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159> 유신 체제, 열다섯 번째 마당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법이다. 사회 전반의 분위기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른바 진보 세력 안에서도 부박한 담론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역사를 깊이 있게 이해하는 것이 절실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러한 생각으로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를 이어간다.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은 한국 현대사 연구를 상징하는 인물로 꼽힌다. 매달 서 이사장을 찾아가 한국 현대사에 관한 생각을 듣고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열두 번째 이야기 주제는 유신 체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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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신 체제, 열네 번째 마당] ‘정치 9단’ YS 속인 박정희의 눈물 어린 거짓말
프레시안 : 긴급 조치 9호를 선포한 다음 해인 1976년 포항 석유설이 세간의 관심을 모았다.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포항 석유설 문제를 찬찬히 되짚었으면 한다.
서중석 : 1975년에는 인도차이나 사태 이후 총력 안보 체제라는 게 아주 강고하게 자리를 잡았다면, 1976년에는 대통령이 포항에서 석유가 나왔다고 얘기한 것이 유신 체제를 굳건히 다지는 데 역할을 하게 된다. 그 발표에 상당히 오랫동안 온 국민이 들뜰 수밖에 없었고, 그건 결국 유신에 반대하는 움직임 같은 걸 가능치 않게 했다.
그런데 이 포항 석유설은 명백히 박정희 대통령이 국민에게 거짓말을 한 것이다. 포항에서 경제성 있는 석유가 나온 뚜렷한 증거가 없었는데도 질이 좋은 석유가 나왔다고 발표해버렸다. 그러면서 온 국민을 그렇게 뜨겁게 달군 것이다. 유신 체제 유지에서 포항 석유설이 아주 중요한 작용을 했는데 이제 그걸 살펴보자.
프레시안 : 포항 석유설 문제는 어떻게 불거졌나.
서중석 : 포항 석유설 문제는 당시 청와대 경제 제2수석비서관으로 중화학 정책, 에너지 정책을 총괄했던 오원철의 저서를 중심으로 살펴보는 게 좋을 것 같다. 포항에 유전이 있다는 이야기가 1960년대에도 나돌았는데, 1966년 정부에서 무임소 장관을 위원장으로 하는 조사단을 구성했다. 조사단은 ‘지질학적으로 경제성 있는 가스나 석유 부지는 없다고 본다. 그렇지만 구멍을 한 번 뚫어보는 건 바람직하다’, 이런 결론을 내렸다. 그런데 여기서 석유는 안 나왔다. 그래서 조사단에서는 포항에는 가스를 포함해 유전은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모든 지질학자가 석유는 없다고 봤다고 오원철은 썼다. 그래서 시추 작업을 끝내기로 한 것이다.
그런데 1975년 4월에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중앙정보부 국장을 단장으로 한 특별 석유 탐사단이 발족했다. “남자를 여자로 바꾸는 것 빼고는 다 하고 있다”는 얘기를 듣던 중앙정보부가 축구단도 만들고 하는 일은 있지만, 도대체 석유 탐사 또는 시추를 중앙정보부가 맡아서 한다는 건 너무나 이상한 일 아닌가. 전문적으로 해야 하는 작업이고 부처로 봐도 상공부 같은 데도 있는데 어떻게 중앙정보부가 이걸 하게 됐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오원철은 이 탐사단이 어떤 경위로 생기게 됐는지 알지 못한다고 써놓았다.
하여튼 1975년 5월부터 시추를 해나갔다. 지하 1475미터까지 내려갔는데, 현장에 무슨 시커먼 기름 같은 것이 떠 있어서 그걸 링거병 몇 개에 넣었다고 한다. 지질학자 곽영훈 박사는 이것이 지질학적으로 불가능한 곳에서 나왔고 그것도 양이 10리터 정도로 끝난 건 이상하다고 했다고 한다. 당연히 이상하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에 의뢰해 분석했는데, KIST에서는 분석 결과만 제시했지 원유 여부 판단은 하지 않았다고 얘기하고 있다.
포항 석유라며 청와대에 올라간 물질, 분석해보니 원유 아닌 경유
프레시안 : 이 시기에 박정희 대통령은 어떤 모습을 보였나.
서중석 : 현장에서 원유가 나왔다는 보고가 올라온 직후인 1975년 12월 5일 박 대통령이 오원철을 불렀다. “포항에서 석유가 나왔대. 이걸 보게.” 그러면서 시커먼 액체가 들어 있는 링거병만 한 약병을 보여주면서 성냥에 불을 붙였다. 그런데 불을 붙인 순간 오원철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저 기름은 원유가 아니다’, 이걸 직감적으로 느꼈다고 한다.
그렇다면 정말 이상한 것이, 시추 현장에 있던 전문가들은 왜 그 판단을 못했는가 하는 것이다. 오원철은 ‘저건 원유가 아니다’라고 직감적으로 느꼈는데, 도대체 전문가들은 뭘 했느냐는 것이다. 그리고 KIST에서 원유 여부 판단은 하지 않았다고 하지만 분석 결과를 보면 ‘원유가 아닌 것 같다’고 돼 있었는데 어떻게 해서 박 대통령은 이걸 석유라고 이야기하고 있느냐, 이 말이다. 그렇다면 중앙정보부가 이상한 또는 불확실한 보고를 한 것 아니냐고 볼 수밖에 없는데 이처럼 굉장히 중요한 문제에 대해 어떻게 그런 보고를 할 수 있느냐, 이 말이다. 중앙정보부가 만일 KIST 분석 결과를 잘 모르겠으면 다시 조사해보면 되는 것 아닌가.
중앙정보부에서 억울한 죽음을 맞은 서울대 법대 최종길 교수의 동생 최종선이 중앙정보부 직원이지 않았나. 최종선이 쓴 글을 보면, 중앙정보부 특명수사국이 ‘포항 앞바다에서 석유가 나올 수 없다’는 학문적 견해를 전개해온 지질학자 등을 언론으로부터 차단하고 입 다물게 하기 위해 며칠씩이나 잡아두고 겁을 주고 각서를 쓰게 했다고 돼 있다. 내가 얘기하려는 건 중앙정보부가 한 이런 일들이 정말 이상하다는 것이다. 포항 석유 문제와 관련해 이상한 일이 참 많이 일어났다.
하여튼 원유가 아니라고 직감적으로 느낀 오원철은 대통령한테 “각하, 그 기름을 분석해보겠습니다”라고 이야기했다. 오원철이 자기 방에 있는 김광모 비서관에게 그걸 보여줬더니 김 비서관은 “또 엉터리 보고를 했구만요”, 이렇게 얘기했다고 한다. 도대체 오원철이나 김광모가 이렇게 간단하게 ‘이건 문제가 있다’고 얘기하는데 중앙정보부 같은 거대 기구에서 그것조차 판단하지 못했다? 거듭 이야기하지만 이건 정말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프레시안 : 분석 결과는 어떠했나.
서중석 : 미국 칼텍스 쪽으로 보내서 그걸 시험하게 했다. 분석 결과 이건 원유가 아니라 경유라는 판정이 나왔다. 이와 관련해 시추 작업에서 경유가 쓰였다는 점을 생각해볼 수 있다. 시추할 때 경유를 윤활 목적으로 사용한 건 사실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시추 전문가들이 그걸 판단하지 못했다? 오원철은 직감적으로 이건 원유가 아니라고 느꼈는데도? 정말 의아스러운 일 아닌가.
오원철은 김정렴 비서실장한테 ‘이건 경유다’라고 보고했다. 그러자 김 실장이 “오 수석 보고에 의하면 이건 원유가 아니라고 합니다”라고 하면서 오 수석에게 직접 보고하라고 했다. 그래서 오원철은 그대로 설명했다. 그러자 박 대통령은 중앙정보부장을 당장 불러오라고 했다. 청와대 기록을 보면 이런 식으로 진행된 일이 참 많다. 어쨌건 신직수 중앙정보부장이 달려왔다. “이거 원유가 아니라며?”, 박 대통령이 꾸짖는 어조로 이렇게 얘기했다고 한다.
난 이 대목에서 또 의문이 든다. 뭐냐 하면, 포항 석유설 문제는 굉장히 중요한 일 아닌가. 역사를 살펴보면, 특히 아주 중요한 사항의 경우 독재자는 정확히 보고받는 걸 원칙으로 한다. 그렇지 않겠나. 잘못된 보고를 받으면 큰일 나는 것 아닌가. 거짓인지 진실인지 독재자 자신은 알아야 하는 것 아닌가. 원유가 아닌 것을 중앙정보부에서 대통령에게 갖다 줬다면, 만일 신직수 중앙정보부장이 대통령을 속인 것이라면 이건 굉장히 큰 문제이기 때문에 대통령은 중앙정보부장을 갈아치우거나 잘못에 상응하는 중벌을 내려야 하는 것이었다. 그렇지 않나. 그런데 신직수가 중앙정보부장에서 물러나는 건 나중에 일어나는 다른 사건, 그러니까 미국에서 활동하던 중앙정보부 요원 김상근이 미국에 망명한 사건 때문이다. 포항 석유설 문제와 관련해 이 부분도 이해하기 어려운 지점이다. (김상근은 1976년 11월에 망명했다. 그다음 달인 12월 초, 중앙정보부장은 신직수에서 김재규로 바뀌었다. 포항 시추 작업은 신직수 해임 이후인 1977년 상반기에도 계속됐다. ‘편집자’)
하여튼 대통령이 신직수 중앙정보부장을 부른 자리에서 오원철은 그게 원유가 아니라 경유라는 걸 중앙정보부장한테 명확하게 얘기했다. 상황이 이렇게까지 됐으면, 대통령이 포항에서 석유가 나왔다는 얘기를 기자 회견에서 하지 말아야 하는 것 아닌가. 다른 글을 보면 김정렴하고 오원철은 기자 회견에서 이 얘기를 안 하는 게 좋겠다고 건의까지 했다. 그렇지만 대통령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1976년 1월 15일 대통령의 연두 기자 회견이 열리는데, 이때 기자들은 포항에서 석유가 나왔다는 소문에 대해 묻는다. 그런 소문의 진위를 확인하는 건 당연한 일 아닌가. 내가 이 부분을 왜 중시하느냐 하면, 그때 소문이 아주 많이 퍼져 있었기 때문이다.
공식 발표 전에 이미 세간에 쫙 퍼진 포항 석유설
프레시안 : 어느 정도 퍼져 있었나.
서중석 : 이 얘기가 많이 퍼질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짐작케 하는 일화가 강준만 책에 나온다. 뭐냐 하면, 박정희가 신문사 사장들을 모아놓은 자리에서 이벤트를 벌였다. 석유가 든 병이라며 뚜껑을 열고 냄새를 맡은 다음에 사장들한테 돌렸다. 신문사 사장들이 석유 문제에 대해 뭘 알았겠나. 다들 끄떡끄떡하는 분위기였는데, 조선일보 사장 방우영은 손가락으로 찍어서 맛을 봤다. 그러자 박정희가 “어때, 진짜 냄새 나?”, 이렇게 물었고 방우영은 “정말 진짜 같다”고 대답했다. 그랬더니만 며칠 후 김성진 문공부 장관이 전화를 걸어서, 1년 가까이 보류한 윤전기 도입을 대통령이 결재했다는 소식을 방 사장한테 전했다고 한다. 참, 웃어야 하는 건지….
내가 1976년 1월 2일 서울대 국사학과 김철준, 변태섭 교수에게 세배를 갔었다. 학교에서는 쫓겨났지만 세배를 갔는데, 변 교수 집에서 이 얘기가 나왔다. 그만큼 얘기가 많이 퍼져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내가 이 문제에 대해 설명했는데, 그에 앞서 야당의 한 중진한테도 이 문제에 대해 얘기한 적이 있었다. 박정희가 신문사 사장들을 모아놓고 한 것하고 비슷한 식으로 야당의 한 중진이 얘기하는 걸 듣고 내가 그 중진한테 “그거 믿을 수 없습니다”, 이런 얘기를 했었다. 그렇게 이야기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어느 신문사에서 일하던 경제부 기자한테 그전에 들은 게 있었기 때문이다. 그 기자는 “포항 석유설 소문이 퍼지고 있는데 포항 근처에서 소량의 석유는 나올 수 있지만”, 그 사람도 그렇게 얘기하더라, “경제성이 전혀 없는 것이기 때문에 정치적 쇼로 그걸 이용할 가능성이 많다”, 이렇게 얘기했다.
하여튼 이런 일들이 있었는데, 변 교수에게 세배할 때 여러 후배들이 있는 자리에서 그 이야기가 또 나와서 내가 설명하게 된 것이다. “저도 그 소문은 들었습니다. 그런데 야당 중진한테도 그게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있다고 제가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리고 이건 정치적으로 이용당할 가능성이 있지 않습니까. 왜 이렇게 소문이 많이 돌고 있는 건지 의심스럽습니다”, 그때 이런 이야기를 했다. (포항 석유설 문제를 취재해 1980년대에 장문의 기사를 쓴 조갑제는 이 부분에 대해 이렇게 썼다. “박 대통령이 (1976년) 연두 기자 회견에서 석유 발견 소문을 사실이라고 확인하기까지의 46일간 이 루머는 전국에 퍼져갔다. 전파의 주된 진원지는 대통령과 총리였던 것 같다. 대통령은 경제계 대표, 장관들, 그리고 박순천 여사 등 내방객들에게 기름을 보여주며 자랑했다. 총리는 국회의원, 기자들에게 ‘도저히 혼자만 알고 있을 수 없는 이 소식’을 귀띔했다. 박근혜 양까지 연말 기자 회견에서 ‘새해엔 기름이 콸콸 쏟아졌으면…’ 하는 암시적 발언을 하기도 했다.” ‘편집자’)
‘원유 아니다’ 보고받고도 ‘질 좋은 석유 나왔다’고 발표한 박정희
프레시안 :
1976년 1월 15일 연두 기자 회견에서 대통령은 포항 석유설 문제에 대해 뭐라고 얘기했나.
서중석 : 포항에서 질 좋은 석유가 나왔다는 항간의 소문이 사실입니까, 기자가 이렇게 질문했다. 이 부분에 대해 우선 오원철이 어떻게 썼는지 보자. 박 대통령은 “사실입니다”라고만 답변했다고 돼 있다. “양이 얼마나 나왔습니까” 하는 질문에 “한두 드럼 나왔습니다. 정부는 외국 전문가들을 불러 경제성을 조사하고 있으니 국민들은 차분하게 기다려주시오”, 이렇게 답변했다고 오원철은 썼다. 그러면서 덧붙인 것이, 원유가 한두 드럼 나왔으면 이건 유전 발견이 아니라고 명백하게 썼다. 원유가 나오려면 상당량이 나와야지 아무리 소량이라고 해도 한두 드럼만 나오는 게 어디 있느냐, 그런 유전은 세상에 없다는 것이었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오원철이 정확하게 썼는데, 다만 박 대통령이 기자 질문에 답변한 내용이라고 오원철이 쓴 부분은 박정희가 실제 답변한 것과는 좀 차이가 있어 보인다. 박 대통령 연설문집 13권, 대통령 비서실에서 간행한 이 책에서 1976년 1월 15일에 해당하는 대목을 보면, 마지막으로 기자가 “요즘 항간에도 포항 지구에서 석유가 나온다는 말이 많이 퍼져 있습니다. 그래서 국민들이 새해 벽두부터 많은 기대와 흥분으로 지금 들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물었다. 거듭 얘기하지만 석유가 나오지도 않았는데 왜 그렇게 소문이 많이 돌았느냐, 이 점을 깊이 생각할 필요가 있다. 어떤 의도를 가지고 계속 퍼트리는 쪽이 있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 이 말이다.
그러자 박정희가 뭐라고 답변했느냐. “지난 연말 12월 초로 기억하는데 영일만 부근에서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석유가 발견된 것은 사실입니다. 우리나라 기술진에 의해서 오랜 탐사 끝에 서너 개의 공혈을 시추한 결과 그중 한 군데에서 가스와 석유를 발견했습니다.” 석유뿐만 아니라 가스까지 나온다는 얘기다. “물론 나온 양은 소량이지만”, 이 말을 붙였다.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발견된 것입니다. 그것도 지하 약 1500미터 부근에서 석유가 발견된 것입니다. 몇 드럼 정도 나왔는데”, 오원철 글에서는 한두 드럼이라고 했지만 여기에는 몇 드럼 정도라고 돼 있는데, “이것을 가져다가 KIST에서 여러 가지 성분을 분석한 결과 질이 매우 좋은 석유라고 판명되었습니다. 이것은 우리로서는 매우 반가운 소식이고 고무적인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렇게 하면서 “처음으로 석유가 나왔다는 그 자체가 나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대단히 궁금하시겠지만 기술자들에 의해 조사가 끝날 때까지 앞으로 4~5개월 동안 지켜보는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얘기했다.
내가 이 답변을 보고 놀란 것은 ‘사실이다’, ‘사실이다’ 하는 걸 계속해서, 무려 다섯 번이나 얘기했다는 점이다. 한 번쯤 얘기했다면 다른 뉘앙스로 받아들일 수도 있겠지만 다섯 번이나 얘기하니까, ‘소량이 나왔다’는 말을 덧붙이긴 했고 ‘앞으로 결과를 더 기다려봐야 한다’는 얘기를 하기도 했지만, 이걸 듣는 사람으로서는 ‘대통령이 이렇게까지 말하는 걸 보면 이건 정말 나오는 건 확실하다’, 이런 생각을 안 갖게 할 수 없게 한 답변이었다. 더 심한 거짓말은 “KIST에서 여러 가지 성분을 분석한 결과 질이 매우 좋은 석유라고 판명되었습니다”라고 한 것이다. 이런 터무니없는 말까지 덧붙였다. 오원철 책 어디에도 이런 대목은 안 나온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KIST에서는 분석 결과만 제시했지 원유 여부 판단은 하지 않은 것으로 돼 있을 뿐만 아니라 칼텍스에서 분석한 결과 원유가 아니라 경유라는 판정이 나왔고 그에 관한 보고까지 대통령에게 했는데도 대통령이 그런 식으로 이야기한 것이다. 오원철 책을 보면 이건 명백한 거짓말인데, 어떻게 대통령이 이렇게 거짓을 얘기할 수 있는 건가.
되짚어보면, 박정희는 5·16쿠데타 때 내건 ‘혁명 공약’을 어겼다. 민정 이양 과정에서도 1963년 2·18 성명, 2·27 선서 등을 통해 국민 앞에 선언까지 해놓고 여러 차례 말을 뒤집었다. 그리고 한 번만 더 대통령을 하겠다며 1969년 3선 개헌을 강행해놓고는 그걸 지키지 않았고, 1971년 대선 때는 장충단 유세에서 “나에게 마지막이 될 이번 선거에서 다시 한 번 신임해준다면 유능한 후계 인물을 육성하겠다”고 공언했지만 이 말도 지키지 않았다. 이런 것들도 모두 있을 수 없는 일이긴 하지만, 내가 생각하기에는 ‘포항에서 질이 좋은 석유가 나왔다’고 발표한 건 그런 것들하고도 다르다. 분석 결과 너무나 명백하게 원유가 아니라고 했는데도, 발표를 그렇게 한 것 아닌가.
유신 반대 움직임에 찬물 끼얹은 대통령의 포항 석유 발언
프레시안 : 석유가 나왔다는 대통령 발표에 대한 반응은 어떠했나.
서중석 : 그때 신문 보도를 보면 정말 굉장했다. 국민들은 1972년 7·4남북공동성명 이후 최대의 환호작약이라고 할까, ‘우리도 이제 잘살게 됐다’는 큰 희망을 품게 됐고 분위기가 굉장히 들떴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박 대통령 연두 기자 회견에도 나온다. 뭐냐 하면, 박 대통령이 ‘작년에 우리가 석유 파동, 원자재 파동으로 큰 경제적 시련을 겪었다’고 한 대목이다. 한국은 석유 한 방울 안 나는 나라 아닌가. 1973년 제1차 석유 파동이 나면서 1974년, 1975년에 한국인들이 고생을 많이 했다. 그렇기 때문에 ‘석유만 있으면 이제 우리는 정말 잘살게 되는 것 아니냐’, 이런 생각을 가질 수 있었다.
박 대통령은 연두 기자 회견에서 이런 말도 했다. “작년의 도매 물가 상승률은 당초 목표인 20퍼센트 선을 겨우 유지해서 20.2퍼센트였다. 이는 상당히 높은 상승률이나 재작년의 44.6퍼센트에 비하면 절반 이하 수준이다.” 무지무지한 물가다. 이렇게 높은 물가 상승률이 우리나라에도 있었다는 걸 지금 사람들은 대부분 상상도 못할 것이다.
당시 사람들이 힘들고 답답하던 때였다. 그런데 어느 나라든 석유만 나오면 ‘떼부자’ 된다는 소문이 퍼져 있을 때이기도 했다. 1973년 석유 파동 이후 중동 국가들이 갑자기 부자가 되지 않았나. 그래서 한국인이 1975년 무렵부터 중동으로 막 가게 되는 것 아닌가. 이 회견이 열린 때는 1976년이다. 물가 때문에도 그렇고 여러 가지로 힘들게 살고 있었고, 그래서 석유만 나오면 문제가 다 해결되는 것으로 많은 사람이 생각할 수밖에 없던 때였다. 그렇기 때문에도 이즈음 신문을 보면 여러 신문에서 포항 석유 문제에 굉장한 열기를 보였고, 주식 시장에서도 그랬다. 그러면서 ‘이제 세금을 안 내도 되는 시대가 온다. 학생들은 학비도 안 내도 된다. 60억 배럴쯤 매장돼 있을 것이다’, 별의별 이야기가 당시 다 돌았다.
프레시안 : 박정희 대통령은 이때 왜 그런 식으로 포항 석유 발표를 한 것인가. 분석 결과 원유가 아니라는 보고를 사전에 받지 않았나. 설령 그런 보고가 없었다고 하더라도 대통령 본인이 말한 것처럼 “기술자들에 의해 조사가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확실한 조사 결과가 나온 후 발표하는 게 기본 아닌가.
서중석 : 어떻게 해서 이런 사태가 일어났느냐. 1975년 인도차이나 사태와 총력 안보 운동을 통해 박 대통령은 유신 체제 안정이라는 기적적인 효과를 거두지 않았나. 1976년에는 포항 석유에 대한 1월 15일 발언이 바로 그러한 역할을 다시 했다고 난 본다. 박 대통령은 정치적으로 그런 부분에 대해 상당히 명석한 사람이었다. 그 부분을 떠나서는 대통령의 1월 15일 석유 발언을 해석하기가 아주 어렵다. 박정희 정권 기준으로 보면 1975년은 인도차이나 사태로 유신 체제가 평온하게 됐고 1976년, 그중에서 적어도 전반기는 이 석유 발언으로 평온하지 않았느냐고 볼 수 있다. 그 정도로 포항 석유 발언은 유신 반대 움직임을 잠재우는 데 대단히 위력적이었다.
오원철 기록에는 1976년 여름 박 대통령이 진해에서, 그때까지 들뜬 분위기가 심하니까 과열된 분위기를 가라앉히기로 했다고 돼 있다. 그래서 기자들한테 ‘아직 경제성이 확인되지 않았다’고 밝혔다고 돼 있다. 이 부분도 정확하게 쓴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지 않느냐 하는 생각이 든다. 박 대통령 연설문집에는 이렇게 돼 있다. “석유 탐사 작업의 진척도는 어떻습니까?” 기자가 이렇게 질문하니까 “그동안 몇 군데 탐사와 시추를 해왔는데 기름이 조금씩 나오긴 했지만 아직까지 만족스러운 결과는 못 됩니다”, 박 대통령은 이렇게 얘기했다.
▲ 석유가 나왔다는 박정희 대통령의 발표에 환호하는 시민들 반응을 전한 경향신문 1976년 1월 15일 자 7면. ⓒ경향신문 화면 갈무리 |
포항 석유설에 이어 전국을 들썩인 새로운 수도 건설 계획
프레시안 : 석유를 발견했다는 발표로 1976년 온 나라를 떠들썩하게 했던 청와대는 이듬해인 1977년 다시 전국을 들썩이는 발표를 한다. 수도 이전 문제다. 이 문제는 어떻게 해서 수면 위로 떠오르게 되나.
서중석 : 1977년 2월 10일 서울특별시 연두 순시 석상에서 박정희 대통령은 서울시 인구 억제 얘기를 꺼내면서 이렇게 말했다. “2~3년 전부터 내가 구상하고 있는 것은 수도의 인구는 여러 가지 정책을 써서 강력히 밀어야 되겠지만”, 이건 수도 인구 소산책을 가리키는 것인데, “결국은 우리가 통일이 될 때까지 임시 행정 수도를 어디 다른 곳으로 옮겨야 되겠다 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서울에서 한 시간, 길어도 한 시간 반 정도면 오갈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인구 몇 십만 정도 되는 새로운 수도를 만들자는 생각이다”라고 발표했다.
이 부분과 관련해서는 서울시에서 1970년부터 1977년까지 도시계획국장 같은 직책을 맡았고 그러면서 서울시립대 교수가 된 손정목 교수가 써놓은 것을 중심으로 이야기하려 한다. 박 대통령이 연두 순시에서 이렇게 얘기하자 또 전국이 들뜨기 시작했다. 신문도 굉장히 크게 다뤘다. 수도를 바꾼다는 것, 서울이 수도가 된 지 600년이 다 돼가고 있었는데 그걸 바꾼다는 건 얼마나 큰 뉴스인가. 굉장한 뉴스였다. 물론 포항 석유설보다는 국민들이 흥분하는 건 조금 적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포항 석유설의 경우 석유가 안 나오는 게 분명한데도 박 대통령이 ‘나온다’는 얘기를 다섯 번이나, 더욱이 KIST에서 분석한 결과 질이 매우 좋은 석유라고 판명됐다고까지 한 건 유신 체제 수호와 연결돼 있다는 점을 생각해볼 수 있지만, 수도 문제에 관한 이날 발언은 그렇지는 않았다고 본다. 왜냐하면 수도 이전 필요성에 대한 이야기는 그전부터 몇 차례 있었다. 1975년 8월에도 대통령은 진해에서 ‘절대로 발설하지 말라’고 하면서 수도 이전 필요성을 기자들한테 이야기했다. 어쨌든 서울 인구가 700만으로 늘어난 상황이었다. 너무 많았다. 지금은 1000만도 별것 아닌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그 당시 700만은 그것과 달랐다. 그렇지만 그때 나는 수도를 옮기는 건 그렇게 쉽지 않을 것이라고 여러 친구, 선후배들에게 이야기했다.
프레시안 : 그렇게 판단한 근거는 무엇인가.
서중석 : 왜 그런 주장을 했느냐.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남한이 북한에 대해 우월성을 주장할 수 있는 건, 다른 것도 생각해볼 수 있지만 크게 두 가지 부분이 확실하다고 봤다. 하나는 남쪽이 인구가 2배라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1948년에 만들어진 북한 헌법 103조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수부는 서울시다”, 이렇게 명백하게 해놓은 것처럼 서울이 어느 쪽에 속했느냐는 건 굉장히 중요한 문제라는 점이다. 남북 관계에서 서울이 대한민국에 있다는 건 중요한 사안이다. 그런 점에서도 수도 이전은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이런 역사적인 문제, 남북 대결 문제 등 여러 가지가 다 들어 있다.
그리고 북한에서 기습 남침을 할 경우 엄청난 사태가 일어날 수 있으니까 수도를 옮겨야 한다는 이야기가 당시 많이 돌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서울의 대부분은 한강 이북이지 않았나. 그런데 그것에 대해서는 손정목 교수 얘기를 참고할 만하다. 손 교수는 이렇게 얘기했다. “다행이었던 것은 여러 가지 정보를 종합해서 볼 때 이북이 당장에 남침해올 태세에 있지 않다는 점이다.” 수도 이전을 한다고 할 때 그랬다는 것이다. “당장에는 북한에 그런 능력이 없음을 명백하게 알 수 있었다”고 손 교수는 얘기했다. 그리고 박정희 정권이 수도 이전 필요성을 거론할 때 이 문제 때문에 수도를 옮겨야 한다는 얘기는 별로 안 했다. 북한의 남침 때문에 수도를 옮겨야 한다고 하면 그건 또 하나의 비상사태 내지 공포감을 유발할 수도 있는 것 아닌가.
그다음에 정부에서 제시한 임시 행정 수도 건설 방안은 적극적인 서울 인구 소산책으로 보기 어렵다는 점을 생각할 필요가 있다. 서울에 인구가 이렇게 집중한 것은 전에 경부고속도로를 얘기할 때도 말한 것처럼 도로, 교통망 같은 게 모두 서울로 집중돼 있기 때문이다. 경제 기구를 봐도 1990년대 이후 그 일부를 분산시켰지만, 1977년 이때까지는 주요 기업들의 본사가 거의 다 서울에 있었다. 의료 기관만 해도 지금까지도 중요한 것, 좋은 것은 다 서울에 몰려 있지 않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문화 시설이 다 서울에 있다. 그중 제일 중요한 게, 이른바 일류대라고 하는 게 서울에 다 몰려 있다는 것이다.
오늘날 세종시를 행정 중심 복합 도시로 만들어 정부 기관 상당수를 그쪽으로 옮겼지만, 물론 이건 1977년에 이야기한 수도 이전이라고 할 만한 건 아니지만, 하여튼 세종시를 그렇게 만든 것은 서울 인구 소산책이 전혀 아니라고 모든 사람이 보고 있지 않나. 그것하고 똑같다. 행정 수도를 만들어 서울을 옮긴다고 하더라도 이런 경제, 의료, 도로 및 교통, 이른바 일류대 문제 같은 것들이 동시에 수반돼 처리되지 않으면 인구 소산책으로서 제 역할을 할 수 없다. 그런데 박 대통령이 이런 여러 가지를 종합적으로 고려하면서 얘기한 건 아니었다.
역사학자 서중석의 진단
☞ “박근혜는 유신의 허깨비가 결코 아니었다”
☞ “박정희 신드롬, 박근혜가 지울 수도 있다”
☞ “<조선> 말대로면, 이명박·박근혜 정부는 빨갱이”
‘원유 아니다’ 보고받고도 ‘질 좋은 석유 나왔다’고 발표한 박정희
프레시안 :
임시 행정 수도 건설 계획, 어떻게 진행됐나.
서중석 : 나중에 제1 무임소 장관실에서 수도권 인구 문제를 맡으면서 수도권 인구 정책 조정실이라는 기구가 있게 되는데, 임시 행정 수도 백지 계획 담당자가 중화학공업추진위원회 기획단 단장 오원철로 결정됐다. 이 사람은 일을 아주 열심히 하는 사람 아니었나. 그리고 1977년 7월에는 임시 행정 수도 건설을 위한 특별 조치법이 나왔다. 그래서 국제 세미나 같은 것도 열고 하면서 행정 수도 건설을 위한 백지 계획안이라는 걸 1977년 12월 6일 대통령한테 오원철 수석이 보고했다. 그런데 그것에 대한 대통령 답변이 참 이상했다. 뭐냐 하면 “수고 많이 했어. 앞으로 연구를 더 계속하여 더욱 충실한 내용이 되도록 하라”, 이렇게 지시했다.
이것에 대해 손정목 교수는 이렇게 썼다. “오원철 수석을 비롯한 기획단 직원들의 분위기는 착 가라앉았다. 앞으로 연구를 더 계속하여 더욱 충실한 내용이 되도록 하라는 대통령 지시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지금까지 연구를 다 해서 내놓은 건데 무엇을, 어떻게 더 연구해서 어떻게 발전시킬 것인가에 관한 자신이 서지 않았던 것이다.” 나는 이때 박 대통령 답변이 애매모호했다고 본다. 다시 말해서 강한 의지를 가지고 있었던 건 아니지 않느냐, 그렇게 볼 수 있는 답변이다.
그런데 바로 이 1977년에 또 하나의 문제가 생겼다. 뭐냐 하면 과천에 정부 제2청사를 짓고 그 일대에 신도시를 건설한다는 결정이 1977년에 내려졌다고 손정목 책에는 나와 있다. 그러면서 신도시 건설 업무를 관장하는 것에 대해 건설부 장관하고 총무처 장관한테 지시를 내렸다. 이건 뭘 얘기하느냐 하면, 1977년 과천에 신도시를 건설하겠다고 결정한 건 당분간 행정 수도를 옮길 필요가 없다는 것을 뜻한다. 중앙일보 김진 기자가 쓴 글을 보면, 그렇기 때문에도 행정 수도 계획안을 세운 사람들은 과천에 정부 제2청사를 짓는 것을 마땅치 않게 생각한 것으로 나와 있다.
그렇지만 행정 수도 건설 계획 작업은 그 후에도 계속됐다. 그 결과 황용주, 강홍빈 팀이 작성한 행정 수도 건설을 위한 종합 보고서가 1979년 5월 14일, 10·26 나기 5개월 전인 이때 대통령에게 보고됐다. 손정목 교수는 자신의 책에서 이 종합 보고서에 대해 더 이상 구체적인 언급을 하지는 않고, 당시 경제가 나빴기 때문에 행정 수도 건설을 추진할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는 것으로 정리했다. 김진 기자가 어떤 사람이라는 것은 언론계에서 대개 다 알고 있는 사항인데, 그 김진 기자가 쓴 책에는 이렇게 돼 있다. “김정렴, 오원철 등은 ’10·26이 없었더라면 지금쯤 신수도가 들어섰을 것이다’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두 사람 말이 반드시 맞는 것 같지는 않다. 1979년 들어 국가 경영 기력이 부쩍 쇠잔해져 박 대통령 자신이 주춤했다는 증언이 있다.” 그러면서 기획단 관계자가 한 얘기가 실려 있다. “분명히 계획이 유보되는 분위기였어요. 기획단은 신수도를 생각해 과천 청사 건립을 반대했지만 결국 강행됐잖아요”, 이렇게 답변했다. 그러니까 손정목 교수가 쓴 것하고 비슷한 얘기를 한 것이다.
프레시안 : 백지 계획이라는 표현대로 행정 수도 건설 지역을 미리 정하지 않은 상태에서 계획을 추진했지만, 후보지로 거론되던 지역들은 있었다. 행정 수도 건설 계획 발표 후 그 지역들은 어떤 영향을 받았나.
서중석 : 박 대통령이 얘기한 것에 의하면 충청도 어딘가에 행정 수도가 세워질 것이 아니냐고 했는데, 박 대통령의 연두 순시 발언이 끝난 직후, 즉 대통령 발표 후 대전, 청주, 공주 등지의 땅값은 순식간에 수 배 또는 수십 배씩 치솟았다고 한다고 손정목 교수 책에 쓰여 있다. 무슨 이야기냐 하면, 그전에 이미 부동산 투기 문제가 심각한 상태로 접어들었지만 특히 1978년이 우리나라 부동산 역사에서 최고로 부동산 투기가 심했던 해에 들어간다. 통계청에서 낸 자료에서 지가 상승 상황을 보면 1975년, 1976년에는 그 전해에 비해 27퍼센트에서 28퍼센트가 올랐다. 이 두 해에도 많이 오른 것이다. 그런데 임시 행정 수도 건설을 발표한 1977년에는 33퍼센트가 올랐고 1978년에는 49퍼센트가 올랐다.
이처럼 1977년, 1978년에 땅값이 굉장히 많이 올랐는데 이렇게 된 데에 수도 이전설의 영향이 없었을까? 그 당시 신문, 잡지에 나와 있는 내용을 살펴보면 영향이 상당히 있지 않았느냐고 난 본다. 충청도에서 계속 투기업자들이 돌아다닌다는 얘기가 상당히 오랫동안 나오더라. 전국 지가 상승률을 더 높이는 데 수도 이전설은 그해에만 영향을 끼친 게 아니라고 본다. 어쨌건 사람들의 관심이 새로운 수도 건설 문제에 쏠려 있었고, 그런 점에서 수도 이전설은 유신 체제를 안정화하는 데 기여한 면이 있지 않느냐는 생각을 갖게 한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백예순 번째 편도 조만간 발행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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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덕련 전 기자
<2016-04-17> 프레시안
☞기사원문: 박정희 “포항서 석유 나왔다”…박근혜도 “기름이 콸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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