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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녀의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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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녀의 탄생

이 숙 인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효녀의 이름으로 이야기 속에 등장한 이들은 주로 위기에 처한 어버이를 구해내는 캐릭터다. 바다로 간 심청이나 남장(男裝)하여 전쟁터로 나간 목란(木蘭)을 보아도 그렇다. 그 외에도 시집가기를 포기하고 부모 봉양에 일생을 바친 딸, 어머니의 입맛을 대느라 엄동설한의 대밭으로 죽순을 찾아 나선 딸, 아버지를 덮치려는 호랑이를 맨손으로 때려잡은 딸 등이 전통사회 효녀서사의 일반적인 패턴이다. 그러고 보면 효녀란 자기희생의 대가로 얻어진 이름이다.


부모가 원하는 것에 맞추려 하고 쇠약해진 부모를 돌보는 것은 보통의 자식들이 상식으로 여기는 바이다. 그것은 나와 가장 가까운 존재를 향한 사랑이자 나를 필요로 하는 대상에 대한 배려이다. 인간사회의 기본원리인 이것을 우리의 문화 전통에서는 ‘효’라는 덕목으로 권장해왔다. 효가 백행(百行)의 근본이라는 말은 부모를 통한 경험을 세상으로 확장시킬 때 정이 넘치는 사회가 될 것이라는 낙관에서 나온 것이다.


효의 우상화


그런데 내 부모를 내가 돌보는데, 동네에서 박수치고 나라에서 상을 주고 하는 것은 왜일까? 효성은 훌륭한 덕이지만 인정에 가깝지 않은 과도한 행위가 난무할 때는 의심해봐야 한다. 아니나 다를까 조선후기의 다산 정약용은 “왜 ‘효자’의 부모들은 한결같이 기필코 얼음 속의 잉어나 눈 속의 죽순만을 찾는단 말인가?”라며 우상화한 효행을 꼬집는다. 각자의 자리에서 진정한 효가 무엇인가를 묻고 실천하도록 돕기보다 효행의 깃발 아래 열을 세우는 따위의 일이 어디 그 시대만의 일이겠는가.


조선에서 국가가 공인하는 ‘효자’가 되려면 효행을 문서로 작성하되 결정권을 가진 자들을 감동시켜야 한다. 누구에게나 가능한 일은 격이 떨어지므로 ‘세상에 이런 일이!’ 급의 신이(神異)한 일들로 채워진다. 그런 이유로 얼음을 뚫고 나온 잉어나 꽁꽁 언 땅에서 솟아난 죽순은 ‘지성(至誠)으로 감천(感天)’한 효자녀의 전유물이 되었다. 누구를 탓하랴. 효행을 우상화한 국가와 거기에 놀아난 대중들의 ‘연합’이 빚어낸 작품인 것을.


유교적인 조선사회에서 효(孝)는 충(忠)과 짝을 이루면서 체제의 지원을 받았다. 어버이에 대한 순종을 확장해나가면 군주에 대한 복종이 된다는 논리이다. 그래서 효자의 집에서 충신난다는 말이 나온다. 이러한 맥락에서 군주 개인이든 국가든 내외적인 위기가 닥칠 때마다 효의 중요성이 강조되었다.


사라진 효녀들


부계의 존속을 중시하고 시집중심의 혼인문화가 확대되면서 효녀가 사라졌다. 유교적인 효 개념은 아들과 며느리 즉 효자와 효부를 위한 것이지 효녀를 원한 것은 아니다. 실제로 효녀가 없을 수 없지만 효자와 효부와는 달리 효녀 지원에 국가가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다는 말이다.


신사임당의 경우를 보자. 사임당의 성품을 특징짓는 도덕 개념 하나를 들라면 부모에 대한 효성이다. 율곡의 <어머니 행장>에 의하면 사임당은 어릴 때부터 효심이 각별했고, 혼인 후에도 홀로 계신 어머니를 보살피느라 친정에서 살았으며, 강릉을 떠날 때에는 이별의 아픔을 시로 남겼다. “늙으신 어머님을 고향에 두고 외로이 서울 길로 가는 이 마음”으로 시작되는 시가 그것이다. 서울 시집생활에서는 강릉의 어머니를 그리워하며 눈물로 밤을 지새우는 날이 많았다. 서인 노론계열 인사들은 없었던 이야기도 지어내어 사임당을 선양하는 판에 이 정도의 자료라면 효녀로 등극하기에 손색이 없건만, 그녀가 효녀였던 사실을 말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대신에 율곡선생의 훌륭한 어머니로 부각되었다.


돌아온 효녀


긴 잠을 자던 효녀가 깨어난 것은 19세기 말 근대적 가치가 유입되면서 부터이다. 개항기의 여성교훈서들은 기존에 없던 ‘효녀편’을 따로 마련하여 역대 효녀들을 불러 모았다. 여자수신서들은 제영·지은·목란 등의 역사 속 효녀들이 수행한 사회적 행위를 칭송하는데, 프랑스 여자 잔다르크도 ‘약안’이라는 이름의 효녀로 소환되었다. 근 5백 년 만의 귀환이라고나 할까. 고려 지식인 이곡(李穀, 1298~1351)에 의하면 고려사회에서 부모 봉양은 딸의 몫이었다.


고려의 풍속에서 아들은 본가를 떠나 살고 딸은 본가에 그대로 산다. 따라서 부모를 부양하는 것은 딸의 임무로 되어 있다. 그러므로 딸을 낳으면 애지중지하며 키워서 그가 장성하기를 바라니, 그것은 딸이 부모를 부양해 주기 때문이다. (『고려사·이곡열전』)


효녀를 권하는 사회는 봉양의 의무를 지울 만큼 딸의 위상이 높아졌음을 의미한다. 의무에는 그에 상응하는 권리가 따른다고 볼 때 효녀의 등장은 딸의 지위가 변했다는 징표가 될 수 있다.


최근에는 자칭 효녀라고 하는 20대 여성들이 거리로 나왔다. ‘효녀연합’이라는 이름의 그녀들은 ‘어버이연합’ ‘엄마부대’와 마주하면서 나온 이름일 터이다. ‘효녀’와 ‘어버이’의 대결은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한 한일 양국 간 합의에서 비롯된 것인데, 여기서 아주 오래된 개념 ‘효녀’가 새롭게 정의된다. “부모 말을 무조건 따르는 게 효녀가 아니다. 이웃의 고통을 외면하거나 양심을 거스르는 행동을 하는 부모에게 충고를 해줘야 효녀다.”


조롱과 혐오의 대상이던 ‘어버이연합’에 대해 그 ‘어버이들의 역사적 상처를 이해하고, 그분들을 이용하는 세력을 경계하자’는 ‘효녀연합’의 발언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이들이 자극제가 되어 지난 1월에 있었던 대만의 총통 선거를 떠올렸다. 그곳의 정권교체가 가능했던 것은 81년 이후에 태어난 ‘딸기세대’가 몰표를 던졌기 때문이라고 한다. 사회에 무관심하고 자기만족만을 추구하며 딸기처럼 나약하고 쉽게 상처받는다는 비하의 뜻으로 붙여진 세대. 그 딸기가 거대 자본가의 이익만을 챙겨줄 뿐인 집권당의 경제 정책에 불만을 품으며 자신들의 경제적인 정치적인 요구를 하기 시작한 것이다. 효녀의 이미지 변신도 딸기만큼이나 전복적이다.


생물학적 어버이에 대한 사랑과 배려가 기존의 효라면 ‘효녀연합’의 효는 사회적 어버이로서의 양심과 책임을 환기시키는 역할을 자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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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2-06> 다산연구소

☞칼럼원문: 효녀의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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