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일절을 앞두고 경향 각지에서 많은 시민사회단체들이 연대하여 ‘삼일 항쟁’의 얼을 바르게 되살리기 위한 논의가 진행되고 있다. 이런 가운데 지난 어느날 <한겨레>의 ‘아침햇발’ 칼럼 ‘아직, 친일파의 나라’를 읽던 중에 문득 식민사관의 문제가 떠올랐다. 일제 패망 70년이 지났건만 아직도 “친일파의 나라”라는 표현에 찬사가 앞서는 오늘의 역사 사실이 서글프다.
그 칼럼에서는 현직 대통령과 그 여당 대표도 부친의 친일 전력을 부끄럽게 생각하고 있지 않은 것을 지적했다. 그러다 보니 <친일인명사전> 보급에 정부가 훼방을 놓고 있는 이런 나라 꼴이 되었고, 일제 군 위안부 문제에 대한 “불가역적 해결” 같은 굴욕적 합의가 나온다고 탄식한다. 나는 이 한심한 사실들이 기본적으로 식민사관이 역사교육의 바탕이 되고 있는 데서 출발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식민사관의 문제야 역사교육에만 한정된 일은 아니다. 정치, 경제, 문화 등 전반에 깔려 있는 현상이지만, 삼일절이 다가오기에 나는 이 삼일운동론의 식민사관 문제만을 제기해본다. 문제제기의 핵심은 기미(1919년) 민족항쟁을 ‘삼일운동’으로 표기하는 것이 식민사관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기미년 3월1일 서울 파고다공원에서 조선독립만세를 시작으로 울려퍼진 항쟁의 기세는 장엄했다. 기록에 따르면, 3월1일에 시작한 반제 항일 민족항쟁은 4월말까지 이어졌다. 항쟁은 전국으로 확대되어 연 1500회의 시위 항쟁에 참가한 인원은 200만에 이르렀고, 사망자만도 7509명이었다. 부상자가 1만6000명에다, 피검자도 4만6900명이었다. 조선 독립을 위한 싸움에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는 우리 겨레의 얼이 묻어 있는 증좌다. 그 항쟁 속에서 침략 억압의 첨병인 경찰 헌병관서의 습격이 159회, 일반관서 습격이 120회, 일본관헌 사망자도 166명이었다.
그야말로 피나는 투쟁이었다. 동학농민항쟁을 능가하는 대항쟁이었다. 이를 ‘삼일운동’ 정도로 표기하는 것이 가당키나 한가. 이것이 바로 식민사관의 산물이 아니고 무엇인가. 1919년 이후 1945년 8월15일까지의 26년 동안은 식민통치 기간이라 그렇다 쳐도 일제 패망 후 70년이 지나는 동안에도 삼일운동 표기가 문제로 제기되지 못했다는 사실은 이 나라가 얼마나 식민사관에 물들어 있는지를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우리 사학계는 무엇을 하고 있었다는 말인가? 이선근, 이병도 교수 등 우리 사학의 대가들이 이끌어온 학풍이 “아직도 친일파의 나라”에서 행세하는 대가답게, 그 맹렬했던 항쟁의 기세가 민족자주에로 승화되지 못하도록 음으로 양으로 기여해왔던 것은 사실이다. 장엄한 민족항쟁을 ‘운동’으로 폄하하지 않는 후학은 주류에 들지 못했다.
일본제국주의의 억압과 착취에 우리 민족이 저항했던 이 자랑스러운 역사, 세계사에 내어놓아도 자랑스러운 이 항쟁의 역사를 스스로 폄하하는 이 부끄러운 역사를 이제 여기서 끝내자. 그러기 위해서 우리 학계가 긴 동면에서 깨어나, 우리의 자랑스러운 기미 민족항쟁의 역사를 바르게 쓰기 위한 공론의 장을 열 것을 정중히 제안한다.
배다지/ 민족광장 상임의장
<2016-02-24> 한겨레
☞기사원문: [왜냐면] 삼일운동이 아니라 삼일항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