독일로 돌아왔다.


영화 <뉘른베르크 재판>이나 <동경심판>을 통해서 추축국인 독일이나 일본이 처음에는 연합국의 군사재판을 연합국의 마지막 공습으로 보거나 승리자의 법정으로 비아냥거렸다는 것을 알고 있다. 지난 8.15에 제2차 대전과 연합국의 군사재판에 대해 아베 수상이 했던 발언을 듣고 일본정부 당국은 아직도 그런 분위기를 벗어나지 못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독일이 연합국의 군사재판 당시와 그 후에 보여준 국제규범에 대한 태도는 사뭇 다르다. 독일 사회는 연합국의 판결을 외부에서 강요된 규범이라고 부인하고 제거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규범으로 내면화 또는 맥락화하였다. 그 규범의 내면화 운동의 중심에 바로 프리츠 바우어라는 걸출한 인물이 서 있다.


바우어는 브라운슈바이크 주의 부장검사였을 때에 레머라는 예비역 장군이 사회주의제국당(1952년 위헌정당으로 해산됨)의 당집회에서 1944년 7월 20일 모의가담자(히틀러 암살 미수사건에 가담한 신학자 본회퍼, 카나리스 제독, 슈타우펜베르크 대령 등을 말한다. 이 사건은 <발퀴레>로 영화화되었다)를 반역자로 비방하자 그를 기소하여 사자 비방 및 추모감정 모독죄로 유죄판결을 끌어내었다. 그런데 이 유죄판결에서 바우어는 재판부로부터 엄청난 정치적 언명을 받아낸다. “나치국가는 법치국가가 아니라 독일 국민의 행복에 기여하지 않았던 불법국가였다. … 제국의사당방화사건에서 시작하여 제국장검의 밤과 제국수정의 밤을 거치며 독일 국민이 감수해야만 했던 모든 것이 소스라치게 하는 불법이다.” 바우어는 독일 법원으로 하여금 자기 역사에 대한 총체적 고백을 하도록 유도하였다. 이에 비하면 우리나라 법원은 유신체제의 저항자들, 예컨대, 75년의 인혁당사건의 희생자들을 구제해주면서도 유신체제를 불법체제라고 선언하지 않았고, 일본 역시도 공식적으로 전쟁과 식민 지배를 관철시켰던 일본제국을 불법국가라고 선언하지는 않았다.


▲ 영화 <집념의 검사 프리츠 바우어 사진 출처 – 부산국제영화제

더욱 중요한 바우어의 행적은 헤센주 검찰총장으로서 프랑크푸르트에서 또 다른 아우쉬비츠 재판을 진행한 것이다. 원래 연합국은 주요 전범재판 이외에 다각도로 후속재판을 진행하였는데, 그 중 수용소재판이 상당히 중요하다. 나치 독일은 독일과 폴란드 등에 70개의 수용소를 설치하였기 때문에 종전 후에 각 수용소마다 연합국들이 수용소 관리자들에 대해 재판을 진행하였다. 아우쉬비츠는 폴란드 관할에 속하였기 때문에 폴란드 당국은 1947년 11월 24일부터 12월 22일까지 한 달 동안 크라쿠프에서 40명의 아우쉬비츠 수용소 직원들을 단심으로 재판하여 그중 21명을 교수형에 처했다. 그러나 더 많은 수용소 직원들은 체포를 피해 잠적하였고, 50년대에 이르러 이들이 하나둘 검거되자 프리츠 바우어는 연방법원과의 협의를 통해 1963년부터 1965년까지 2년간 프랑크푸르트에서 재판하였다. 새로 출범한 독일연방공화국(서독)이 헌법에서 사형 제도를 폐지한 덕분에 그들은 모두 사형을 면하였다. 6인은 종신형을 선고받고, 11인은 유기징역을 선고받고, 나머지 3인은 무죄판결을 받았다. 이후로도 두세 명씩 세 차례 아우쉬비츠 재판이 프랑크푸르트 법정에서 진행되었다. 영화 <책 읽어 주는 남자>는 바로 이 재판을 배경으로 삼았다. 프랑크푸르트 아우쉬비츠 재판은 연합국이 떠났으니 이제는 모르쇠가 아니라 독일인 스스로, 독일인에 대하여 나치범죄를 처벌하기 시작한 놀라운 사건이었다. 그 후 독일은 나치범죄를 처벌하기 위하여 살인죄(모살죄)에 대해 공소시효를 연장하다 급기야 폐지하였다. 그래서 2015년 독일법원은 아우쉬비츠로 이송되어온 유대인들의 현금을 장부에 기재하는 일만 했다는 그뢰닝(93세)에게 살인방조죄로 4년형을 선고하였다. 시간이 흐를수록 책임은 희미해지는 것이 아니라 강화되고 있다. 아우쉬비츠 수용소에서 어떠한 역할을 수행했다는 것 자체가 범죄이다.


1969년 바우어가 사망하자 프리츠 바우어 상이 생기고, 프랑크푸르트에는 95년에 프리츠 바우어 연구소가 설립되었으며, 그가 거쳐 간 법원이나 지역에 그를 기념하는 홀과 길이 생겨났다. 나치범죄를 수치로 묻어버리고 망각하려는 시대 분위기를 철저하게 타파하고 국제규범을 독일인의 것으로 전환하는 일을 바우어가 수행했기 때문이다. 우리의 법조는 어떤가? 대법원은 6.25전쟁 중 정부 정책과 명령에 따라 자행된 민간인 학살에 대해서는 국가의 배상책임을 인정하면서도 유신시대에 긴급조치를 적용한 판사의 행위는 불법이 아니라고 판결하였다. 검찰은 어떤가? 실제로 권위주의 시대에 수많은 시국사건에서 자행된 인권침해는 수사기관과 검찰의 협력 아래서 가능하였다. 그런데 몇 년 전에 재심재판 과정에서 상부의 지침을 거부하고 피고인에게 무죄를 구형했던 임은정 검사에게 그 구형과 관련하여 모종의 불이익한 조치를 취하겠다는 소문이 인터넷에 무성하다. 그 많은 인권침해사건에서 인권친화적인 재심 매뉴얼조차 마련하지 않고 권위로 일관한 검찰은 도대체 자신의 역사적 과오를 반성하기는 하는 걸까! 검찰제도를 민주화하기 위해 권역별로 지역자치제나 공선제를 도입하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전쟁범죄나 인도에 반한 죄를 저지른 자를 한번 낚아 올리게.


이재승 위원은 현재 건국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로 재직 중입니다.

<2015-12-09> 인권연대

☞칼럼원문: 집념의 검사 프리츠 바우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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