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쟁점으로 풀어보는 한국사’ 5강, 민족문제연구소 이준식 연구위원 강연
온고재, 인천민주평화인권센터, 인하대박물관 등이 공동주최하는 ‘쟁점으로 풀어보는 한국사’ 강의 제5강이 4월28일 오후 7시 부평아트센터 세미나실에서 열렸다.
지난주 ‘일제 식민사관과 뉴라이트 식민지 근대화론'(제4강)에 이어 민족문제연구소 이준식 연구위원이 ‘친일청산의 역사적 의미’를 주제로 강사로 나섰다.
이준식 연구위원은 친일파의 규정과 범위, 대한민국임시정부로부터 시작하는 친일청산의 역사, 그리고 해방 후 반민특위의 활동 등에 대해서 차례로 짚어나갔다.
아울러 인천, 특히 이날 강의가 열린 장소인 부평이 2006년 국가기구인 ‘친일반민족행위자재산조사위원회’가 출범하게 되는 결정적 계기를 만들어준 장소임을 상기시켜주었다.
즉 2002년 인천시민에게 반환이 결정된 부평 미군기지, 시가 2,500억 원을 넘는 이 땅을 자신의 조상땅이라 하여 되찾겠다는 송병준 후손의 소송이 전국민적인 공분을 일으켰고, 이에 2005년 12월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의 국가귀속에 관한 특별법’이 기적적으로 국회를 통과하게 됐다는 것이다.
해방이 된지 60년이 지난 후에서야 친일반민족행위자들의 재산을 국가귀속시키는 특별법이 만들어지고, 또 이를 담당하는 국가기구가 설립되었다는 사실은 비정상적인 일임에 틀림없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국제질서가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자본주의 블록과 소련을 중심으로 하는 공산주의 블록으로 양분되었지만, 민족반역·대적협력행위에 대한 처벌은 이러한 이념을 떠나 세계사적인 보편성을 갖고 있었다.
이준식 연구위원은 12만 명 이상을 반민족행위자로 사법처리하여 9만 명 이상에게 실형을 선고한 프랑스의 예를 들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경우 1948년 ‘반민족행위처벌특별법’에 의해 처벌된 인원은 79명이고 실형 선고를 받은 인물은 단지 10명에 불과하다. 3년간의 나치 치하를 겪은 프랑스와 40년간의 일제 식민통치를 겪은 우리나라가 이렇게 달랐다.
이러한 현상이 일어나게 된 원인에 대해 이준식 연구위원은 한반도를 둘러싼 냉전과 외세의 개입, 그리고 이에 따른 좌우갈등의 결과물로 파악하였다. 사실 해방 직후 남조선과도입법의원이 친일파 처벌을 위한 특별법 제정을 추진할 당시 친일파의 규모는 부일협력자 10~20만명, 민족반역자 1,000명 내외, 전범자 200~300명이었다.
그러나 이들 친일파들은 반공을 내세우며 다시 기득권층으로 부상하였다. 국가권력의 중추라 할 수 있는 군, 경찰, 검찰, 사법부 등을 장악했음은 물론, 역대 독재 권력을 떠받치는 핵심 세력으로 출세의 가도를 달린 것이다.
이후로 친일은 금단의 역사가 되었고 친일문제는 더 이상 거론해서는 안 된다는 집합기억의 구조가 형성되었다. 친일문제 연구의 금자탑이라 할 수 있는 임종국의 ‘친일문학론'(1966)이 오랫동안 금서로 묶여 있었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해준다.
그러나 친일을 둘러싼 기억이 억압되고 왜곡되는 가운데서도 친일청산에 대한 사람들의 열망이 약화되거나 없어진 것은 아니다. 그 열망이 공론화될 수 없었을 뿐이다. 친일문제가 다시 역사의 전면에 나서게 된 것은 1980년대 이후 민주화가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민주화가 진전되는 속에서 잘못된 과거사의 청산이 화두로 등장한 것이다.
이준식 연구위원은 친일청산은 여전히 미완의 과제임을 역설하였다. 아직도 우리 사회 내부에 친일청산에 대해 회의적인 시각으로 바라보고 심지어 친일청산을 빨갱이의 국론분열 조장행위라고 몰아붙이는 세력이 있는 한 친일청산은 결코 완결된 것이 아니라고 말했다. 이 연구위원은 전 독일 대통령 리하르트 폰 바이츠제커의 말로 강의를 마쳤다. “지나간 일은 수정되거나 백지화될 수 없다. 과거에 대해 눈을 감는 사람은 현재에 대해서도 장님이 된다.”
다음 한국사 강좌는 5월 12일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수립과정’을 주제로 이현주 인하대 사학과 강사가 강단에 선다.
문의전화 862-5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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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4-29> 인천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