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1871년 11월 5일, 일본 고치현에서 한 남자 아이가 태어났다. 그 아이의 이름은 ‘고토쿠 덴지로’, 훗날 ‘고토쿠 슈스이’라 불린 사람이다. 어릴 때부터 그는 인근 지역에서 천재로 소문이 났었다. 불과 8살에 대학생들도 짓기 어려운 한시를 썼다고 한다.
고토쿠는 22살에 기자가 된 후로 다양한 활동을 하면서 진보적 지식인으로서 이름을 조금씩 알려나갔다. 젊은 시절엔 많은 초기 근대 일본 지식인들이 그랬듯이 아시아 민족의 근대화와 발전을 위해 일본이 역할을 다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청일전쟁을 겪으면서 다른 서구 열강들의 침략행위와 일본의 행동이 무엇이 다른지에 대해 의문을 품기 시작했다.
결국 그는 일본도 제국주의 열강일 뿐이며, 일본이 하는 행동은 아시아 민족의 근대화와 해방을 위한 것이 아니라 침략이며, 이 침략은 식민지 확대와 새로운 시장을 확보해 자본가들의 이익을 극대화 시켜주는 수단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지금으로 볼 땐 당연한 얘기지만 당시 동아시아에서 이렇게 생각하는 지식인은 내가 아는 범위 내에서는 그가 최초다. 1901년 그는 동지들과 함께 일본 사회민주당을 창당하였고, 처음으로 공산당 선언을 일본어로 번역했다. 이외에도 서양 사회주의·무정부주의 서적을 다수 번역했다.
그는 진보성향인 <평민신문>을 창간한 후 러일전쟁 반대운동을 펼쳤다. 러일전쟁 기간에 그는 “필리핀인·베트남인·조선인 중에 역시 기개 있고 학식 있는 혁명가가 적지 않다.”며 동아시아 혁명계급이 연대해 제국주의에 대항하자는 논리를 펼쳤다. 1905년 11월 체결된 을사늑약에도 반대했다고 전해진다.
1905~6년 잠시 투옥되었고, 출옥 이후 미국에 다녀왔다. 미국에 다녀온 후 그는 더욱 급진적인 무정부주의 노선을 드러냈다. 1907년 일본이 대한제국 군대를 해산하고 사실상 한반도를 점령하려 하자 그는 동지들과 함께 성명서를 발표한다.
우리들은 조선인민의 자유, 독립, 자치의 권리를 존중하며 이에 대한 제국주의적 정책은 세계평민계급의 공동이익에 반하는 것으로 인식한다. 따라서 일본정부는 조선의 독립을 당연히 보증해야 하고 그 언행과 책무에 충실하기 바란다.
1907년 8월 1일. 평민신문 <대한결의>
비록 온건한 투의 결의문이지만 조선을 식민지화 하는 것이 당연시 되던 시기엔 용기 있는 지적이었다.
그는 중국, 인도, 베트남, 필리핀, 버마, 말레이, 조선 등 각지에서 몰려온 혁명가들을 모아 ‘아주친화회’를 결성했다. 당시 아시아 혁명가들에게 일본은 피신의 장소이자, 근대화를 이룬 동경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고토쿠는 일본 제국주의의 민낯을 보여줌으로써 그들이 현실을 직시하게 했다.
1909년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자 그는 안중근을 칭송하는 시를 썼다.
삶을 버려 의를 취하고 목숨을 바쳐 인을 이룬다
안중근의 거사에 천지가 진동하네
그는 안중근을 ‘의사’라고 칭했고, 그를 칭송하는 시를 품에 가지고 다녔다. 안중근 기념엽서를 만들어 배포하려고도 했다. 반면 당시 대한제국에서는 안중근 의거가 일어난 직후 안중근을 ‘정신병자’, ‘미친 사람’으로 취급하고 전국에서 유지들을 뽑아 일본에 ‘사죄단’을 보냈다.
그의 이러한 활동은 일본 당국에게는 눈엣가시였다. 1910년 5월 일본에서는 일왕 암살 음모 사건, 소위 ‘대역사건’이 일어났다. 그는 이 사건의 주모자로 체포됐다. 증거는 없었지만 ‘심증’만으로 그는 일왕을 죽이려 한 사람이 됐고, 1911년 1월 12일 사형을 선고받은 뒤, 불과 12일 후인 1911년 1월 24일 40세의 나이로 처형됐다.
‘반역자’로 몰린 그는 죽은 이후에도 처참했다. 그의 무덤은 일반인들은 물론 가족들조차 성묘하지 못했다. 심지어 ‘그의 무덤 방향으로 쳐다보지도 말라’는 당국의 압력이 가해졌다. 가족들은 고향을 떠나 온갖 고생을 하며 살아야 했다.
그러나 그가 뿌린 씨앗은 일본 지식인 뿐 아니라 당시 일본 유학을 하던 조선 지식인들에게까지 큰 영향을 미쳤다. 1910년대 고토쿠의 영향을 받은 재일 유학생들은 김철수를 중심으로 신아동맹당을 결성하고 반제국주의와 민족해방운동에 나서기 시작했다. 이 신아동맹당이 훗날 1920년대 초반 항일운동의 한축이었던 상해파 고려공산당과 사회혁명당(상해파 고려공산당 국내 조직)을 만든다. 단재 신채호도 “고토쿠의 글에 감명을 받아 내가 이렇게 나서게 되었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고토쿠 슈스이의 재판을 목격한 젊은 검사가 있었다. 그의 이름은 후세 다츠시. 그는 아무 증거도 없이 정치적 재판으로 지식인을 죽이는 모습을 목도했다. 그는 얼마 후 검사를 그만두고 민권 변호사로 나섰다.
1923년 또 다시 ‘대역사건’이 일어났다. 일왕과 왕세자를 죽이려 했다는 것이다. 주범으로 체포된 이는 박열과 그의 아내인 가네코 후미코였다.
일본 왕을 죽이려 한 죄인들이었다. 그 누구도 변호를 하지 않으려 했지만 후세 다츠시가 나섰다. 그는 박열과 가네코를 물심양면으로 도왔다. 박열과 가네코가 감옥에 있을 때 정식으로 결혼식을 치르게 해 준 것도 다츠시였다(결혼사진은 판사가 찍었다). 박열과 가네코가 한복을 입고 재판을 받을 수 있도록 했으며, 박열에게 “군의 법적투쟁은 일본 천황이 군의 조국 조선을 빼앗은 강도행위를 규탄하는 (훌륭한) 논고였습니다.”며 격려했고, 스스로도 <조선 독립운동에 경의를 표함>이라는 제목의 글을 썼다. 이런 행동 때문에 몇 차례나 변호사 자격정지를 당하기도 했다.
한복을 즐겨 입었던 그는 해방 직후인 1946년에 <조선건국헌법초안>을 만들어 보내기도 했다.
이후 재일교포들이 힘든 송사에 몰리면 늘 앞장서서 도와주었다.
일본인으로는 유일하게 건국훈장을 받았다.
그는 평소 “삶은 민중과 함께, 죽음은 민중을 위해”라는 말을 즐겨했다고 한다.
2.
1932년 3월, 일본 잡지 <프롤레타리아 문학>에 한 편의 시가 실렸다.
오오, 3월 1일
민족의 피가 가슴을 치는 우리의 그 누가
무한한 증오를 일순에 내리친 우리들의 그 누가
1919년 3월 1일을 잊을쏘냐!
그날
대한독립만세! 소리는 방방곡곡을 뒤흔들고
짓밟힌 일장기 대신
모국의 깃발이 집집마다 휘날렸다.
가슴에 다가오는 뜨거운 눈물로 나는 그날을 회상한다!
반항의 우렁찬 소리는 고향마을가지 울려 퍼지고
자유의 노래는 함경의 봉우리마다 메아리쳤다.
바람이여, 분노의 울림을 담아 백두에서 쏟아져오라
파도여, 격분의 물방울을 높이 올려 두만강에서 힘차게 튀어 흩어져라
오오 일장기를 휘날리는 강도들아
부모와 누나와 동지들의 피를 땅에 뿌려
고국에서 나를 쫓아내고
지금 칼을 차고 간도로 몰려오는 일본의 병비!(도적병사들)
오오 너희들 앞에 우리가 다시 굴종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하려는 거냐
대담무쌍한 강도들을 대우하는 방법을 우리가 모른다고 하는 거냐
<간도 빨치산의 노래>
당연히 이 시가 실린 <프롤레타리아 문학>은 즉시 일본 당국에게 발행 금지 처분을 받았다. 이 시를 쓴 사람은 조선인이 아니라 일본인 ‘마키무라 고’였는데, 그의 나이 불과 20살 때였다.
마키무라 고는 1912년 고치현 고치시에서 태어났다. 중학교 시절부터 전쟁 반대 운동에 뛰어들었다. 이 시를 쓴 이후 일본 당국에 체포돼 심한 고문을 받았지만 끝내 전향을 하지 않았다. 1935년 12월에 다시 검거돼 1937년 1월에 중병으로 석방됐고, 그해 9월, 26살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는 짧은 일생 동안 공산주의 운동과 조선해방운동에 몸을 바쳤다.
1933년 3월엔 이런 일도 있었다. 중국 길림성 왕청현 소왕청지역 뾰족산에서 한 무리의 항일유격대원들이 주변을 수색하고 있었다. 그 중에 앳된 조선인도 있었는데, ‘김일성’이라 불리는 젊은 대원도 있었다고 한다. 아무튼 유격대원들은 숲을 수색하다 납득하기 어려운 광경을 목격한다. 한 일본 군인이 자살한 채로 있었고, 유격대원들 앞으로 유서를 남긴 것이다.
친애하는 중국 유격대 동지들, 나는 당신들이 골짜기에 살포한 선전문을 보고 당신들이 공산당 유격대임을 알았습니다. 당신들은 애국자인 동시에 국제주의자입니다. 나는 당신들과 만나서 공동의 원수를 치고 싶습니다. 그러나 나는 파쇼 야수들에게 포위되어 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나는 자살하기로 결심했습니다. 내가 여기까지 운반해 온 10만 발의 탄알을 귀군에게 드립니다. 그것은 북쪽 소나무 숲 속에 있습니다. 바라건대 그 탄알로 파쇼 군대를 사격하십시오. 내 몸은 비록 죽지만 혁명정신만은 영원할 것입니다. 신성한 공산주의 위업을 하루 빨리 성공하기를 원합니다,
1933년 3월 30일. 관동군 간도 치중대 일본공산당원 이다 스케오
그의 말대로 숲에는 일본 보급차량이 있었고, 이다 스케오는 일본군이 차량을 회수하지 못하도록 엔진을 파괴해 둔 상태였다. 보급차량에는 10만 발의 총알이 있었다.
1932년 4월 29일 중국 상하이, 김구 선생을 비롯한 독립운동가들은 초조하게 서성거리고 있었다. 조금 전 윤봉길이 폭탄을 가지고 홍커우 공원으로 출발했기 때문이었다. 얼마 뒤 독립운동가들에게 한 일본인 기자가 비를 맞으며 미친 듯이 뛰어왔다. 그 기자는 일본군 종군기자였다. 그는 “너희 성공했다. 성공했다. 시라카와가 죽고 노무라 사령관 눈알이 빠졌다”며 마치 자기 일처럼 기뻐했다. 그는 독립운동가들의 계획을 이미 눈치 채고 있었지만 발설하지 않았고, 제일 먼저 독립운동가들에게 이 소식을 전해줬다.
1930년 역시 상하이에서 결성된 남화한인청년연맹은 의열단과 마찬가지로 폭력혁명을 통해 일본제국주의를 몰락시키고 자유·평등·우애에 기초한 새로운 세상을 열려고 했다. 남화한인청년연맹은 친일 중국정치인 왕징웨이를 죽이려 했으며, 상하이 일본 영사관에 폭탄을 여러 차례 투척하고 일본 대사를 살해하려 했다. 이런 남화한인청년연맹에는 일본인 청년 2명이 가담하고 있었다고 전한다.
3.
3.1절이다. 97년 전과 마찬가지로 온 천지에 태극기가 나부끼고 있다. 일제의 악행을 고발하는 기사, 뒤늦게(혹은 타이밍 재고 있다가) 밝혀진 독립지사 이야기가 잠시 동안 미디어를 장악하고 있다. 좋다. 다 이해한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또 다시 한국vs일본의 구도가 재현되는 것이다. 아마 올림픽 때, 광복절에도 이 구도는 다시 재현될 것이다.
하지만 앞서 살펴본 것처럼 ‘일제’와 ‘일본인’은 다른 개념이다. 일본인 가운데 일부는 우리민족의 처지를 안타깝게 여기거나 혹은 제국주의를 몰아내기 위해 혹은 혁명을 위해 우리 독립운동가와 손을 잡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 숫자도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는 훨씬 많을 것이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해서도 우리는 일본 당국의 처사에 분개하지만, 사실 양심 있는 일본 시민단체와 연구자들의 도움 없이 전 세계에 이 정도로 알리는 건 불가능했을 것이다. 예전 기사에도 언급했지만 일본군 위안부 관련 모든 연구는 일본인 연구자들이 이뤄낸 것이나 다름없다.
우리는 친일‘반민족행위자’를 비판한다. 옳고 정당한 비판이다. 그렇지만 조금 더 정교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친일반민족행위자들은 하나같이 ‘어쩔 수 없다’고 말한다. 당시엔 다 그랬다고 한다. 우리는 그 말이 터무니없는 변명임을 짐작하고 있지만 동시대를 직접 살아보지 않았기 때문에 시간이 지날수록 그들의 막연한 변명은 조금씩 힘을 얻는다.
따라서 우리는 일본인 항일인사들에 대해 우리는 연구할 필요가 있다. 위 사람들은 친일반민족행위자들과 동시대를 살아온 일본인이었다. 하지만 이들은 친일반민족행위자들과 정반대로 행동했다. 어느 사회나 있듯이 어쩌다 한명 씩 나오는 또라이 같은 인물들일까? 아니면 진정 양심을 가진 집단이 보이지 않게 있었던 것일까?
나는 후자라 생각한다. 분명 수많은 이들이 직·간접적으로 독립운동가들을 돕거나 자신만의 방식으로 일제에 저항했을 것이다. 지금 우경화로 치닫는 일본에서 그들을 기념하거나 기리거나 연구하길 바라는 것은 무리다. 그렇다면 우리라도 그들을 밝혀내고 기념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런 연구가 친일반민족행위자 합리화에 종지부를 찍을 수 있는 방법이 될 수도 있다. 또한 앞으로 한일간 양심 있는 집단 간 연계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항일투쟁사 발굴에 많은 업적을 남긴 만주 연변대학교 박창욱 교수는 일본에서 소학교를 다닐 때 일본인 교사에게서 이런 얘기를 들었다고 한다.
“일본에도 이 전쟁(만주사변·중일전쟁)을 반대하는 사람이 있다. 일본 제국주의와 일본 인민을 분리해서 생각해 달라.”
분명 많은 이들이 있을 것이다. 우리가 아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이.
* 참고자료
김효순, <간도특설대>, 서해문집, 2014
우에하라 카즈요시 외 지음·한철호 이규수 옮김, <동아시아 근현대사>, 옛오늘, 2000
박종린, <1910년대 재일유학생의 사회주의 사상 수용과 ‘김철수 그룹’>, 사림 30호, 2008
이수경, <고토쿠 슈스이의 조선인식>, 한일어문논집 11호, 2007
임경화, <동아시아 ‘계급연대론’의 기원>, 인문논총 제66집, 2011
임종금 작가
<2016-03-01> 딴지일보
☞ 기사원문: [3.1절 기념]일본의 양심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