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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파 세상, 화 안 나요?”…“말조심하고 행동 조심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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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yseoul@naver.com


[토요판] 인터뷰 ; 가족

독립운동가 아들과 손자

▶ 3·1절을 앞두고 독립유공자의 아들과 손자가 마주 앉았습니다. 아들은 친일파가 득세한 대한민국이 못마땅하지만 아버진 자신과 가족을 건사하기 위해 체제에 순응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아버지를 이해하면서도 갈 길이 다른 아들이 처음으로 아버지를 인터뷰했습니다. ‘인터뷰; 가족’은 독자 여러분 누구나 참여할 수 있습니다. 실명과 익명 기고 모두 환영합니다. 보내실 곳 gajok@hani.co.kr. 200자 원고지 기준 20장 안팎.

나의 조부는 서훈을 받으신 독립운동가다. 신간회 회원이었던 할아버지는 1930년 4월, 동지들과 함께 “일본 제국주의 독재정치를 박멸하자, 조선총독 포악정치를 박멸하자, 우리가 약소민족을 해방시키자”는 격문을 작성하고 배포한 뒤 만세 운동 등을 벌이다 체포됐다. 이후 징역형을 받고 옥고를 치르셨다. 할머니 말씀에 따르면 할아버지가 겪으신 고초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참혹했다고 한다.


아버지는 해방 전에 태어나셨고, 할아버지를 비교적 이른 나이에 여의셨다. 백색테러가 흉흉하고 서북청년단이나 자칭 우익들의 손가락질 하나면 붉은 사람이 되던 해방 정국에서 독립운동가의 아들로 살아온 아버지의 삶은 평탄하지 못했다. 살림도 참 모질게 힘들었다.

돌아가신 조부를 비롯해 일제 시기를 살아낸 사람들의 신산스러운 삶을 손자는 옛 문헌을 통해 더듬는다. 조지훈의 <한국민족운동사>에는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대첩에서 참패한 일제가 독립군을 지원했던 간도 지역 한인촌을 돌아다니며 한인 수만명을 학살한 경신참변 때 선교사 스탠리 마틴이 현장을 목격한 기록이 그대로 인용되어 있다. “간도 용정촌에서 40리 정도 떨어진 한 마을을 일본군 1개 대대가 포위하고, 남자라면 늙은이 어린애를 막론하고 때려죽이고 불에 태워 죽이니, 이 상황을 울지도 못하고 바라보고 있던 그들의 아내와 어머니들은 땅바닥을 긁어 손톱이 뒤집힌 사람도 있었고, 할머니와 며느리 둘이 잿덩이 속에 타다 남은 살덩이와 뼈를 줍고 있었으며, 나는 이것을 보고 신에게 기도를 드리며 시체를 하나 끌어내어 흩어진 팔과 다리를 주워 모은 후 사진을 찍었다. 어찌나 분통했던지 사진기를 고정시킬 수 없어 네번이나 사진을 찍었다.”

이러한 천인공노할 짓은 일제의 행위만이 아니었다. 시대의 마지막 선비 심산 김창숙을 반신불수로 만든 최석현, 수많은 독립운동가를 고문으로 옥사(獄死)시킨 노덕술, 주사기로 피를 뽑아 뿌리던 착혈 고문귀 하판락 등 이른바 친일 부역자들의 행위는 더하면 더했지 다르지 않았다. 최석현은 해방 후 자취를 감췄지만 하판락은 경상남도 경찰청 수사과로 복귀하고 금융사업가로 변신해 큰돈을 벌었으며, 노덕술은 수도경찰청 수사과장에 기용되는 등 승승장구했다. 해방 정국에서 친일파와 민족운동가들의 대립은 치열했다. 권력을 틀어쥔 친일파들은 양심적인 민족지사들을 좌익으로 몰았다. 그리고 곧이어 일어난 전쟁은 이 모든 것을 덮어버렸다.


2008년께 서훈을 받은 연만(年晩)한 아버지를 대신해 국가보훈처에 갔더니 직원이 이상한 걸 물어봤던 기억이 난다. ‘집이 자가냐 전세냐 월세냐, 방은 몇 개냐, 부모님과 자녀분들 학력은 어떠냐, 환자가 있으시냐, 부모님과 자녀분들 직업은 뭐냐’ 등의 설문이었다. 나중에 알았다. 보훈처에서 2012년 공개한 대한민국 독립운동가(7940명) 후손들의 학력과 직업 등 면면을 보면 무직이 60%를 차지했고 중졸 이하 학력이 55%나 된 걸로 나온다. 봉급생활자는 10%밖에 되지 않았으며, 두 집 중 한 집이 중병을 앓고 있었다. 50%가 독립유공자 후손으로서 자부심을 느끼지 않고 있다고 대답했다.

독립운동가 후손이 겪었어야 할 시대의 풍파를 견뎌내며 생계의 수단으로 공직을 선택한 아버지는, 사회운동에 관여하면서 시시비비 가리기를 좋아하고 나쁜 놈을 보면 참지 못하는 나와는 참 다르다. 바쁘다는 핑계로 부모님 댁에는 잘 들르지 못하지만, 어쩌다 새벽 술김에 가보면 현관 앞에 놓여 있는 신문부터 아들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

내 할아버지는 독립운동가였다

1930년 일제에 반대하는 격문을

쓰고 만세운동을 벌여 투옥됐다

고생은 아버지 대까지 이어졌다

“친일파가 독립운동가 좌익으로

몰아 죽인 거 역사에 기록해야죠”

“그런 데 함부로 나서지 말아라

세상이 그리 만만한 게 아니다”

아버지 <조선일보> 좀 제발 그만 보세요.

아버지 내가 보고 싶어서 보니. 보수파들이 뭐라고 하는지 알아야 할 거 아니냐.

새벽 첫 대면부터 충돌 직전인 아버지와 아들의 대화는 꼭 술을 먹어야 원활하게 이어진다. 이것은 어쩔 수 없는 우리 부자의 숙명이다. 이 대화는 지난달 말께 이루어졌다.

아버지 담근 술 있다. 술 너무 많이 먹고 다니지 마. 집에서 너 걱정 안 하게 해줘야지.

좋은 세상 오면 술도 끊고 담배도 끊고 뭐 그래야죠.

아버지 할아버지 제사에 몇 시에 올래, 너 오는 시간에 맞춰 지내야지.

최대한 일찍 올게요. 건강은 어떠세요, 요즘 독감 유행하는데.

아버지 노인은 무료로 독감 예방주사 놔 준다. 매년 맞고 있고 나는 괜찮다, 니 엄마가 걱정이지.

저는 결막염에 걸려 고생하다가 약을 잘못 먹어서 아나필락시스 쇼크가 와 죽다 살았어요. 발진이 나고 온몸이 타들어가는 거 같고 숨도 못 쉬겠고 사는 것도 힘들어 죽겠는데 아주 가지가지 해요.

아버지 몸조심해라, 건강 챙기고, 밥 꼭 챙겨 먹고. 우리는 너가 해준 집에서 아무 불편함 없이 잘 있다. 우리 걱정은 조금도 하지 마라. 너 때문에 걱정이 많아.

제가 올해 신년운세를 봤는데 좋다고 하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어머니는 2009년에 뇌동맥 파열로 쓰러져 12시간이 넘는 수술을 받고 중환자실에서 오래 계시다가 기적적으로 소생했다. 그 뒤로는 건강이 많이 안 좋으시다. 당시 개두술이라 어머니의 병원비 90%가 국가에서 지원된 것을 보면서 아버진 이 정책을 만든 참여정부에 대해 다시 생각했다고 한다. 아들이라고 하나 있는 게 지 맘대로 살며 속만 썩이고, 뭐 하나 해드린 것도 없어서 그동안 모은 돈으로 지난해 부모님께 작은 거처를 마련해 드렸다. 좋아하시던 부모님 얼굴을 잊을 수 없다. 술값으로 펑펑 쓰고, 억울한 분들 편에서 끝장을 봐야 한다고 외치며 없는 돈 쪼개 후원금까지 내던 나는 정작 가족은 잘 챙기지 못했다. 그래서 많이는 못 드리지만 용돈과 생활비도 조금씩 보내드린다. 술은 해 뜰 무렵까지 계속되었고 우리의 대화는 국정 교과서와 박정희 그리고 친일인명사전과 해방 후 이야기까지를 넘나들었다.

아버지 예전에 건국절 만든다고 할 때 기억나세요? 독립유공자 서훈 반납하겠다고 하셨잖아요.

아버지 그랬지, 그거 뉴라이트라는 사람들이 그렇게 적극적으로 외쳤었지. 있을 수 없는 일이야.

아니 당연한 말씀을 하시면서 친일인명사전은 왜 그렇게 싫어하세요?

아버지 친일인명사전에는 친일 졸개들이 없어. 당시 사람들을 괴롭힌 건 고위 관리들이 아니야. 면서기, 순사, 이런 것들이 가장 악질이었어. 이들을 빼고서 만든 친일인명사전은 가짜야.

이놈들이 이제는 교과서까지 자기들 입맛대로 바꾸려고 해요.

아버지 그런 데 나서지 말아라. 세상이 그리 만만한 게 아니다.

독립운동가들과 반민특위 조사관들이 붉은 덧칠을 당해 피신하고, 심지어 전란 때는 괴한들에게 끌려가 총살당했던 역사를 있는 그대로 기술해야죠. 국정 교과서가 이런 내용을 담을 리 없잖아요. 친일파 후손이 득세하는 세상, 아버진 화도 안 나세요?

아버지 전란 전에는 법이 없었어. 그냥 서북청년단이나 일본 놈 앞잡이들이 저거 빨갱이다 하면 빨갱인 거야. 전란 때는 학교에 사람들을 모아놓고 기름을 부어 태워죽이기도 했다. 나는 그걸 다 보고 자랐어.

해방 이후 좌익활동했던 박상희가 살아 있었다면, 박정희는 통치기간에 자기 형도 좌익으로 몰아 죽였을까요?

아버지 어디 가서 말조심해라, 그저 행동 조심하고. 누차 이야기하지만 세상이 너가 생각하는 거만큼 그렇지가 않다.

말수 없는 아버지는 내가 무슨 말을 해도 “세상이 그런 게 아니”라며 “그저 몸조심하라”고 하신다. 광기의 세월을 그대로 겪은 부모가 자식에게 진심으로 이르는 말이다. 하지만 사실을 가리고 미화하려고 하는 자들, 선대와 무섭도록 똑같은 발상을 하며 사회 곳곳에 권력자로 포진해 온갖 악행을 저지르는 그들을 용납할 수는 없는 일, 내가 항상 명정(酩酊·몸을 가눌 수 없을 정도로 술에 몹시 취함)하고 몸조심할 수 없는 이유다. 아버지 죄송합니다.


97주년 삼일절에 독립운동가의 손자 씀

<2016-03-04> 한겨레

☞기사원문: “친일파 세상, 화 안 나요?”…“말조심하고 행동 조심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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