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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금융-민족자본 맞선 곳…거대은행 격전지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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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세운 조선저축, 민족계 한성은행…세월 흘러 신한·우리·SC 품으로


서울 중구 2호선 을지로입구역 일대는 한국은행을 중심으로 여러 은행들이 위치해 한국 금융의 심장부로 불린다. 중앙은행 주변으로 시중은행의 본점 등이 위치하면서 거대 규모에 걸 맞는 높은 부동산 가치를 자랑한다. 이곳에는 일제 강점기 당시 조선은행, 조선식산은행, 동양척식주식회사 등 금융 착취 기관이 있었다. 또 조선저축은행, 조선신탁주식회사, 한성은행, 대한천일은행도 이 일대에 위치했다. 이 은행들은 현대사를 거치면서 상장폐지, 흡수합병을 반복한 이후 과거와는 완전히 다른 현대적 은행으로 변신했다. 조선저축은행과 조선신탁은 일제가 설립했다. 조선저축은행은 수차례 인수합병을 거친 후 현대에 이르러 영국스탠다드차타드(SC)은행이 주인이 됐다. 조선신탁 역시 여러 변화를 겪은 후 지금에 와서 우리은행이 됐다. 민족자본으로 설립된 한성은행과 대한천일은행 역시 변화를 거친 다음 현대에 와서 각각 신한은행, 우리은행에 흡수됐다. 은행들은 일제에 의해 조선금융 수탈에 동원되거나 친일파가 은행을 좌지우지하는 비운을 겪기도 했다. 과거 일제가 설립한 은행들은 현재는 일제와 관련성이 거의 없다. 남대문로 일대에는 일제 강점기부터 현재까지 한국 금융사의 한 획을 그은 은행들이 있다. 스카이데일리가 ‘역사 속 남대문로 빌딩들’ 하편으로 SC은행, 우리은행, 신한은행 건물을 취재했다. 편집자주




▲ 스탠다드차타드은행의 전신 제일은행이 있던 건물(사진)은 1933∼1935년 지어진 근대건축물로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 71호로 지정됐다. 제일은행은 영국스탠다드차타드은행에 매각돼 현재는 외국계은행이다. 해당 건물은 지난해 신세계가 약 850억원에 사들였다. ⓒ스카이데일리


일제가 세운 은행들…조선 금융수탈 동원, 친일파가 행장 맡기도


한국은행과 마주하고 있는 SC은행 자리는 조선저축은행 자리다. 조선저축은행은 한국저축은행→제일은행→한국SC은행→SC은행으로 변천됐다.


조선저축은행은 1929년 일제의 저축은행령에 의해 설립됐다. 조선금융 착취를 담당하는 조선식산은행의 저축에 관한 예금 업무를 담당했다. 조선저축은행은 1950년 한국저축은행을 거쳐 1958년 제일은행으로 변경됐다.


한 때 제일은행의 행장은 친일파의 후손이 맡은 적이 있었다. 친일인명사전에 따르면 명성황후의 조카인 민영휘는 친일파다. 그의 손자 민병도가 광복 이후 제일은행장을 역임한 적 있었다.


민병도는 1965년 강원도 춘천시의 남이섬을 매입해 경춘관광개발주식회사를 설립하면서 법인화시켰다. 금감원 공시에 따르면 지난해 기준 주식회사 남이섬의 주식 약 48% 가량이 민씨 일가 소유다.


제일은행은 2000년 지분 50.99%와 경영권을 미국 투자회사 ‘뉴브리지캐피탈’에 매각했고, 2005년 4월 영국SC은행이 제일은행의 지분 100%를 인수하면서 외국계은행으로 변신했다.


SC은행 건물은 근대건축물로서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 71호로 지정됐다. 한국 전쟁 때 피해가 없어 반세기 넘게 기존 모습을 유지해 국내 금융사의 역사적 건물로 평가받고 있다.


등기부등본에 따르면 조선저축은행은 1931년 2월 토지를 매입했다. 부동산은 은행이 영국계 은행에 넘어가며 소유자도 변경됐다. 하지만 지난해 8월 주식회사 신세계가 토지와 건물을 850억원에 매입해 현재는 신세계그룹 소유다. 바로 옆 건물이 신세계백화점 본관이다. 은행 건물은 대지면적 2157.4㎡(약 653평), 연면적 8333㎡(약 2521평), 지상 5층 규모다.


▲ 소공동 롯데 에비뉴엘(사진) 자리에 위치했던 구 한일은행은 1932년 조선신탁주식회사로 시작했다. 조선신탁은 조선신탁은행, 한국신탁은행, 한국흥업은행을 거쳐 한일은행 상호로 변경했다. 금융권 구조조정 추진으로 1999년 한일은행이 상업은행과 합병해 한빛은행이 됐으나 2002년 우리은행에 편입됐다. ⓒ스카이데일리


소공동 롯데백화점 옆 명품관 롯데 에비뉴엘은 구 한일은행이 있던 자리다. 인기리에 종영된 TVN 드라마 ‘응답하라 1988’에서 주인공 덕선의 아버지 성동일도 한일은행에 다녔다.


한일은행은 1932년 일제가 설립한 조선신탁주식회사로 시작했다. 조선 금융 수탈의 원흉이던 조선은행과 조선식산은행이 각각 약 30% 정도 출자해 만들었다. 역사학계에 따르면 이 신탁회사는 일제가 세운 다른 금융회사처럼 일본의 자본을 증식시키기 위해 동원됐다.


조선신탁은 이후 조선신탁은행→한국신탁은행→한국흥업은행을 거쳤다. 1960년 정부지분을 민간에 불하하면서 한일은행으로 상호를 변경했다. 공립은행에서 상업은행으로 변신한 것이다.


1997년 IMF 외환위기 당시 기업여신 규모가 컸던 한일은행은 자금난을 겪던 주요 기업들이 쓰러지면서 함께 무너졌다. 정부의 금융권 구조조정 추진으로 1999년 상업은행과 합병해 한빛은행이 됐고 이후 2002년 우리은행에 편입됐다.


등기부등본에 따르면 2002년 롯데쇼핑이 토지 및 건물을 매입했다. 에비뉴엘은 대지면적 4353.1㎡(약 1317평), 연면적 4만3189.59㎡(약 1만3065평), 지상 20층 규모다. 롯데쇼핑은 기존 한일은행 건물을 리모델링해 현재 에비뉴엘로 사용중이다.


시작은 민족계 근대은행…경제 수호 위해 맞섰으나 일제 치하 가시밭길


▲ 신한은행(사진)에 합병된 조흥은행은 1897년 민족계 근대적 은행인 한성은행으로 시작했다. 1903년 일제자본으로 공립은행이 된 데 이어 은행 대주주 자리를 친일파가 차지하자 비난의 대상이 됐다. 공립은행 개편 이후 은행장이 된 대한제국 황족 이재완은 경의선 철도 부설권을 일본에 넘겨주고 대한철도회사 사장직을 차지했던 친일파다. ⓒ스카이데일리


남대문로1가에 위치한 신한은행 광교빌딩은 옛 조흥은행 본점이 자리하던 곳이다. 19세말 설립된 조흥은행은 지난 1995년 한국기네스협회의실사 결과, 국내 최초 은행으로 인정돼 대한민국에서 가장 오래된 은행으로 기네스북에도 등재됐다.


조흥은행은 1897년 한성은행으로 시작했다. 한성은행→동일은행→조흥은행→신한은행의 역사를 가졌다. 김종한, 이보응 등이 민간 민족자본으로 설립한 한성은행은 민간인에 대한 금융 업무를 담당했으나 영업부진을 겪으며 휴업했다. 한성은행이 위기를 맞자 1903년 고종의 종형 이재완이 고종을 설득해 공립은행으로 전환됐다.


민족문제연구소에 따르면 한성은행장인 이재완은 친일 매국노다. 이재완은 1903년 경의선 철도 부설권을 일본에 넘겨주고 대한철도회사 사장직을 차지했다. 친일 행위로 부를 축적한 그는 2년 후 한성은행 행장에 올라서고 일본의 국내 금융시장 장악에 도움을 준 것으로 알려졌다.


이재완은 1910년 한일병합 조약 체결 후 일왕으로부터 작위와 포상금 33만6000원, 현재 가치로 약 33억원의 대가를 받았다. 이 돈을 한성은행에 투자해 이자 수익을 얻는 등 당시 조선총독부 총독 사이토 마코토의 감탄을 자아낼 만큼 친일 행위로 이득을 톡톡히 챙긴 매국노로 전해졌다.


한성은행의 부행장은 순종비 윤씨의 숙부인 김종한이었다. 민족문제연구소에 따르면 김종한 역시 친일파다. 김종한은 한성은행에 앞서 조선은행에도 참여하며 재산을 축적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이완용 계열에 가담해 친일단체 정우회 총재를 맡기도 했다.


1919년 3·1운동 당시 은행장으로는 이완용의 형인 이윤용이 올라서고, 은행 대주주 자리를 대다수 친일파가 차지하자 한국인들로부터 강한 비난을 받았다.


역사학계에 따르면 일본계 자본을 끌어 한국인에 대출해주던 한성은행은 일본 및 오사카에 지사를 설립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한성은행은 1923년 도쿄 대지진으로 몰락했다. 이후 1943년 동일은행과 합병한 뒤 조흥은행으로 개칭해 영업을 이어왔고, 2006년 신한은행에 합병됐다.


한성은행은 1912년 현재의 신한은행 광교영업부 자리에 본점을 이전했고 조흥은행은 1960년대 해당 부동산을 매입했다. 등기부등본에 따르면 해당 건물은 토지면적(2필지) 5160.1㎡(약 1561평) 연면적 2만379.85㎡(약 6165평) 규모다. 지상 6층, 지상 13층 등 2개동으로 구성됐다.


▲ 우리은행은 대한제국 고급관료층인 심상훈, 민병석, 민영기, 이용익 등과 상업자본가층이 주도해 만들어진 최초 민족자본 은행인 대한천일은행이 전신이다. 대한제국 하늘 아래 첫째가는 은행이라는 뜻으로 고종 황제가 자금을 댄 것으로 알려졌다. 사진은 남대문로에 위치한 우리은행 종로금융센터. ⓒ스카이데일리


남대문로의 우리은행 종로금융센터는 1899년 설립된 민족계 근대은행인 대한천일은행이 있던 자리다.


은행명은 ‘하늘 아래 첫째가는 은행’이라는 뜻이다. 대한제국 고급관료층인 심상훈, 민병석, 민영기, 이용익 등과 상업자본가층이 설립을 주도했으며 고종 황제가 황실자금을 자본금으로 댔다. 일제 금융침탈에 맞서 국채보상운동을 벌이는 등 민족자본을 지키려했으나 일제의 방해로 수난의 길을 걷기도 했다.


1911년 조선상업은행으로 개칭해 광복 후 한국상업은행, 1999년 한빛은행을 거쳐 2002년 우리은행으로 상호변경됐다. 등기부등본에 따르면 은행은 1924년 해당 부동산을 소유했다. 우리은행 건물은 대지면적 2049.3㎥(약 620평), 연면적 1527.57㎥(약 462평), 지상 2층 규모다.


배준형 리얼티코리아 빌딩사업부수석팀장은 “주요 시중은행이 자리한 남대문로 일대는 3.3㎡(약 1평)당 시세는 2억∼4억원으로 위치마다 차이가 있다”며 “각 시세는 SC은행의 경우 2억원, 신한은행·우리은행의 경우 3억원, 롯데에비뉴엘의 경우 4억원”으로 추정했다.


또 그는 “강남은 과거 개발로 인해 바둑판식으로 가격이 균등한 것과 달리 이 지역은 몇몇 필지를 한 덩어리로 묶어 가격을 측정한다”며 “평당 최고 4억원 이상 차이가 나기도 한다”고 덧붙였다.


배 팀장에 따르면 연면적 4000평 이상의 경우 연면적 기준으로 빌딩 가치를 계산하는데, 중구 남대문로 일대의 경우 대로변 1900만∼2200만원이다.


건물 연면적 4000평 이상인 신한은행·롯데에비뉴엘 건물의 경우 각각 약 1356억원, 약 2874억원으로 추산됐다. 대지면적 기준으로 계산한 SC은행과 우리은행은 각각 약 1306억원, 약 1860억원으로 추정됐다.


김인희기자(ihkim@skyedaily.com

<2016-01-29> 스카이데일리

☞기사원문: 일제금융-민족자본 맞선 곳…거대은행 격전지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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