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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지금은 ‘3·1혁명’ 정명을 찾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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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명을 회복하지 못한 채 ‘운동’으로 폄하되고 있는 3·1 혁명 97주년을 맞는다. 해방 이후 해마다 3·1절 행사가 있었지만 오늘처럼 3·1 정신이 훼손된 적은 일찍이 없었다. 민족정기와 사회정의가 사라졌다.

우리는 지금 안보·민주주의·경제의 3중 복합위기 속에서 민족사의 구심체인 3·1 정신이 실종되거나 변질되는 미증유의 몰역사적 시대를 겪고 있다. 무모한 북한의 핵실험과 로켓 발사를 계기로 한반도에 전운이 짙어지고 이를 빌미로 한·미·일 동맹 강화와 더불어 남쪽의 억압구조는 날을 세운다.

국치 9년 만에 온 국민이 궐기하여 맨주먹으로 일제의 총칼에 맞섰던 3·1 혁명은 동학농민전쟁 이래의 모든 민족운동이 결집하고, 이후 민족해방투쟁의 발원지가 되었다. 3·1 혁명은 △자주독립 △민주공화 △신분해방 △비폭력 △국제평화라는 가치를 내걸고 싸운 근대적 시민혁명이었다. 일제의 무자비한 폭력으로 좌절되기는 했지만, 피어린 과정을 거쳐 임시정부를 비롯한 각급 독립운동단체로 이어졌고 마침내 대한민국정부 수립으로 귀결되었다.


제헌헌법 초안의 ‘3·1 혁명’이 이승만과 친일파들의 농간으로 일본 신문이 사용하던 ‘운동’으로 격하당하면서도 그래도 헌법 전문에 명시될 만큼 3·1 정신은 국가의 정신적 원류가 되었다. 한민족의 정맥이다. 지금 한국 사회는 친일파 자손들이 정치권력, 사법부, 언론계, 재계의 핵심이 되어 거대한 카르텔을 이루고 지배권을 행사한다. 이들은 선대의 반민족 대가로 금수저를 물고 태어나 손쉽게 가업을 잇고 세력을 형성하면서 갑질을 계속한다. 이승만이 반민특위를 해체하고 친일파들의 기득권을 보장해준 결과가 우리 사회를 친일파 후손들의 전성기로 만들었다.

이들은 선대의 죄업을 반성하기는커녕 각종 선양사업을 하고 민족민주 인사들을 종북으로 몰아 남북 대결을 부추긴다. 막강한 언론매체를 통해 실정한 권력자를 비호하고 야당·노동자들을 적대하고 심지어 〈친일인명사전〉의 학교 도서관 비치까지 방해한다. 민족자주보다 사대종속, 화해협력 대신 적대궤멸, 민주공화보다 독재독점, 정론직필 아닌 어용곡필을 일삼는다. 여기에 야당 일각에 유신시대 ‘중도통합론자’까지 등장했다.

전시작전권은 ‘무기한 연기’, 교과서는 ‘국정화’, 위안부는 ‘불가역적’, 사드(THAAD)는 ‘묻지마 배치’, 국정원 국민사찰 강화는 ‘테러방지법’ 등 도저히 민주공화제 주권국가에서는 등치될 수 없는 일들을 국가권력의 이름으로 감행한다. 반민특위를 해체하고 친일파 기득권을 지켜준 이승만은 ‘건국의 아버지’, 민주헌정을 뒤엎은 일본군 장교 출신 박정희는 ‘부국의 아버지’로 칭송되는 왜곡된 현대사가, 3·1 혁명 100주년을 앞두고도 진행형이다. 이를 비판하면 ‘부정사관’이라 매도한다.


97년 전 선열들은 차디찬 3월의 거리와 시골장터에서, 삼천리 방방곡곡 남녀노소, 신분, 종교, 재산 상관없이 하나 되어 ‘일제 타도!’ ‘친일파 타도!’를 외치며 싸웠다. 박은식의 <한국통사>를 보면 7509명이 죽고, 그보다 많은 사람이 부상당했으며, 피검자도 5만명 가까이 된다. 불탄 교회, 학교, 민가도 수없이 많았다. 그래도 겁먹지 않았고 두려워하지 않았다.

세계혁명사에 빗대 손색이 없었고 총칼에 맞서면서도 비폭력을 내세워 한민족의 우수한 정신문화를 내보였다. 일회성·단발성이 아니었고 한민족이 거주하는 세계 곳곳에서 일제 패망 때까지 계속되었다. ‘3·1 혁명’이라는 정명은 당위다. 3·1 혁명 정신을 배반한 세력이 박제화시킨 ‘3·1 정신’을 국민이 되살려야 한다. 왕조와 매국노들이 일제에 진상했던 국권을 민초들이 회복하고자 나섰듯이 말이다.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

<2016-02-29> 한겨레

☞기사원문: [시론] 지금은 ‘3·1혁명’ 정명을 찾을 때 / 김삼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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