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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펀딩] 1화 논매기 하다가 끌려간 우리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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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널리즘] 아버지, 어디에 잠들어 계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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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 유해발굴 공동조사단은 국가폭력에 의해 억울하게 죽어간 희생자들의 유해를 발굴하여 민간인학살의 진실을 규명하기 위한 활동을 벌이고 있습니다. 2014년 진주, 2015년 대전에서 시민들의 뜻과 힘을 모아 학살 희생자들의 유해를 발굴하였습니다. 


‘빨갱이 가족’이라는 오명을 쓰고 살아온 유족들, 아직까지 묻혀 있는 희생자들의 유해, 발굴작업에 나선 시민들, 발굴진행 보고를 통해 민간인학살 희생자들의 삶과 이야기를 전하고자 합니다.


Funding plan


오는 2월 24일(수)부터 29일(월)일까지 충남 홍성군 광천읍 담산리에서 제3차 유해발굴이 진행될 예정입니다. 여러분들께서 모아주시는 소중한 후원금은 희생자 유해발굴작업에 필요한 비용과 결과보고서 발간비용으로 쓰겠습니다.


Details


“여기 억울한

주검들이 있습니다


어떤 이는 좀 더 나은 세상을 만들겠다는 신념 때문에, 어떤 이는 단지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어떤 아낙네는 빨치산에게 밥을 줬다는 이유만으로, 또 어떤 어린애는 영문조차 알지 못한 채 죽은 주검들입니다.


전쟁이라는 비상상황이기 때문에 이들의 죽음은 어쩔 수 없었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건 옳지 못합니다. 아무리 큰 죄를 지은 사람이라 하더라도 국가가 적법한 절차 없이 함부로 사람을 죽일 수 없습니다. 한국전쟁 당시 사라져간 수많은 민간인들의 죽음은 전투로 인한 것이 아니라 국가가 스스로 법을 무시하며 저지른 학살 때문에 일어난 일입니다.


한국전쟁이 끝나고 60여년이 지난 2005년 과거청산을 위한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가 설립되어 민간인 희생자에 대한 유해발굴이 시작되었습니다. 이후 3년간의 사업을 통해 1,617구의 유해와 5,600여점의 유품을 발굴하고, 충북대학교에 임시 안장했습니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뒤 진상규명위원회는 밝혀야 할 규모의 10%도 해결하지 못한 채 문을 닫아야만 했으며, 유해발굴 사업 또한 중지되었습니다.

“세 번째 발굴을

하려 합니다
 


한국전쟁 당시 희생된 유해들이 아직도 전국 곳곳에 방치되고 있지만 국가는 피해자와 유족들에게 마땅히 지켜야할 국가적 책무인 법적·정치적 책임은 고사하고 최소한의 윤리적 책임조차 지지 않고 있습니다.


그래서 민간차원에서라도 먼저 아픈 역사의 진실을 밝히고 그 상처를 치유하는 일에 나서기로 했습니다.


2014년 2월 18일 뜻을 함께 하는 시민단체와 연구자, 시민들이 ‘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 유해발굴 공동조사단’을 결성하여 민간모금과 자원봉사로 유해발굴 사업을 시작하기로 했습니다.


2014년 진주 명석면과 2015년 대전 골령골 유해발굴에 이어 올해는 2월 24일부터 29일까지 충북 홍성군 광천읍 담산리 산 92번지에서 세 번째 발굴을 하려 합니다.


국가범죄로 인해 억울하게 희생된 분들의 유해를 수습하여 적절한 장소에 안치하는 일은 희생자와 그 유족의 한을 조금이나마 풀기위한 조치입니다. 또한 살아있는 사람들이 죽은 이에게 가져야할 최소한의 윤리적 책무일 것입니다. 많은 분들께서 함께 하시기를 기다리겠습니다.

[스토리펀딩] 1화 논매기 하다가 끌려간 우리 아버지


아버지 유해 찾아 삼만리.. 돼지 사체 더미 아래에


“15년 전 대전에서

그를 처음 만났습니다


아버지 유해를 찾으러 왔다고 했습니다. 이후 그는 짬이 날 때마다 충남 홍성에서 한달음에 달려왔습니다. 아니 미국에서부터 달음질해서 왔습니다. 그때 그는 미국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초여름. 그와 대전에 있는 산내 골령골 야산을 헤집고 다녔습니다.


l “금광이라고 했어요. 금광..이 근처에 금광 구덩이처럼 생긴 곳이 있나요?”


땀을 비 오듯 쏟으며 이 골짜기 저 골짜기를 오르내렸습니다. 훌쩍 한나절이 지났지만, 딱히 폐금광 구덩이로 볼만한 곳은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가 털썩 주저앉으며 말했습니다.


l “나중이라도 금광 구덩이 같은 게 있으면 꼭 연락해 주세요.”


이종민 씨(69). 그의 아버지 ‘이강세’는 그가 세 살 때인 1950년 사망했습니다. 마음이 흐려지지 않는다는 불혹의 나이를 막 넘긴 42살 이었습니다. 처와 5녀 1남의 자식까지 7명을 부양해야 하는 가장이었습니다.


“그런 그를 저승길로

끌고 간 사람들은

경찰과 군인이었습니다



▲ 이종민 씨 부친 이강세(왼쪽 위)가 1944년(당시 36) 가족들과 찍은 사진. 품에 안긴 갓난아이가 다섯 번째 딸이고 오른쪽 옆이 그의 부인과 형제들이다. 아래 오른쪽부터 어머니 홍씨와 네 명의 딸이다.

논매기하다 끌려간 아버지는..?


6.25 전쟁이 터진 직후였습니다. 인민군이 서울을 향해 남하하고 있었지만, 홍성은 여느 때처럼 조용했습니다. 이강세는 아침 일찍 홍성 월산리 마을 앞에서 논매기(논의 김을 매는 일)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때였습니다.

경찰 여러 명이 다가왔습니다. 김을 매고 있던 그를 끌고 갔습니다.

“보도연맹원에 대한

예비검속이었습니다

보도연맹은 1949년 6월, 좌익계 인물들을 전향시켜 보호한다는 취지로 조직됐습니다. ‘북한 정권 반대’와 ‘공산주의 배격’이 이 단체의 주요 강령이었습니다. 농민조합 일을 했던 이강세도 보도연맹에 가입했습니다.

정부는 보도연맹에 가입하면 과거를 묻지 않고 신변 보호는 물론 취업 알선 등 각종 혜택도 약속했습니다. 홍성에서만 1천여 명이 가입했습니다. 하지만 이승만 정부는 6.25 전쟁이 터지자 제일 먼저 ‘보도연맹원을 잡아 가두라’고 지시했습니다.

인민군에 동조할 우려가 있다는 게 그 이유였습니다.


l “바로 저 자리예요. 전봇대가 서 있는..”

이 씨가 아버지가 잡혀 끌려간 그 논바닥을 가리켰습니다. 진흙 묻은 바짓단을 무릎 위까지 추켜올리고 의아한 눈초리로 경찰을 마주했을 이강세의 모습이 그려졌습니다.

경찰은 이강세 등 예비 검속한 보도연맹원 100여 명을 보도연맹사무실이 있던 홍성경찰서 상무관으로 끌고 갔습니다. 서울에서 특무대가 내려왔습니다. 이들은 예비검속자 중 요시찰로 자체 분류한 20~30명을 트럭에 싣고 사라졌습니다. 이 속에 이강세도 포함돼 있었습니다.

경찰은 이날 새벽 나머지 80여 명을 홍북면 상하리와 신경리 사이 용봉산 골짜기로 끌고 가 총살했습니다. 앞서 특무대가 끌고 간 이강세를 포함 ‘요시찰로 지목된 20~30명’은 어디로 간 것일까?

l “당시 경찰이 대전형무소로 이송됐을 가능성이 크다고 하더군요. 다른 충남 시군에서도 대전형무소로 끌려간 사람들이 실제 있었구요. 또 아버지 일을 취재한 지역신문 기자가 ‘취재를 하다 폐광산으로 끌려갔다는 얘기를 얼핏 들었다’고 하더군요.”


▲ 이종민 씨의 부친 이강세(당시 42세)가 논매기를 하다 경찰에 끌려간(전봇대 부근) 홍성 월산리 마을 앞에 있는 논

미국에서 대전으로..다시 홍성 광천 담산리까지


이씨가 홍성이 아닌 대전 산내 골령골로 십 수 년 동안 아버지 유해를 찾으러 다닌 이유이기도 했습니다. 대전 산내 골령골은 대전형무소에 갇혀 있던 보도연맹원과 정치범들이 집단 학살된 곳입니다.

하지만 이씨는 근래 아버지가 희생된 곳이 대전이 아닌 홍성이라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광천 담산리 폐광산’으로 세부 장소까지 콕 찍었습니다.

l “셋째 누님의 매형(셋째 누이 남편) 친구가 있는데 1950년 당시 홍성경찰서 형사계에 근무하고 있었대요. 이 친구분이 매형에게 ‘네 장인은 광천에서 돌아가셨다’고 했다는 거예요. 이 얘기를 매형이 누나에게 한 거죠, 아이구.. 누이가 이 얘기를 처음 들은 게 1960년대 중반쯤이라고 하더라고요. 근데 누이가 이 얘기를 몇 달 전에서야 하는 겁니다. 휴우..”

홍성군 광천면에서 당시 집단학살지로 추정되는 곳은 담산리가 유일합니다. 담산리 학살지는 폐금광 구덩이입니다. 이곳에서는 같은 해 10월에도 민간인 수십여 명이 경찰에 의해 희생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씨의 가족들은 아버지를 여의고도 마음 놓고 통곡을 할 수 없었습니다. 대놓고 눈물을 흘릴 수도 없었습니다. 어디로 끌고 갔느냐고 물을 수도 없었습니다.

“‘빨갱이 가족’이라는

손가락질 때문이었습니다

아버지 이름을 거론하는 자체가 불온시 됐습니다.

마음 놓고 슬퍼할 수도 없었던.. 큰 누이까지 ‘형무소’로


당시 19살이던 이 씨의 큰 누이는 아버지가 처형당한 몇 달 뒤 경찰에 끌려갔습니다. 인민군에게 밥을 해 주는 등 부역을 한 혐의(특별조치령 위반)였습니다. 특별조치령은 한국현대사에서 만들어진 법령 중 가장 엄중한 법령으로 꼽힙니다. 검찰은 사형을 구형했습니다.

다행히 큰 누이는 인민군이 홍성을 점령했던 약 3개월 내내 대전으로 피난해 홍성에 없었던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그런데도 징역형이 선고됐습니다. 큰 누이는 수감 도중 감형을 받고서도 1957년에서야 출소했습니다.
이 씨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가족들이 겪었던 고생은 몇 달을 얘기해도 끝이 없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 씨는 철이 들자 한국을 떠날 궁리에 몰두했습니다.

l “아버지 일로 현실과 거리를 두려고 했어요. 그때 고등학교까지 졸업했지만, 면사무소 직원도 하기 어렵고.. 한국에서 아무런 희망을 찾을 수 없었어요.”

여러 차례 여권을 신청했지만 나오지 않았습니다. 당시 육군 대위로 있던 처남이 보증을 서는 등 처가의 도움으로 수년 만에 어렵게 여권을 발급받았습니다. 1974년(당시 27세), 갓 돌 지난 첫 아이를 데리고 미련 없이 미국으로 향했습니다.

l “낯선 땅에서 벌어먹어야 하니까 직장과 집을 오가는 것 외에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죠.”


▲ ‘홍성 광천면 담산리 폐광산’에서 부친을 잃은 유가족 이종민(왼쪽)씨와 최홍이(오른쪽)씨가 지난 해 11월, 유해매장여부 시굴조사에 앞서 절을 올리고 있다


▲ 지난 해 11월 ‘홍성 광천면 담산리 폐광산’ 유해매장여부 시굴조사에서 드러난 희생자의 뼈. 오는 2월 24일부터 본격 발굴이 시작된다


그가 목숨 걸고 살아가야 할 이유


미국에 정착해 수십 년을 살았지만, 마음 한쪽이 늘 텅 비어 있었습니다. ‘아버지’와 ‘이강세’라는 이름 석 자가 그의 가슴에 옹이처럼 박혀 한시도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는 아버지가 살던 고향으로 건너와 아버지가 마지막 끌려간 그 땅을 다시 일구고 있습니다.

l “제가 목숨을 걸고 살아가야 할 이유가 있어요. 아버지 혼이 찾아오면 저라도 맞아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미국에서 살면서 많은 차별을 겪었어요. 홍성 지역에 사는 어려운 다문화가정을 돕고 살려고 합니다.”

그 전에 해야 할 또 다른 소망이 있습니다. 수 십 년을 찾아 헤매던 아버지 유해를 수습하는 일입니다.

l “담산리 폐광산을 갔다가 깜짝 놀랐어요. 돼지 분뇨 냄새로 숨을 쉴 수가 없었죠. 지난해 유해매장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폐광산 입구 부근을 팠는데 돼지 사체가 나오더군요.


아.. 이런 곳에 아버님이, 희생자들이 묻혀 있었구나. 가슴이 미어지고 눈물 밖에 안 나오더군요. 유해가 수습되면 보도연맹원들이 함께 희생된 용봉산 추모비가 있는 부근에 합장하고 싶어요.”


▲ 유가족 이종민 씨(69). 그의 아버지는 1950년 6월, 군인과 경찰에 의해 ‘홍성 광천면 담산리 폐광산’에서 희생됐다


유가족 이종민 씨가 말하는 아버지 이강세는?
‘봄바람 단비’ 오기만을 기다렸지만..

성함은 ‘이’자 ‘강’자 ‘세’자예요. 1908년 홍동면 금당리에서 태어나셨어요.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셔서 유복자로 태어나셨죠. 금당리에 있는 큰아버지 밑에서 성장하셨어요.

어머니가 홍산읍 월산리로 개가하면서 홍성으로 이사해 홍성공립보통학교로 전학했어요. 학적부를 떼어보니 1927년(당시 19살) 졸업하셨더군요. 보통학교에 다닌 게 전부였어요. 어머니 사랑도 많이 못 받고..

일본에 대한 반항심이 컸었던 모양이에요. 홍성에 남산 공원에 신사가 있었다고 해요. 어느 날 새벽, 아버님이 신사에 침을 뱉고 오줌을 갈기고 발로 찼다고 해요. 그걸 홍성읍장에게 딱 들킨 거죠. 그 일로 도주해 일본으로 밀항했다고 하더군요. 일본에서 목공소 일도 하고 건설회사 일도 했다고 해요.

3~4년 있다가 홍성으로 돌아와 바로 결혼하고 농사를 지었어요. 큰 누이가 1931년생이니까 22~23살 되던 해 일본에서 건너온 것 같아요. 홍성에서 한때 종묘상회인 ‘풍농원’도 운영하셨어요. 화초, 과일 묘목과 종자를 판매했어요. 일본에서 배운 새로운 농사법을 이웃 사람에게 알려주거나 신품종을 보급하기도 했어요.

일제 말기에는 독립운동을 하는 ‘가야비밀동지회’에 가입해 활동했어요. 해방 직후에는 홍성군 농민조합장으로 선출돼 활동했어요. 친일파인 홍성군수를 응징하는 일을 주도하기도 했어요. 친일잔재를 청산하고 농업발전을 위해 헌신했어요. 홍성농민조합은 1946년 10월 항쟁 때도 정치투쟁을 벌였습니다. 이 일로 몇 년 동안 보령 오천면 원산도 앞바다에서 고깃배에 숨어 있었다고 해요. 피신 도중에 가끔 집에 숨어들어 가족들을 만나고 갔는데 그때 제가 태어난 겁니다.

그러다 1949년 자수해 보도연맹에 가입, 선전부장을 맡습니다. 오랜 도피생활을 끝낸 거죠. 이버지와 보도연맹원들이 경찰서 허가를 받아 돈을 추렴해 지금의 협동조합 성격의 막걸리 양조장을 만들기도 했어요. 양조장 이름이 ‘도수원(桃水園)’ 이었습니다.

아버지와 보도연맹원들이 다 끌려가 죽자 몇 년 뒤 ‘도수원’이 당시 경찰서장 명의로 바뀌었죠. 기가 막힐 일이었죠. 결국, 보도연맹원에 가입했다가 끌려가 집단 학살당하고 재산까지 빼앗긴 거죠. 42살 나이에요. 우리 어머니와 저를 포함 여섯 명의 자식을 남겨놓고요.

아버지가 보도연맹에 가입할 때 시 한 수를 지어 벽에 붙여놓았다는데 그 내용이 이렇습니다.

설한풍 눈보라에 하도만 시달려서
잎 다 진 무궁화 줄기마저 꺽이였다
봄바람 단비 오면 거름부터 주리라

‘봄바람 단비’가 오기만을 기다렸던 아버지에게 ‘단비’가 아닌 ‘죽음’이 먼저 찾아간 겁니다.

글 | 심규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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