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말하는 ‘대한민국 건국’
이 만 열(숙명여대 명예교수)
작년 말 교육부는 국사교과서의 국정화 방침을 고시하면서 ‘1948년 8월 15일’을 종래 ‘대한민국 정부 수립일’로 기술했던 것을 ‘대한민국 수립일’로 바꾸겠다고 했다. 이런 방침을 밝힌 교육부의 설명은 이랬다. 남북분단 상황에서, 남측이 대한민국 정부를 수립한 1948년에 북에서는 9월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수립했는데, 북에서는 국가를 수립했고 남에서는 정부를 수립했다는 것이 국격 문제를 일으켰다는 것이다. 한쪽은 국가를 건국했고 한쪽은 정부를 수립했으니, ‘정부 수립’이 ‘국가 수립’에 격이 떨어진다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남측도 1948년에 정부(대한민국 정부)를 수립한 것으로 쓰기보다는 국가(대한민국)를 수립했다고 써야만 격을 높이는 것이 된다는 것이다.
이승만, “민국연호는 기미년(1919)에서 기산…”
언뜻 들으면 그럴싸하지만, 결론부터 말하면 이는 역사적 사실을 혼동한 데서 도출한 결론이다. 이 문제는 대한민국이 언제 건국되었느냐는 문제와 관련되어 있다. 북측은 3.1운동과 그 결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을 무시하기 때문에 그들의 건국은 1948년으로 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남측은 1919년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을 계승하기 때문에 대한민국은 1919년에 수립(건국)되었고, 정부는 1948년에 수립한 것으로 인식한 것이다. 따라서 종래 교과서에 1948년에 ‘정부를 수립했다’고 해서 하등 국격을 떨어뜨리는 것이 아니다.
1948년 정부 수립 때 대한민국이 3·1운동으로 건립되었다는 것을 헌법 전문에 명시토록 한 분이 이승만이다. 그해 5월 10일 총선거 후 5월 31일에 개원된 국회는 이승만을 국회의장으로 선출했다. 그는 국회 개원연설에서 이렇게 언급했다. “나는 이 대회를 대표하여 오늘에 대한민주국이 다시 탄생한 것과 따라서 이 국회가 우리나라의 유일한 민족대표 기관임을 세계만방에 공포합니다. 이 민국은 기미년 3월 1일에 우리 13도 대표들이 서울에 모여서 국민대회를 열고 대한민주독립국임을 세계에 공포하고 임시정부를 건설하야 민주주의 기초를 세운 것입니다. … 오늘 여기에서 열리는 국회는 즉 국민대회의 계승이요 이 국회에서 건설되는 정부는 즉 기미년에 서울에서 수립된 민국임시정부의 계승이니, 이날이 29년만의 민국의 부활일임을 우리는 이에 공포하며 민국연호는 기미년에서 기산할 것이요…” 여기서 그가 언급한, 기미년 서울의 ‘국민대회’나 ‘민국임시정부’는, 3·1운동 후에 세워진 세 임시정부(상해, 블라디보스톡, 서울) 중 한성정부를 언급한 것이다.
제헌국회가 개원되자 이승만은 새로 제정하는 헌법에 자신이 국회 개원연설에서 주장한, 기미 3.1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했다는 것을 헌법 전문(前文)에 명문화할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초안에는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들 대한국민은 3.1혁명의 위대한 독립정신을 계승하여…”라고만 명시했다. 이승만은 7월 1일 축조심의 때 언권을 얻어 등단, 임시정부 법통 계승을 역설했고, 국회는 그 제안을 받아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들 대한국민은 기미 3.1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하여 세계에 선포한 위대한 독립정신을 계승하여 이제 민주독립국가를 재건”한다고 전문을 수정했다. 다른 나라 헌법에서 좀처럼 찾아볼 수 없는 전문(前文)은 이렇게 이승만의 노력에 의해 만들어졌다.
1948년 관보1호엔 대한민국 30년이라고 밝혀
이승만은, 연합국이 우리를 해방시켜 준 덕분에 대한민국이 건국된 것이 아니라 우리 선진들이 일제의 강포한 식민 통치에 저항, 기미독립운동을 전개하여 대한민국을 건립했으며 그렇기 때문에 “기미년 독립을 선언한 것이 미국이 1777년에 독립을 선언한 것보다도 영광스러운 역사”라고 강조했다. 그는 한국의 민주공화국이 연합국의 시혜로 이뤄진 것이 아니라 독립투쟁을 통해 이뤄졌음을 분명히 인식했다. 이와 함께 1919년에 대한민국이 수립되었고, 1948년에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다는 것도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다. 그러기에 1948년 8월 15일 옛 중앙청에서 축하식을 거행할 때 뒷면에 걸려 있는 펼침막은 “대한민국 정부수립 국민축하식”이라고 썼던 것이다.
이승만의 ‘대한민국 건국’ 이해의 역사의식은 정부의 공식 연호(年號)를 통해서도 분명히 했다. 임시정부에서 사용한 연호를 1948년에 수립된 정부에서도 그대로 계승했고 그 연차(年次)도 임시정부의 것을 그대로 계승하여 계산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19년을 대한민국 1년이라고 표기한 후 해방 후까지도 계속했고 이를 이어 이승만은 1948년을 대한민국 30년에 해당된다고 했다. 이승만과 각료들은 ‘대한민국 30년’이라는 연호를 정부의 공식문서에 서명했고, 1948년 9월 1일에 간행된 관보 1호에도 ‘대한민국 30년 9월 1일’이라고 밝혔다. 이것이 1948년 대한민국 정부를 수립한 이승만과 선진들의 역사의식이었다.
이승만 추앙운동이 최근에는 그를 다시 ‘국부(國父)’로 받들어야 한다는 주장으로 이어지고 있다. 그 주장에 동의하지 않지만, 대한민주국가 정통성을 확립해야겠다는 그의 ‘대한민국 건국’ 이해에는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그를 국부로 받들려는 이들 중에 그의 이러한 “대한민국 건국” 역사의식을 도외시하거나 왜곡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그의 이같은 역사의식은 대한민국의 ‘건국’과 ‘정부수립’에 관련된 작금의 ‘대한민국 정체성’ 혼란에 분명한 시사점을 던진다. 그를 추앙하는 이들일 수록 먼저 그의 이러한 역사의식에 이해와 공감을 갖는 것이 필요하다고 본다.
<2016-03-11> 다산연구소
☞칼럼원문: 그가 말하는 ‘대한민국 건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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