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기사

[스토리펀딩] 4화 “아버지의 유해를 찾을 수 있을까요?”

983

[저널리즘] 아버지, 어디에 잠들어 계십니까

About you

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 유해발굴 공동조사단은 국가폭력에 의해 억울하게 죽어간 희생자들의 유해를 발굴하여 민간인학살의 진실을 규명하기 위한 활동을 벌이고 있습니다. 2014년 진주, 2015년 대전에서 시민들의 뜻과 힘을 모아 학살 희생자들의 유해를 발굴하였습니다. 


‘빨갱이 가족’이라는 오명을 쓰고 살아온 유족들, 아직까지 묻혀 있는 희생자들의 유해, 발굴작업에 나선 시민들, 발굴진행 보고를 통해 민간인학살 희생자들의 삶과 이야기를 전하고자 합니다.


Funding plan


오는 2월 24일(수)부터 29일(월)일까지 충남 홍성군 광천읍 담산리에서 제3차 유해발굴이 진행될 예정입니다. 여러분들께서 모아주시는 소중한 후원금은 희생자 유해발굴작업에 필요한 비용과 결과보고서 발간비용으로 쓰겠습니다.


Details


“여기 억울한

주검들이 있습니다


어떤 이는 좀 더 나은 세상을 만들겠다는 신념 때문에, 어떤 이는 단지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어떤 아낙네는 빨치산에게 밥을 줬다는 이유만으로, 또 어떤 어린애는 영문조차 알지 못한 채 죽은 주검들입니다.


전쟁이라는 비상상황이기 때문에 이들의 죽음은 어쩔 수 없었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건 옳지 못합니다. 아무리 큰 죄를 지은 사람이라 하더라도 국가가 적법한 절차 없이 함부로 사람을 죽일 수 없습니다. 한국전쟁 당시 사라져간 수많은 민간인들의 죽음은 전투로 인한 것이 아니라 국가가 스스로 법을 무시하며 저지른 학살 때문에 일어난 일입니다.


한국전쟁이 끝나고 60여년이 지난 2005년 과거청산을 위한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가 설립되어 민간인 희생자에 대한 유해발굴이 시작되었습니다. 이후 3년간의 사업을 통해 1,617구의 유해와 5,600여점의 유품을 발굴하고, 충북대학교에 임시 안장했습니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뒤 진상규명위원회는 밝혀야 할 규모의 10%도 해결하지 못한 채 문을 닫아야만 했으며, 유해발굴 사업 또한 중지되었습니다.

“세 번째 발굴을

하려 합니다
 


한국전쟁 당시 희생된 유해들이 아직도 전국 곳곳에 방치되고 있지만 국가는 피해자와 유족들에게 마땅히 지켜야할 국가적 책무인 법적·정치적 책임은 고사하고 최소한의 윤리적 책임조차 지지 않고 있습니다.


그래서 민간차원에서라도 먼저 아픈 역사의 진실을 밝히고 그 상처를 치유하는 일에 나서기로 했습니다.


2014년 2월 18일 뜻을 함께 하는 시민단체와 연구자, 시민들이 ‘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 유해발굴 공동조사단’을 결성하여 민간모금과 자원봉사로 유해발굴 사업을 시작하기로 했습니다.


2014년 진주 명석면과 2015년 대전 골령골 유해발굴에 이어 올해는 2월 24일부터 29일까지 충북 홍성군 광천읍 담산리 산 92번지에서 세 번째 발굴을 하려 합니다.


국가범죄로 인해 억울하게 희생된 분들의 유해를 수습하여 적절한 장소에 안치하는 일은 희생자와 그 유족의 한을 조금이나마 풀기위한 조치입니다. 또한 살아있는 사람들이 죽은 이에게 가져야할 최소한의 윤리적 책무일 것입니다. 많은 분들께서 함께 하시기를 기다리겠습니다.

[스토리펀딩] 1화 논매기 하다가 끌려간 우리 아버지


[스토리펀딩] 2화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과 비밀의 탄생

[스토리펀딩] 3화 반드시 밝은 곳으로 모시겠습니다.

[스토리펀딩] 4화 “아버지의 유해를 찾을 수 있을까요?”



고추잠자리 잡으러 가던 그 날 아버지는..


이른 아침입니다. 바람결이 칼칼합니다. 뉴스에서는 ‘꽃샘추위’라고 합니다. 최홍이 씨(74)는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습니다. 설레서입니다. 그는 올해 일흔 둘입니다. 무슨 일이기에 밤새워 뒤척인 걸까요?


“아버지를 맞으러 간다는 생각에 잠을 잘 수가 없더군요.”


2016년 2월 25일 오전 8시 30분. 아침밥을 먹는 둥 마는 둥 그가 어디론가 향합니다. 홍성 광천읍 담산리 산 92번지 꿀꿀이산. 맞은편 서쪽으로 오서산 능선이 선명하게 보입니다.


“아버지를

마중하러 가겠다더니

왜 산으로 간 것일까요?


야산 돼지축사 옆 빈터인 그곳에 열 댓 명의 사람들이 이미 모여 있습니다. 최 씨도 그들과 합류했습니다. 사람들의 움직임이 부산합니다. 최 씨도 바삐 몸을 움직입니다.


오후 1시. 사람들이 100여 명으로 늘어났습니다. 순식간에 다듬어진 빈터에 제상이 차려졌습니다. 하늘과 땅에 흙을 열겠다고 알리는 ‘개토제’입니다. 유해발굴을 위해서입니다. 아침부터 분주히 움직이던 사람들은 유해발굴을 위한 자원봉사자입니다. 최 씨가 말했습니다.


“여기에 아버지가 묻혀 있습니다.”


▲ 유해발굴 개토제에서 절을 올리는 유족 최홍이, 이종민 씨


▲ 유해발굴 개토제 진혼무


1950년 여름. 그때 최 씨는 코를 훌쩍이는 9살이었습니다. 잠자리채를 들고 밭으로 나가 고추잠자리를 쫓던 아이는 싫증이 났습니다. 투정을 부리며 집 마당으로 들어섭니다. 엄마가 울고 있습니다. 소리 죽여 흐느끼고 있습니다. 입을 앙다물고 깔고 앉은 밀 방석을 쥐어뜯으며 울고 계십니다. 아이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다시 고추잠자리를 잡으려 들 바깥으로 나섭니다. 그 아이가 최 씨였습니다.


오랜 시간이 흘렀습니다. 아이는 다 자란 뒤에서야 알게 됐습니다. 엄마가 눈물 세수를 하던 그 날이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날이라는 것을. 보도연맹원이었던 아버지가 누군가에게 살해된 날이라는 것을. 아버지를 살해한 사람들이 홍성경찰서 경찰이라는 것도 알게 됐습니다.
하지만 아버지가 묻힌 곳이 어디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당연히 유해도 찾지 못했습니다. 그로부터 40여 년이 지났습니다. 최 씨는 어느 날 우연히 둘째 고모에게 뜻밖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네 아버지가 굴비처럼 끈에 묶여 우리 동네 근처로 끌려갔단다.”

어쩌자고 둘째 고모는 자신의 오빠가 죽임을 당하던 그 날의 기억을 함구해 왔던 것일까요? 함께 얘기를 전해들은 일가친척들도 발을 구르며 복장을 터뜨렸습니다.


하지만 그의 둘째 고모인들 왜 말하고 싶지 않지 않았겠습니까. 스멀스멀 온몸으로 엄습해온 공포심은 둘째 치고, 살아남은 형제자매, 친척들의 안위를 지키기 위해 혼자만의 비밀로 해 왔을 겁니다. 게다가 오빠가 동네 앞을 지나긴 했지만, 곧바로 꿀꿀이산으로 끌러갔다고는 생각조차 못 했을 겁니다.


유해발굴 조사단이 제상 앞에 일제히 무릎을 꿇었습니다. 최 씨와 유가족인 이종민 씨도 제상 앞에 앉았습니다. 이들이 한목소리로 말했습니다.


“밝은 곳으로 모시겠습니다, 땅속에 묻힌 그 날의 진실을 세상에 꼭 알리겠습니다.”


발굴단원에게 주어진 120시간. 그런데..


주어진 시간은 2월 29일까지 단 5일입니다. 수면 시간까지 합쳐 120시간입니다. 목표는 30~60구의 유해를 찾아내는 일입니다. 전날부터 전국에서 수십 명의 자원봉사자들이 찾아와 의지를 다졌습니다. 유해발굴 때마다 만나는 낯익은 얼굴들이 많았습니다.


발굴단장인 박선주 공동조사단 공동대표와 부인 박데비 씨는 십 수년째 전국 민간인 희생자 유해발굴을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습니다. 희생자 유해발굴 현장의 감초 같은 분들입니다.


총괄진행을 맡은 안경호 4.9 통일평화재단 사무국장과 김민철 민족문제연구소 책임연구원, 노용석 한양대 교수, 김영환 민족문제연구소 대외협력팀장, 임영순 활동가, 홍수정 49통일평화재단 조사실장 등은 3년째 유해발굴 사업의 실무를 떠맡고 있습니다.


영남대, 한양대, 경희대 학생들도 겨울방학의 끄트머리를 반납하고 자원봉사로 함께 하였습니다. 또한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자원봉사자들이 발굴현장에서 힘을 모았습니다. 홍성지역에서도 대책위를 구성해 자원봉사를 자임했습니다. 특히 집행위원장인 김용일 씨는 궂은일을 도맡아 발굴단원을 돕고 있습니다. 개토제가 끝나자마자 본격적으로 발굴작업이 시작됐습니다.


▲ 김지철 충남교육감의 격려 방문, 오른쪽 끝이 유족 최홍이 씨



2월 26일. 동굴 앞쪽에서 유해발굴에 집중했습니다.
시굴조사 당시 찾아낸 폐금광 입구를 들어내기 위해 굴착기가 시동을 걸었습니다. 거의 아파트 한층 깊이만큼 흙을 걷어내자 폐금광 입구가 모습을 보입니다.


2월 27일. 드디어 폐금광 동굴 안 유해발굴이 시작됐습니다.
동굴 길이는 3~4m 남짓입니다. 하지만 몸집이 작은 한 사람이 겨우 들어가 작업이 가능할 만큼 공간이 좁습니다. 반면 흙과 돌이 퇴적돼 있습니다. 흙을 파내기 시작했지만, 좀체 진도가 나가지 않습니다. 동굴 안과 작업 과정을 살피던 박 단장이 고개를 가로저었습니다.


“생각했던 것보다 난도가 훨씬 높아요. 29일까지는 어림도 없어요. 한 열흘 정도 추가 작업을 해야 할 것 같아요”


2월 28일. 아침부터 진눈깨비가 몰아쳤습니다.
눈가림 시설을 설치했지만, 작업장 안까지 빗물이 흘러들어옵니다. 오후가 되자 눈송이가 더 커졌습니다. 자원봉사단 상당수가 제설작업에 동원됐습니다.


2월 29일. 동굴 안 흙과 돌을 파내는 작업에 몰두했습니다.
오전 작업을 끝으로 이날 오후 발굴단은 일단 철수했습니다.


▲ 유해발굴작업 현장


▲ 유해발굴작업 현장

▲ 유해발굴작업 현장


콘크리트더미에 깔리고..골수 꿰뚫은 나무뿌리


1단계 발굴과정에서 드러난 유해는 기가 막힙니다. 폐금광 입구 앞으로 널따란 콘크리트 구조물이 박혀 있습니다. 폐도로인가 했더니 돼지를 운동시키기 위해 만든 간이 운동장이었답니다. 잠시 망설이던 박선주 발굴단장이 콘크리트 덩어리를 걷어내기로 했습니다.


바로 아래에 섞은 나무줄기 같은 검게 퇴색된 물체가 놓여 있습니다. 유해입니다. 콘크리트 더미에 깔린 유해는 잔뜩 습기를 머금은 채로 삭아 있습니다. 일부 유해는 손을 대자 담뱃재처럼 힘없이 녹아내립니다. 지켜보던 유가족들이 ‘어휴..’하고 안타까운 탄성을 내뱉습니다.


또 다른 뼛속 골수를 따라 나무뿌리가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영양분을 흡수하기 위해 촉수를 뻗은 것입니다. 수목장한 것도 아닌데..뼛속 골수가 다 빨릴 때까지 유해를 수습하지 못한 죄책감이 엄습해옵니다.


▲ 뼛속 골수를 나무뿌리가 관통한 유해


▲ 발굴된 유해

▲ 발굴된 유해

▲ 동굴 안에서 발견된 온전한 형태의 두개골


희생자의 것으로 보이는 허리띠 끝을 고정하는 역할을 하는 버클과 군청색 단추도 나왔습니다. 손을 묶을 때 사용했던 것으로 보이는 끈도 보입니다. 당시 주로 경찰이 사용했던 M1 소총 탄알의 탄두도 발굴됐습니다.


“이는 가해자가 경찰이며

희생자가 민간인임을

말해줍니다


이곳에는 1950년 6월부터 10월까지 보도연맹원 및 부역 혐의 등으로 30∼60여 명이 군경에 의해 살해돼 암매장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폐금광 동굴 안에서 거의 온전한 형태의 두개골도 수습됐습니다.


지금까지 발굴된 유해는 약 14구 정도입니다. 앞으로 몇 구의 유해를 더 밝은 곳으로 모실 수 있을까요? 최홍이, 이종민 씨는 평생 그토록 기다리던 아버지 유해를 찾을 수 있을까요? 유해발굴조사단은 4일부터 2단계 발굴을 시작합니다.


글 | 심규상(오마이뉴스 기자)


NO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