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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독재 비판하면 빨갱이? 이상한 낙인 찍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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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150> 유신 체제, 여섯 번째 마당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법이다. 사회 전반의 분위기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른바 진보 세력 안에서도 부박한 담론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역사를 깊이 있게 이해하는 것이 절실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러한 생각으로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를 이어간다.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은 한국 현대사 연구를 상징하는 인물로 꼽힌다. 매달 서 이사장을 찾아가 한국 현대사에 관한 생각을 듣고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열두 번째 이야기 주제는 유신 체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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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시안 : 민청학련(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 사건과 인혁당(인민혁명당) 재건위 사건(2차 인혁당 사건)은 유신 체제를 다룰 때 빠지지 않는 사안이다. 그만큼 유신 체제에서 일어난 사건들을 대표할 만한 사건으로 꼽히는데, 그 내용을 보면 두 사건은 긴밀히 연결돼 있다. 두 사건은 발생 당시에도 사람들 머릿속에 커다란 사건으로 각인된 측면이 강한데 어떻게 해서 그렇게 된 것인가.


서중석 : 민청학련 사건이 실제로 그렇게 큰 규모의 활동이 있었던 사건이냐, 학생들이 시위를 정말 그렇게 크게 벌인 사건이냐고 할 때 그렇게 보기는 어려운 점이 있다. 그런데도 유신 정권은 긴급 조치 1호보다 훨씬 엄혹한 긴급 조치 4호를 발동하고 ‘지금 공산주의자들이 뭔가 일을 벌이고 있다’는 식으로 국민들한테 겁을 주는 발표를 했다. 그러면서 1204명을 연행, 조사했다고 돼 있다. 그 당시까지 이게 최대 인원이라는 식으로 쓰여 있는데, 꼭 맞는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아무튼 그중 253명을 비상군법회의에 송치해서 180명을 기소했다고 발표했다. 이렇게 대대적으로 발표한 것이 결국 민청학련 사건이라는 것을 크게 키운 것 아니냐고 볼 수 있다.


그뿐 아니라 인혁당 재건위 사건이라는 것을 여기에 곁들여서 마치 공산주의 세력이 박정희 정권을 뒤집어엎으려 한 것 같은 분위기를 더욱더 강하게 풍기는 발표를 했다. 또 윤보선 전 대통령을 기소하고 박형규 목사, 김동길 교수, 김찬국 교수 같은 사람들도 구속했다. 거기에다가 이제는 천주교 원주 교구의 지학순 주교를 구속하고, 변론하는 변호사까지 구속했다.


그러면서 이 사건이 의외로 굉장히 크게 주목받게 됐다. 심지어 도피 중인 학생들을 붙잡겠다며 엄청난 현상금을 걸었다. 처음에는 현상금이 50만 원이었는데, 그걸 100만 원으로 올리고 다시 200만 원으로 올리더니 나중에는 최고 300만 원까지 올렸다. (당시 간첩 신고 포상금은 30만 원 선이었다. 유신 정권이 민청학련 사건에 어떤 태도를 취했는지를 현상금 문제에서도 느낄 수 있다. ‘편집자’) 그와 함께 서울의 거의 모든 거리에서 검문검색을 실시했다. 이런 것들도 사람들한테 굉장한 위압감, 두려움을 줬다.

10·2 시위 후 복학생을 중심으로 연결된 유신 반대 모임, 민청학련

ⓒ오월의봄

프레시안 : 민청학련 사건부터 하나씩 짚어봤으면 한다. 이 사건에 연루된 이들은 당시 무엇을 지향하며 활동에 돌입한 것인가.


서중석 : 학생 운동으로 유신 독재 반대 활동을 크게 해보려고 했다고는 하더라도, 조금 전 얘기한 것처럼 이 사건 자체가 그렇게 대단한 사건이라고 볼 수 있느냐 하면 그렇지는 않다. 중심은 군대 갔다 온 복학생들이었다. 1971년 위수령 사태 때 학교에서 잘려 군대에 갔다 오지 않은 유인태 같은 경우도 있긴 했지만 전반적으로 복학생들이 중심이었는데, 이 사람들은 1973년 10월 2일 문리대 시위라든가 그 이후의 학생들 움직임에 굉장한 감동을 받았다. 이들은 ‘우리도 뭔가 해야 한다’고 하면서 후배들, 즉 10·2 문리대 시위나 그 직후 이어진 법대와 상대 시위를 이끌었던 사람들하고 연결을 지었고 그러면서 11월 하순부터 여러 통로로 사람들을 만났다.


그런 과정을 거쳐 서울대 내에 있는 각 단과대를 연결시키고, 서울에 있는 주요 대학을 연결시키고, 더 나아가 지방에 있는 여러 대학을 연결시켰는데 여기서 복학생들이 유리한 점이 있었다. 뭐냐 하면 복학생들은 1960년대 3선 개헌 반대 운동, 1967년 6·8 부정 선거 반대 운동, 1971년 교련 반대 운동 등에서 활동했던 사람들은 물론이고 그 이전에 굴욕적 한일 회담 반대 운동을 했던 선배들까지도 알고 있었다. 그런 사람들을 통해 서울이나 지방에 있는 후배들하고 연결을 짓고, 그렇게 서울과 지방의 여러 대학을 연결해 유신 체제 반대 운동을 좀 더 성과 있게, 큰 규모로 같이해보자는 게 기본 취지였다.


각 대학의 학생들만이 아니라 사회에 나가 있던 선배들과 연계하는 활동도 했다. 당시 원주 가톨릭 쪽에는 운동권 선배들이 상당히 많이 있었고 장일순, 박재일, 김지하 등도 그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과거에 탄광을 비롯한 여러 곳에서 활동한 분들이 그쪽에 있었다. 그뿐 아니라 1971년에는 지학순 주교를 중심으로 부정부패 추방 운동을 원주에서 크게 벌이지 않았나. 그러면서 지 주교의 입장이 선명하게 드러났는데, 지 주교를 중심으로 해서 원주 쪽에 있던 운동권 선배들과 연결을 지어서 같이 싸우는 게 필요하다고 보고 그쪽과도 연결하는 활동을 했다. 또 적극적으로 반유신 운동을 벌이고 있던 개신교 쪽하고도 연결을 지었고, 정보도 얻고 도움도 받을 겸 언론계에 있는 선배들을 만나는 활동도 벌였다. 그런 과정에서 유인태, 이철이 일본인 2명도 만나게 됐다. 또 지방에서 경북대가 1973년에도 유신 반대 시위를 적극적으로 벌였는데, 이때도 여정남이 경북대 선배로 서울에 올라와서 유인태 등을 만났다.


이런 과정을 거쳐 1974년 3월 초쯤 돼서는 일을 새로 분담하고 이제 유신 반대 시위를 본격적으로 벌이기로 했다. 그렇지만 조직 명칭은 사용하지 않는 쪽으로 의견을 모은 상태였다.


프레시안 : 왜 그런 합의를 한 것인가. 민청학련이라는 이름은 어떻게 해서 생긴 것인지도 궁금하다.


서중석 : 명칭을 가지면 반드시 박정희 정권이 반국가 단체로 몰아세우고 국가보안법 같은 걸 적용해 탄압할 것이라고 봤기 때문이다. 그래서 명칭을 일체 사용하지 않는다는 합의를 봤다.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이라는 이름은 나중에 붙게 되는데, 그건 다른 것 때문이 아니라 1974년 4월 2~3일경에 유인물을 뿌려야 했기 때문이다. 유령 단체도 아닌데, 아무런 이름이 없는 유인물을 뿌리면 이상하게 보일 수 있지 않나. 그래서 유인물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안 되겠다. 뭐 하나 이름을 붙이자’, 이렇게 해가지고 현장에 있던 몇 사람이 중심이 돼서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이다. 그런데 그게 유명한 민청학련 사건의 이름이 돼버린 것이다.


명칭 문제뿐만 아니라 ‘화염병 같은 것도 사용하지 말자’, 이런 합의도 했다. 예컨대 1971년에 심재권, 이신범, 장기표, 김근태 같은 사람들이 걸려든 서울대생 내란 예비 음모 사건만 해도 그 내용을 보면 별것 아닌데도 박정희 정권에 맞서 뭔가 꼼지락꼼지락한다고 해서 당국이 큰 사건으로 만들어냈던 것 아닌가. 그런 사례를 보더라도, 만약 화염병 같은 걸 만들면 유신 정권에서 틀림없이 학생 시위를 폭동으로 몰고 갈 것이라고 봤다. 그런데 나중에 이철 등 몇 사람이 ‘화염병은 어떻게 만드나’ 하면서, 결과적으로 실패했지만 만들려고 했던 게 있었는데 그걸 가지고 정권에서 엄청나게 트집을 잡고 그랬다.


하여튼 정부 당국은 학생들을 감시하면서 학생들이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는 것 같았는데, 한동안 체포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런 걸 느끼면서 학생들도 ‘우리를 키워서 잡아먹으려 하는구나’, 이런 정도는 짐작을 했다. 그런 속에서 언론계 선배뿐만 아니라 과거에 운동권에서 일했던 여러 선배들도 만났다. 예컨대 조영래 변호사(<전태일 평전> 저자)는 학생들을 원주 쪽과 연결해주는 역할을 많이 했고, 이현배 같은 사람은 사회 저명인사들과 연결해주는 활동을 했다.


이처럼 학생 운동권에서 박정희 정권에 맞서 다시 싸워야 한다는 생각을 가진 많은 사람이 이 시기에 규합된 건 사실이다. 그렇지만 실질적으로 한 일이 뭐가 있느냐, 문제는 바로 그것이다.


박정희 집권기 한국 사회 모순을 정면 비판한 민중·민족·민주 선언


프레시안 : 실제로 어떤 활동을 했나.


서중석 : 실질적으로 한 일을 간단간단히 살펴보자. 학생들은 먼저 1974년 3월 11일 한신대에서 투쟁을 전개하고 그다음에 경북대에서 더 크게 하자고 의견을 모았다. 그런데 한신대에서 투쟁이 성공하지 못했다. 경북대의 경우도 3월 21일 200명 정도가 시위를 벌이긴 했지만, 제대로 되기가 어려운 상황이었다. 투쟁하는 학생들은 긴급 조치 같은 걸 무시했지만, 일반 학생이나 시민들은 투쟁 대열에 나서기가 쉽지 않았다. 워낙 얼어붙은 분위기였기 때문이다. 어쨌건 그런 상황에서 3월 28일 서강대에서 유신 헌법 및 긴급 조치 철폐를 위한 성토대회를 열었는데, 바로 검거 선풍이 불었다. 이 운동을 이끌어간 중심 세력이 대개 서울대 문리대였는데, 4월 1일과 2일에는 여기서 소규모 시위가 일어났다. 연세대에서는 4월 1일 대강당에서 채플이 있을 때 송무호가 선언문을 읽다가 연행됐다.


사실 이때는 사회 전반적으로 너무나도 얼어붙어 있었다. 심지어 서울대 문리대조차 얼어붙은 분위기였다. 그렇기 때문에 후배들이 선배들한테 ‘이것 못한다. 이런 분위기에서 유신 반대 투쟁을 해봤자 크게 당하기만 하지, 일반 학생들이 가담하기가 아주 어렵게 돼 있다’고 그랬는데, 그런 의견이 상층으로 올라갈 수 있는 통로가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았다. 이렇게 소통이 어려운 상태에서 4월 3일, 약속된 그날 일제히 들고일어나자고 돼버린 것이다.


4월 3일 그날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 성균관대, 이화여대 같은 데에서 뭔가 해보려고 했지만 제대로 되지는 않았다. 서울대의 경우 4·19탑 앞에서 100여 명의 문리대 학생이 유인물을 살포했고 의대생들은 학교 바깥으로 진출하려 했지만, 경찰이 워낙 강하게 밀어붙여서 제대로 하지는 못했다. 성균관대, 이화여대 학생들도 모여서 성토대회를 하고 선언문도 낭독했지만 곧 해산당했다. 이화여대생 40여 명이 이날 저녁 청계천에서 시위를 벌였지만 이것도 바로 진압됐다. 그러면서 시위를 더 이상 할 수 없었고 학생들은 바로 체포됐다.


오히려 이 4·3 시위와 관련해서는 그 당시에 나온 ‘민중·민족·민주 선언’ 그리고 ‘민중의 소리’라는 두 가지 문건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것 말고도 몇 가지 유인물이 더 나돌았는데 그중에서 이 두 문건이 상당히 많은 사람에게, 이 시위 때가 아니라 나중이긴 하지만, 읽히고 그랬다.


프레시안 : 두 문건에는 어떤 내용이 담겨 있었나. 4·3 시위 당시 나온 민중 담론이 1980년대를 풍미하는 민중 담론과는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인지도 궁금하다.


서중석 : 1980년대 운동을 민족·민중·민주 운동이라고도 부를 수 있는데, 그러한 민족·민중·민주가 1974년 4·3 시위 때 기본적으로 제시됐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다. 그런데 4·3 시위 당시 제시된 민중은 1980년대 중반 ‘민중의 국가’, ‘민중 민주주의’ 식으로 쓰일 때와 같은 강한 의미의 민중은 아니었다. ‘지금 민중 수탈 체제, 외국 독점 자본에 예속돼 있고 매판 특권 세력이 강성하다. 그런 것들을 지켜주는 것이 폭력 정치다. 우리는 이러한 것에 맞서 싸워야 한다. 민중을 위한 투쟁을 벌여야 한다’, 4·3 시위 때는 이런 인식이 더 강했다. 그리고 1980년대와 같이 반미, 민족 자주 입장을 강하게 천명했다기보다는 외국 독점 자본, 매판 특권 세력 등을 비판하면서 이 땅에 지금 신식민주의자들이 밀어닥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는 정도였다. 그런 의미에서 1980년대의 서막을 여는 수준에 머물렀지, 그것보다 심화된 내용을 보여준 것은 아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민족·민중·민주 중에서 민주는 유신 체제가 워낙 그것에 어긋나는 것이었으니 더 설명할 필요가 없는 것이었다.


이 선언은 “이에 우리는 반민주적, 반민중적, 반민족적 집단을 분쇄하기 위한 숭고한 민족, 민주 전열의 선두에 서서 우리의 육신을 살라 바치려 한다”, 이렇게 맺음을 했다. 이 시기에는 대일 경제 예속 문제가 굉장히 심각했고 빈익빈 부익부 문제도 아주 심각했다. 이건 나중에 1979년 부마항쟁은 물론 1980년대 초중반까지 계속 이어지는데, 민중·민족·민주 선언은 그 문제를 명확히 지적했고 그런 점에서 당시 사회를 잘 반영하는 면을 보여줬다. 그런 차원에서 이런 선언문이 나왔다고 볼 수 있다.

유신 독재 반대 세력을 공산주의자로 몰아간 박정희

▲ 박정희 전 대통령. ⓒ연합뉴스

프레시안 : 유신 정권은 어떻게 대응했나.


서중석 :이러한 학생들의 움직임과 관련해 박정희 대통령은 4월 3일 밤 긴급 조치 4호라는 걸 발동했다. 긴급 조치 4호는 민청학련 및 그와 연관된 제 단체를 조직하거나 그것에 가입하거나 연락하거나 그 구성원한테 편의를 제공하는 일체의 행위를 금지했다. 학생들의 투쟁 같은 것을 방송, 보도, 출판 등을 통해 타인에게 알리는 것도 금지했다. 그러면서 위반자가 소속된 학교는 폐교 처분을 할 수 있다고 했다. 또 이 조치를 위반하면 법관의 영장 없이 체포, 구속, 압수, 수배하며 비상군법회의에서 사형, 무기 징역 또는 5년 이상의 유기 징역에 처한다고 돼 있었다.


이처럼 긴급 조치 4호는 사형, 무기 징역까지 때릴 수 있다는 점에서 긴급 조치 1호(최고 형량 징역 15년)보다 형량이 훨씬 무거웠다. 또한 긴급 조치 4호를 어긴 학생이 나오면 그 학교까지 폐쇄하겠다고 한 것도 인상적이었다.

그러면 과연 그런 내용의 긴급 조치 4호까지 선포할 만한 상황이었느냐. 4월 3일 시위에 나선 건 몇 개 대학에서 몇 백 명의 학생뿐이었다. 서울대 문리대에서도 100여 명밖에 안 나왔다고 하지 않았나. 그런 정도의 소수 학생들이 움직였을 뿐이고, 그나마 시위를 제대로 하지도 못하고 경찰에 의해 바로 제압돼버렸다. 그런데 그걸 가지고 그렇게 무시무시한 긴급 조치 4호를 선포한 것이다. 아무리 유신 체제를 수호하기 위해서라고 하지만 이것도 참 이해하기가 힘든 일이다. 그런데 이 사건과 관련해 그것보다 더 관심을 끈 것은 박정희 대통령이 긴급 조치 4호를 선포한 그날 발표한 ‘긴급 조치 제4호 선포를 즈음한 대통령 특별 담화’, 바로 그것이다.

프레시안 : 어떤 면에서 눈길을 끌었다는 것인가.

서중석 : 이건 긴급 조치 4호를 왜 선포했는가를 얘기하는 담화였다. 기니까 그중 일부만 살펴보자. 이 담화에서 박정희는 “이른바 민청학련이라는 불법 단체가 반국가적 불순 세력의 배후 조종 하에 그들과 결탁하여 공산주의자들이 이른바 그들의 인민 혁명을 수행하기 위한 상투적 방편으로 으레 조직하는 소위 통일 전선의 초기 단계적 지하 조직을 우리 사회 일각에 형성하고 반국가적 불순 활동을 전개하기 시작했다는 확증을 포착하기에 이르렀다”고 주장했다. 또한 “(저들은) 민청학련이라는 지하 조직을 결성하여 공산주의자들이 말하는 소위 인민 혁명의 수행을 기도하였던 것이다”라고 하면서 이걸 발본색원하겠다고 밝혔다.

이 담화문은 정말 이상하다. 이 담화문이 나왔을 때 주동 학생들은 거의 다 안 잡힌 상태였다. 그뿐 아니라 잡힌 사람도 중앙정보부에서 아무리 고문을 해도 입을 열지 않을 때였다. 한마디로, 민청학련이라는 이름을 그대로 쓴다면, 민청학련이 어떤 식으로 만들어졌고 뭘 하려고 했는가 등에 대해 그 관련자들의 입을 통해 나온 게 전혀 없는 시점에 특별 담화가 나온 것이다. 그런데도 특별 담화 내용은 아주 구체적이었다, 이 말이다.

“공산주의자들이 (…) 상투적 방편으로 으레 조직하는” 적화 통일을 위한 “통일 전선”을 만들려고 한다, 박 대통령은 이렇게 이야기했다. 그것도 “초기 단계”라고까지 딱 얘기했다. 관련자들의 입을 통해 나온 게 전혀 없는 때였는데 어떻게 이렇게 “초기 단계적 지하 조직”이라고까지 낙인을 찍어놨는지 도무지 이해하기가 어려운 일이다. 또 “인민 혁명 수행”, 이 말을 두 번이나 썼다. 나중에 인혁당 재건위 사건이 생긴다는 점에서 더 이상하다는 느낌을 주기는 하는데, 도대체 학생들이 무슨 인민 혁명을 수행하기 위한 활동을 했느냐, 이 말이다. 학생들이 실제로 어떤 활동을 했는지 앞에서 쭉 설명했지만, 그런 건 전혀 없었다. 그리고 “반국가적 불순 세력의 배후 조종 하에” 이런 일이 일어났다고 했는데, 이것도 뭘 가리키는 것인지 정말 알 수가 없다.

앞에서도 얘기한 것처럼, 사건이 터지기 전 박정희 정권은 이 사건에 관련된 학생들의 움직임을 알고 있는 것 같으면서도 체포하지는 않았다. 이상한 일이었다. 그래서 거기에 관련된 사람들이 당시 “이상하다. 우리를 왜 안 잡지?”, 이런 이야기를 하고 그랬다. 그 점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또 이 무렵 중앙정보부는 대학 내에 프락치를 많이 심어놓았다. 서울대 문리대 같은 경우 더더군다나 많이 심어놓은 상태였다. 학생회장까지 중앙정보부 프락치였다는 의혹이 나중에 신문에 나고 그러지 않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프락치를 비롯한 그 사람들이 알고 있었던 건 그리 자세한 게 아니었다. ‘지금 몇 사람의 선후배가 만나서 여기저기 뛰어다니고 있다’, 그런 정도 이상은 알 수가 없었다. 그런데도 박정희 대통령의 발표 내용은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것이었다. (민청학련 사건이 발생했을 때 서울대 문리대 학생회장이던 사람은 곽성문 전 한나라당 의원이다. 곽 전 의원은 정치권의 대표적인 친박 인사 중 한 명이다. 2008년 총선에서 자유선진당 후보로 출마했을 때에도 “박근혜 지킴이 곽성문”이라는 문구를 새긴 명함을 돌렸을 정도다. 중앙정보부 프락치 의혹은 박근혜 정부 출범 이후인 2014년 곽 전 의원이 한국방송광고진흥공사(코바코) 사장으로 내정됐을 때 크게 논란이 됐다. 당시 민청학련계승사업회는 “중앙정보부 프락치 곽성문 씨의 한국방송광고진흥공사 사장 내정을 규탄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야당에서도 “곽성문 씨가 과거 중앙정보부 프락치였으며 민청학련 사건을 조작하는 데 적극 협조했다는 다수의 증언이 있다”며 내정 철회를 요구했다. 이에 더해 야당은 “곽성문 씨가 중앙정보부 추천으로 MBC에 특채돼 승승장구했다는 증언도 있다”는 의혹도 제기하고, 국회의원이던 2005년 ‘맥주병 투척 사건’을 일으킨 점도 문제라고 지적했다. 곽 전 의원은 프락치 의혹 등을 부인했고, 박근혜 정권 아래에서 코바코 사장으로 취임했다. ‘편집자’)


이철이건 유인태건 이 사건의 주동자로 지목된 사람들은 나중에 국회의원을 3번씩 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을 누가 공산주의자로 보느냐, 이 말이다. 있을 수가 없는 얘기다. 민청학련 사건과 관련해 수사를 받은 학생 중 어느 누구도 여기에 해당될 만한, 공산주의자로 얘기될 만한 게 있을 수 없었다. 그런데도 대통령이 이렇게 발표했다는 건 바로 ‘내 말에 맞춰서 수사해라. 내가 이렇게 구체적인 내용까지 찍어줬으니까 여기에 맞춰서 중앙정보부는 작품을 만들어라’, 이렇게 볼 수밖에 없지 않느냐 하는 생각을 안 갖기가 어렵다. 더군다나 인민 혁명을 수행하기 위해 이런저런 것을 했다고 특별 담화문에 두 번이나 썼다는 것도 정말 이해하기가 어렵다. 어째서 그런 말을 썼는지 알 수가 없다. 이것과 관련해 이해가 안 되는 게 또 있다.

프레시안 : 그게 무엇인가.

서중석 : 대통령 특별 담화가 나온 다음 날(4월 4일) 청와대에서 정부·여당 연석회의를 열었는데, 여기서 박정희가 뭐라고 얘기했느냐 하면 “혹 어떤 사람들은 이번 긴급 조치 4호가 일반적인 학원 사태에 대처하기 위한 편법인 것처럼 오해할지 모르나” 그게 아니라고 했다. 공산주의자들의 소위 통일 전선이라는 걸 봐온 사람이라면 그걸 다 알게 될 것이라고 하면서, 이번 조치는 사회 각계각층, 학원 곳곳에 들어온 공산주의 분자들을 초기 단계에 근절하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당시 <조선일보> 1면에 나온 나용이다.


앞에서 지적한 것과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어떻게 해서 그런 걸 알 수 있었느냐’는 의문을 제기할 수 있는데, 그것보다도 이 정부·여당 연석회의에서 박정희가 한 얘기에는 더 이상한 게 한 가지 있었다. 뭐냐 하면 정부·여당 연석회의가 열리면, ‘지금 학생들이나 뭔가 한다고 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하고 있는지를 중앙정보부장 또는 관계자가 보고하라’고 하고 그 보고를 들으면서 대통령이나 정부·여당 고위층이 질문을 해야 하는 것 아닌가. 그게 일반적인 것인데, 이때는 그게 아니었다. 대통령이 쭉 설명하고 다른 사람들은 듣고 있었다. 이것도 ‘이런 식으로 일을 만들어라’, 이런 것과 연관해서 생각해볼 수 있다. 박정희는 자신이 과거 남로당 프락치였기 때문에 그런 것인지는 몰라도 ‘이런 식으로 사건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에 대해 아주 예민하게 반응했다고 본다. 이 시기 박정희가 보인 모습을 살펴보면 ‘유신 체제를 수호하는 데 이게 약발이 가장 잘 들을 수 있다’는 식의 사고를 가지고 있었던 것 아니냐는, 말하자면 공산주의자들이 지금 크게 뭔가 하고 있다는 식으로 민청학련 사건이라는 것을 엮어가려 했다는 판단이 들게끔 돼 있었다.


역사학자 서중석의 진단

“박근혜는 유신의 허깨비가 결코 아니었다”

“박정희 신드롬, 박근혜가 지울 수도 있다”

“<조선> 말대로면, 이명박·박근혜 정부는 빨갱이”


저항 세력의 상당수마저 혼란에 빠뜨린 유신 정권의 색깔 공세


프레시안 : 그런 식으로 대통령이 전면에 나서서 색깔 공세를 펼 경우 그 진위 여부와 상관없이 적어도 그 시점에는 많은 사람이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것 아닌가. 정권 차원에서 정보를 통제한 사회였기 때문에 더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서중석 : ‘긴급 조치 제4호 선포를 즈음한 대통령 특별 담화’나 4월 4일 연석회의에서 박정희가 발언한 것에는 또 하나 중요한 사항이 담겨 있었다. 그 당시 잡혀온 학생들, 재야인사, 그리고 특히 개신교 쪽이 더 황당했다고 그러는데 당국에서 이 사람들한테 ‘너희들은 몰랐지? 사실은 진짜 공산주의자들이 너희 몰래 다 한 거야. 그자들은 본래 위장해서 활동하는 자들 아니냐’, 이런 이야기를 막 한 것이다. 사실이 전혀 아닌데도 그런 식으로 지어낸 것이다.


당국은 그런 식으로 작업해서 학생들, 그중에는 이른바 주동자급들도 있었는데 그런 최고 주동자들조차도 ‘누군가 배후가 있었던 건가?’ 하며 서로 의심하게 하고 ‘그러면 누가 공산주의자이지?’, 이런 식으로까지 생각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유신에 반대한 사람들 가운데에는 말 그대로 순진하고 순수한 사람들도 있었다. 예컨대 개신교 목회자 같은 사람들은 얼마나 순수했겠나. 그런데 ‘공산주의자들이 당신들을 이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당국에서 분위기를 조성했을 때 그런 순수한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했겠나. 이처럼 당국의 그런 행위는 일반 서민뿐만 아니라 잡혀온 사람들 중 상당수에게도 처음에는 ‘이거 뭔가 이상한데? 우리가 뭔가 잘못됐나 보다’, 이런 식의 사고까지 가질 수 있게 만드는 것이었다. 그런 식으로 일종의 격리 조치를 취하면서 서로 의심하게 만들었다.


‘자진 신고하라. 그러면 죄가 없는 걸로 해주겠다’고 한 점도 그렇지만, 박 대통령의 발언은 운동권이 분열하게 하고 유신 체제에 저항한 사람들을 이간질하고 서로 의심하게 하는 면에서도 효과를 거뒀다. 그 점에서 어떻게 보면 탁월하다고도 얘기할 수 있는 것이지만, 일국의 대통령이 어떻게 그런 식으로 사건을 만들라고 할 수 있느냐고 볼 수도 있다.


하여튼 이때 유신 정권은 국민들에게도 ‘아 이런 무시무시한 민청학련이 다 있네’ 하면서 공포, 두려움에 떨게 했을 뿐만 아니라 감옥에 들어온 대부분의 학생, 종교인, 재야인사 같은 사람들도 그런 두려움을 갖게 만들었다. 전체 내용을 잘 아는 극소수를 제외한 나머지는 다 떨었다. 그때 감옥소 안에서 나도 그런 모습을 많이 봤다.


그런데 민청학련 사건은 그것으로 끝난 게 아니라 나중에 인혁당 재건위 사건으로 비화됐다. 그러면서 이른바 인혁당 재건위가 민청학련의 상위 조직으로 또 조작되면서 나중에 8명이 처형당하기까지 하는 정말 끔찍한, 문명 국가에서는 도무지 있을 수 없는 수치스러운 일이 일어나게 된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백쉰한 번째 편도 조만간 발행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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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덕련 전 기자


<2016-03-17> 프레시안


☞기사원문: 박정희 독재 비판하면 빨갱이? 이상한 낙인 찍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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