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창비∥2016년 5월 18일 발행∥신국판 변형∥ 1권 484면/ 2권 ∥476면 ISBN 978-89-364-3421-2 03810(1권)/ 978-89-364-3422-9 03810(2권)∥각권 값 14,000원 |
우리가 기다려온 정통 역사소설의 귀환
“어제를 기억하는 자에게만이 내일은 희망이다”
집념의 작가혼으로 완성한 장엄한 증언과 기록의 서사
27년에 걸친 자료조사, 집필과 개작으로 밝혀낸 군함도 과거사의 진실
일제강점기 하시마(端島) 강제징용과 나가사끼 피폭의 문제를 다룬 한수산 장편소설 『군함도』가 곧 출간된다. 한수산은 1988년 일본에 체류하던 중 토오꾜오의 한 서점에서 오까 마사하루 목사가 쓴 『원폭과 조선인』이라는 책을 접한 뒤 하시마 탄광의 조선인 강제징용과 나가사끼 피폭에 대한 작품을 쓰기로 결심한다. 이후 소설의 무대가 되는 군함도와 나가사끼에만 십여차례 방문하고 일본 전역을 비롯해 원폭 실험장소인 미국 캘리포니아 네바다주까지 다녀왔으며, 수많은 관련자들을 인터뷰하는 등 치밀한 현장취재를 거쳤다. 이렇게 모은 자료를 바탕으로 2003년 대하소설 『까마귀』를 펴내고, 작품을 보완할 필요성을 강하게 느낀 작가는 일본어판 『군함도(軍艦島)』(作品社 2009)를 출간할 무렵 한일 동시 출간으로 기획했던 전폭적인 수정작업을 2016년 초 마침내 완료했다.
2016년 5월 창비에서 출간되는 『군함도』는 전작을 대폭 수정하고 원고를 새로 추가해 3500매 분량으로 완성된 결정판이다. 이 과정에서 등장인물들의 출신과 배경 등이 새롭게 설정되었고 원폭 투하의 배경과 실상을 전면 개고해 최대한 사실에 가까운 묘사를 추구했다.(40, 41장) 등장인물들의 고난은 자아의 지평을 넓혀가는 과정으로 서사적 흐름이 자리잡으며 소설적 구성미와 완성도를 높였고, 박진감 넘치는 전개로 재미와 가독성을 끌어올렸다. 또한 눈물로 기다리는 조선여자가 아니라 적극적으로 남편을 찾아나서고 탄광사무소의 부당한 처우에 맞서는 서형, 불의에 맞선 죽음으로 자신의 사랑을 지켜내는 금화 등을 통해 주체적인 여성상을 창조했다.
한수산은 비극적인 역사적 사실을 전하고 알려내는 것뿐만 아니라 당시 고난을 겪은 조선인 한사람 한사람의 숨결을 되살리는 데에도 큰 공력을 들이며 지옥의 섬 군함도에서 다만 ‘사람’이고 싶었던 징용공들의 일상과 인간적인 면모, 역경 속에서도 그들이 꿈꾼 안타까운 사랑과 희망을 가슴 아프면서도 핍진하게 복원한다. 작가는 경상 전라 충청도의 생생한 사투리 구사에 힘을 기울여 인물에 생동감과 실감을 더하면서 힘든 환경 속에서 구수하고 걸쭉한 농담으로 고됨을 잊는 조선 징용공과 농부들의 활기를 전하고, 각 지방의 아리랑과 의병가를 적절히 활용해 작업현장에서의 고달픔과 서러움,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넘어서는 조선인의 힘을 부각한다.
지옥의 섬 군함도에서 우리는 다만 사람이고 싶었다
일제강점기 조선인 강제징용과 나가사끼 원폭 비극
불굴의 저항과 처절한 탈출의 숨 막히는 서사
작가 한수산은 2016년 오늘에도 여전히 살아 있는 쟁점을 제기하며 독자들에게 과거사를 넘어 우리의 미래를 질문한다. 30년 가까운 세월동안 조선인 강제징용과 나가사끼 원폭문제를 파헤치고 골몰해온 작가는 “고향으로 돌아온 한국인 피폭자들이 살아야 했던 비참한 실상과 세월이 흐르면서 점차 대두하고 있는 피폭 2세, 3세의 문제까지” 수많은 문제들을 제기하며 독자들에게 간곡한 바람을 전한다. “젊은 독자들이 이 ‘과거의 진실’에 눈뜨고 그것을 기억하면서 ‘내일의 삶과 역사’를 향한 첫 발걸음을 내디뎌주신다면, 그래서 이 소설을 읽은 후에 이전의 삶으로는 결코 돌아갈 수 없는 각성과 성찰을 시작하신다면, 이 작품으로서는 더할 수 없는 영광이 될 것입니다.”(작가의 말)
│상세 줄거리│
군함도: 어디에도 조선은 없다, 그건 우리가 잃어버린 나라다
타는 듯 붉은 해가 넘어가고, 망망한 잿빛 바다를 앞에 두고 명국은 태복과 삼식의 탈주 계획을 듣고 있다. 건너기만 하면, 뭍으로만 나가면 자리를 못 잡겠냐. 죽더라도 내 땅에나 돌아가서 죽어야겠다. 어떻게 저 바다를 건널 것이며, 건너서 갈 데도 없다. 그렇게는 안 된다. 결국 죽기를 각오한 사람들은 떠났고, 남은 명국은 사흘 뒤 시체로 돌아온 삼식을 마주한다. 붙잡히며 맞아서 반죽음이 된 태복이 함께였다. 탄광사무소 조사실에서 모진 고문을 받던 태복은 견디다 못해 조사계장의 목을 찌르고 형무소로 끌려가고 만다.
일제가 태평양전쟁에 박차를 가하던 시기, 군수기업 미쯔비시가 운영하던 하시마탄광에서 중국인 포로, 일본인 광부와 함께 절대다수를 차지한 것은 조선인 징용공들이었다. 명국과 태복은 많은 조선인처럼 돈을 벌러 일본에 건너왔다가 광부 모집책에 속아 하시마로 끌려왔으나, 징용과 관(官)을 동원한 조직적인 강제 차출로 들어오는 조선인 광부들의 수는 하루가 다르게 늘어났다.
새벽어둠 속에 시작되어 한밤의 어둠 속에서야 끝나는 노동, 형편없는 식사와 거친 잠자리, 미비한 안전시설… 바깥세상과 완전히 절연된 채 그들은 언제 죽을지 모르는 두려움 속에서 하루하루를 이어갔다. 한번 들어오면 죽어야만 나갈 수 있는 섬, 잔혹한 폭력이 횡행하는 인권의 사각지대. 광부들은 해저 갱으로 들어가는 입구를 ‘지옥문’이라고 부르게 된다. 섬 모양이 군함을 닮았대서 일명 ‘군함도’라 불린 하시마(瑞島)는 당시 일본 내에서도 죽음 같은 노동으로 악명 높았다. 미쯔비시는 이 가혹한 노동 착취를 통해 캐낸 탄으로 철강을 생산했고 일제는 그것으로 포탄과 어뢰를 만들었다. 하시마에서 20여 킬로미터 떨어진 나가사끼는 도시 전체가 미쯔비시의 군수산업단지였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춘천: 나에게 일본은 무엇이었던가
결혼한 지 두해 만에 고대하던 아기를 가진 서형은 남편 지상에게 소식을 알리려 걸음이 바쁘다. 그런데 웬일인지 시댁은 쥐죽은 듯 괴괴하다. 늦게야 돌아온 지상은 낯빛이 무겁기만 하고. 온 춘천에 친일파로 이름난 집안에 징용 통지가 나온 것이다. 며칠 후, 서형은 지상이 장손인 형 대신 징용을 자원했다는 소식에 무너지고 만다. 학을 수놓은 푸른 비단 손수건 한 장, 서형이 지상과 나눈 것은 겨우 그것이었다.
내리는 빗속에서 춘천역에 모인 청년들은 봉의산 신사에 절을 하고 ‘황국신민서사’를 소리치는 것으로 낯설기 짝이 없는 여정을 시작한다. ‘강물로 둘러싸인 춘천, 봄가을이면 물안개 피어오르며 아침을 맞고, 나무도 풀도 밤안개에 젖으며 골목 저 끝의 불빛마저 은밀했던’ 고향, 나즈막한 야산과 물결치는 들판을 두고 ‘우리는 황국신민이다, 충성으로써 군국에 보답한다’고 외치며 춘천을 떠난다.
일본인들과 결탁해 정미소에 금광에 재산을 일구며 등 따습고 배부른 집안에서 자란 지상에게 일본은 소학교 시절 흰 블라우스 검정 치마의 얌전한 여선생과 보낸 햇살 가득한 교실의 오후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경성으로, 부산으로, 그리고 현해탄을 건너 시모노세끼로, 뛰라면 뛰고 구르라면 구르며 욕설과 매질 속에 마주한 일본. 지상은 덮쳐오는 무력감과 절망 속에서 무언가 ‘크게 잘못 만난’ 것을 감지한다. 각지에서 모여든 각양각색의 사람들 속에서 같은 춘천고등보통학교 출신 우석을 만난 것은 큰 불행 중의 작은 행운. 독서와 토론으로 조선독립의 꿈을 키우고 상조회를 조직해 고향의 경제적 자립을 이루려다 일제 경찰에 발각되어 대대적인 탄압을 받은 춘천고보 상록회 사건에 뜻을 함께했던 두 사람이기에 이 만남은 각별했다. 나로 인해 타인이 고통받지 않는 평화를 꿈꾸는 지상과 불의부당에 맞서 싸워 세상을 바꾸고자 하는 우석, 둘은 나란히 ‘미쯔비시광업소 타까시마탄광 하시마분원’에서 감옥 같은 징용생활을 시작한다. 지상은 명국과 한방을 쓰게 되면서 진중하고 속 깊은 그를 깊이 의지한다.
착취, 죽음, 사랑: 그 목소리에 눈물이 밴다
아침 6시에 시작되는 15시간 노동, 쉴 틈을 주지 않는 채탄 할당량, 열악한 작업환경… 사고는 끝이 없고 죽어나가는 사람 태반은 일본어 주의사항을 못 알아듣는 조선인 광부들이다. 땀과 탄가루가 범벅이 된 채 그들은 가스폭발로, 무너지는 갱목의 낙반사고로, 감시와 매질을 못 견딘 발작으로 끊임없이 죽고 다치는 동료들을 묵묵히 바라볼 수밖에 없다. 그날, 갑자기 부러진 갱목에 창수를 잃은 동료들은 그의 시신을 싣고 울며 소리치며 어둠 속을 올라온다. 올라가자, 올라가자, 창수야. ‘파리 목숨이라도 과분하지. 이건 불면 날아가는, 목숨도 아니다.’ 자신을 돌봐주던 창수의 죽음을 지상은 ‘어떻게도 견딜 수가 없었다.’
드물게 오는 고향 소식조차 제대로 전해주지 않는 형편 속에 지상은 어렵사리 춘천에서 날아온 득남 소식을 듣는다. 방값, 식대, 보험금, 갖은 명목으로 제하고 주는 월급이라곤 그나마 돈도 아닌 전표. 섬 안에서만 쓸 수 있는 전표를 푼푼이 모아 동료들은 지상의 득남을 다 함께 축하한다. 밀가루빵, 마른오징어에 부족한 술 한잔을 나누고 강원도 장타령 한 자락으로 흥을 돋우며 서럽고 쓰린 마음을 달래기도 한다. 새 생명이 태어났다는 소식에 희망을 말하면서.
지상은 아들이 태어났다는데도 막막하기만 한 자신을 돌아보며 이렇게 벌레 같은 삶을 계속할 수는 없다고 마음을 굳히고 어렵게 명국과 탈주를 모의하지만, 예기치 않은 낙반사고로 명국은 다리를 잃고 만다. 무산된 탈출로 더욱 절망에 빠진 지상 앞에 나타난 것은 우석이었다. 그리고 지상은 우석과 다시 탈출을 도모할 것을 꿈꾼다. 한편, 바닷가에서 바람을 쐬던 우석은 섬의 유곽에 있는 조선여자 금화를 마주친다. 모두 다 끌려온 처지. 천대받고 멸시당하며 갖은 고생을 다해온 금화는 우석의 굳은 심지를 알아보고, 자신을 온전히 사람으로서 존중하는 그와 사랑을 나누게 된다. 강제노동과 착취에 지지 않으려 마음을 다지던 우석은 금화에게 사람답게 사는 것이 무엇인지, 자신의 속내를 나눈다.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건 혼자서는 안 되는 일이다. 태어나면서부터 사람은 무릎 꿇고 살아서는 안 돼. 그렇게 해서는 살 수도 없고. 그러니 싸워야 해. 싸워도 함께 싸워야 해.”(1권, 192면)
탈출: 너희들 죽지만 마, 살아서 만나자
이제까지 생각지 않았던 방법으로 지상과 우석, 필수는 탈출을 계획한다. 목발을 짚은 채 명국은 걱정과 희망이 엇갈리는 심경으로 그들을 응원한다. 차마 두고 갈 수 없어 우석은 금화에게 함께 가자고 종용하지만 금화는 단호하게 그를 떠나보낸다. 당신만은 다르게 살아야 한다면서. 우석으로 해서 온전한 사랑을 배운 금화는 온 힘을 다해 자신의 사랑을 지키려 한 것이다. 그러나 방파제를 넘던 우석은 다리를 다치고, 지상과 필수는 일촉즉발의 순간에 우석과 헤어져 바다를 건넌다.
지상과 필수의 탈출로 동료들과 금화는 탄광사무소로 끌려가 혹독한 조사에 시달린다. 특히 탈출 시각 경비원을 붙들고 술을 먹였던 금화는 고의성을 의심받아 비열하기 짝이 없는 고문을 당해 만신창이로 풀려난다. 그리고 끝내 바다에 몸을 던짐으로써 비로소 세상의 핍박에서 벗어난다. 우석이 다쳐 섬에 남은 줄도 모른 채. 명국 앞으로 남긴 유서에서 금화는 말한다. “이 금화가 가장 깨끗이 사는 길은, 그렇답니다, 이제 그만 죽는 일이랍니다. 독한 마음으로 죽을 생각을 하는 게 아니랍니다. 그 사람 품에 안기듯이, 그냥 저는 죽기로 합니다. (…) 그래도 이 세상은 아름다웠다고 그렇게 믿으며, 먼저 갑니다. 다음 세상에서 만나요.”(1권, 481면)
뒤늦게 금화의 죽음을 접한 우석은 비통한 마음으로 그 주검을 수습해 바다로 떠나보낸다. 그리고 그녀의 뼈 한조각을 몸에 지니기로 한다. 그의 의지를 북돋던 금화의 뜻을 가슴에 품고 우석은 징용공들을 모아 대규모 파업과 탈출을 조직하기에 이른다.
근로조건 개선을 요구한 조선인 징용공들의 대대적인 파업은 격렬한 투석전과 몸싸움 속에 온 섬을 뒤흔들며 이어졌으나, 속임수에 군대까지 동원한 탄광사무소의 잔인한 진압으로 무너지고 만다. 파업을 주도한 우석과 일주는 황급히 바다를 건너 몸을 피한다.
나가사끼: 절망적인 전쟁을 계속하며, 역사의 톱니에 부서지며
바다를 건넌 안도도 잠시, 공포와 굶주림에 시달리며 몇날 며칠을 헤매던 지상과 필수는 우연한 일로 헤어지고, 기진맥진한 지상은 나가사끼 해안에 쓰러졌다가 고기잡이 노부부에게 발견되어 간신히 목숨을 건진다. 엄혹한 전시에 위험을 무릅쓰고 자신을 돌봐주는 노부부의 모습에서 인간에 대한 믿음을 겨우 붙잡은 지상은 노부부의 딸 아끼꼬와 사위 나까다의 도움을 입어 나가사끼조선소에 취업하고 조선인 징용공들에게 작업에 필요한 일본어를 가르치게 된다. 그리고 비로소 전황이 일본에 불리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뒤늦게 군함도를 탈출한 우석과 일주는 흘러흘러 나가사끼로 찾아들어 우석의 먼 친척 육손이가 맡아 운영하는 터널 공사장에서 기숙하게 된다. 일본 각지에서 모여든 조선인 일꾼들을 통해 조선인 차별의 참상과 함께 일본 피차별민들과 연대한 후루까와탄광의 조선인 광부 파업사건을 들은 우석은 어떤 희망을 발견하며 더욱 투쟁의지를 굳히게 된다. “그것은 뜻을 같이하는 사람과 사람, 단체와 단체가 하나로 뭉치는 연대였다. 힘을 모으는 것. 나뭇가지도 하나씩은 부러지지만 묶여서 한아름이 되면 불에 탈지언정 부러지지는 않는다. (…) 나에게는 꿈꾸는 내일이 있다. 농민과 노동자들을 깨우쳐야 한다. 그들과 함께 어깨동무를 하고 나아가야 한다.”(2권, 339~340면) 우석은 연일 기세를 더해가는 미군의 폭격에 맞서 주요 군수공장을 이전하기 위해 지하터널을 뚫는 공사현장을 폭파하기로 결심하고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을 모은다. 그러나 불의의 사고로 폭파는 미수에 그치고 만다.
이 무렵 나가사끼를 비롯한 일본 전역은 하늘과 바다, 육지를 가리지 않고 쏟아지는 미군의 폭격 속에 패전을 번히 눈앞에 보면서도 마지막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한 시간이 멀다 하고 울리는 경계-공습경보 속에서 상시적인 죽음의 위험에 노출된 채 극심한 물자 부족에 시달리며 혹독한 정신무장을 강요받는 것은 일본의 평범한 시민들이었다.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시골로 강제 소개시킨 어린아이들은 굶주림에 시달렸으며, 오끼나와에서는 왜곡된 선전과 강요로 수많은 주민이 자결을 감행했다. 천황을 위한 영예로 미화된 카미까제 특공대의 젊은 죽음들이 수도 없었다.
조선: 만신창이 역사는 무심해도 그 산하는 의연하구나
혼자 낳은 아이가 돌이 가깝도록 남편에게서 오는 소식은 끊겼다. 혹시 하는 마음에 일본을 다녀온 사람이라면 먼 길 가리지 않고 찾아가 수소문을 하던 서형은 끝내 아이를 둘러업고 하시마로 지상을 찾아가보기로 한다. 가서 찾으면 그 옆에 자리 잡고 살기라도 못하랴. 옷고름으로 눈물 찍으며 기다리는 것이 능사랴. 그러나 고생고생 찾아간 그 감옥 같은 섬에 남편은 없었다. 행방불명이라며 나 몰라라 하는 탄광소장 앞에서 서형은 눈을 부릅뜨고 항의한다. “내선일체, 총독부에서 내세워온 것이 내선일체 아닙니까. 조선인에게 의무가 있다면 일본에는 책임이 있는 것 아닙니까. 국민을 징용했으면 당연히 보호해야 하고, 그래서 징용기간 끝나면 집에서 기다리는 부모와 처자식 앞으로 보내줄 의무가 있는 것 아닙니까.”(2권, 126면)
지상이 탈출했고 살아 있으리라는 명국의 귀띔으로 겨우 진정하고 조선으로 돌아온 서형은 마음을 다잡고, 아이만은 제 뜻을 펴고 사는 다른 세상을 살기를 소망하며 지상을 기다릴 결심을 한다. ‘돌아오세요. 당신이 오실 때는 제가 기다리는 때입니다.’
발악적인 일제의 수탈을 못이긴 춘천의 이웃들은 하나둘 살던 땅을 버리고 남부여대 만주로 간도로 떠나간다. 독립운동을 하러 중국으로 건너간 서형의 오빠 태형은 상하이 군관학교로 간다는 소식을 전해온다. 목숨을 걸고 싸우는 아들을 멀리서 응원하며 노구를 끌고 고향을 지키는 서형의 아버지 치규는 어린 손자와 함께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제 갈 길을 가는 자연의 유구한 흐름을 되새긴다. “저 소양강처럼, 저 울울하게 넘실거리는 가리산 연봉들처럼 묵묵히 제 목숨의 본분을 다하는 거, 그게 사는 일이라는 걸 이제 할아버지는 안다. 역사는 만신창이가 되어 30여년을 무심하다만 그 민족을 길러낸 이 땅만은 저토록 의연하구나.”(2권, 325면)
폭격, 폭격, 폭격: 조선인들은 주검에서까지 차별받았다
그리고 1945년 8월 9일 11시 2분, 나가사끼에 원자폭탄이 떨어졌다. 땅 위의 건물과 사람이 남김없이 파괴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폭심지 2킬로미터 상공의 새들이 죽어서 떨어지고 물속의 물고기들도 죽어 떠올랐다. 폭심지 반경 1킬로미터 이내의 화강암은 석영이 끓어올라 표면에 기포가 생겼다. 상상하기 어려운 참상이 끝없이 이어졌다.
조선소에서 폭격을 맞은 지상도 충격에 날아올랐다 떨어졌지만 큰 부상은 입지 않았다. 시내로 나간 그가 목격한 광경은 말로 다할 수 없이 끔찍했다. 산더미처럼 쌓인 시체와 무너진 건물의 잔해, 엄청난 먼지 사이로 여기저기가 불타고 부러진 사람들이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헤매고 다녔다. 눈앞이 바로 지옥이었다. 그늘을 찾아 모여든 사람들의 상처는 8월의 폭염 아래서 금세 곪아서 냄새를 풍기기 시작했다. 엄청난 수의 파리떼가 상처에 들러붙었다. 쫓을 힘도 없는 사람들은 그대로 죽어갔다. 지상은 사람들 틈에서 다리를 다친 아끼꼬를 발견하고 산의 그늘로 업어 옮긴다. 그러나 지상이 조선인인 걸 알아본 일본인 부상자들은 그를 위협해 쫓으려 한다. 살아 있는 모든 순간에, 죽는 그 순간까지도 조선인은 차별받는다. “다친 몸으로 일본인들의 차별과 멸시 속에 버려진 조선인들은 거리에서, 부서진 건물더미 밑에서, 누군가의 집 처마 아래서, 다리 밑에서, 강가에서 죽어갔다. 마지막까지 시체의 잔해가 그대로 남아 있던 것도 조선인들이었다. 형체를 알아보기 어렵게 다친 사람들을 들것에 싣고 병원으로 가다가도 ‘아이고!’ ‘어머니!’ ‘물 좀 주세요, 물!’ 하는 조선말 신음소리를 들으면 그들을 거리에 내버렸다.”(2권, 460면) 지상은 경멸로써 그들의 위협에 맞서고, 천신만고 끝에 아끼꼬를 나가사끼의대 병원으로 실어보낸다.
우석은 터널 공사장에서 돌 운반차를 밀다 폭격을 맞아 등 뒤에 화상을 입고 허리를 다쳤다. 겨우 몸을 움직여 그가 마주한 광경은 빗자루를 들어 쓸어낸 듯 서 있는 거라곤 아무것도 없이 먼지와 안개가 자욱한 폐허. 아비규환 속에서 산으로 올라가 몸을 맡긴 나무 그늘에서 그는 자신도 다친 몸으로 있는 힘껏 부상자들을 돕는다. 그러나 그를 돕는 사람은 없다. 병원 구호반조차 그를 외면하고 간다. “조선놈 몫은 없다. (…) 일본사람 먹을 것도 없는데 조선놈한테 바치겠다는 거냐!”(2권, 446면) 일본인들의 위협을 피해 시내의 폐허로 내려와 강으로 향하던 끝내 기진해 숨을 거둔다. 바지춤에 꿰매 넣었던 금화의 뼈 한조각을 간직한 채. 그의 시신은 강물에 싸여 멀리 바다로 흘러간다.
고향으로: 이제 안다, 결국 사람과 사랑이라는 것을
아끼꼬를 구해 병원으로 실어보낸 지상은 조선소의 동료들을 모아 구호대를 조직한다. 그토록 차별과 멸시를 받았으면서도 참화 속에서 그들은 오로지 사람의 도리를 다하기 위해 시체를 모으고 수습해 화장하는 데 힘을 아끼지 않는다. “삼태기같이 생긴 것에 담아 나르던 시체들도 이제는 양동이나 커다란 통 같은 것으로 나르지 않으면 안 되었다. 사체에서 살이 떨어져나오고 피부가 훌러덩 벗겨지곤 했기 때문이다.”(2권, 461면) 조선인 징용공 구호대의 이런 활동을 일본인들은 ‘훌륭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구호대 활동이 정리되고, 생명의 기운이라곤 없는 끔찍한 폐허를 마주한 속에서 겨우 어머니와 아내와 아들을 떠올리며 지상은 생각한다. “산다는 것의 의미도, 믿음도, 가치도 다 잃어버렸지만 그래도 남아 있는 그 마지막 그루터기, 그 사랑. 그것이 남아 있기에 삶을, 다시 시작해야 한다. 이제 나는 그 소중함을 안다. 결국 사람이라는 것을, 그 사이의 사랑이라는 것을. 사람과 사랑이다. 이제 안다. 마지막까지 기대고 부둥켜안아야 하는 것은 사람이며, 사람 사이의 사랑이다.”(2권, 416면) 지상은 고향으로, 살아남은 조선사람들과 함께 조선으로 걸음을 내디딘다.
│추천사│
나의 오래된 기억 속에 한수산은 유랑곡예단의 낭만적 애환을 그린 소설 『부초』의 작가로, 그리고 신군부 정권에 터무니없이 고문을 당한 피해자의 한 사람으로만 남아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나의 직무태만에 지나지 않음을 이 소설이 확실하게 증명한다. 『군함도』는 읽어나갈수록 점점 더 온몸에 소름이 돋고 눈에서 천불이 일게 하는 역작이며, 첫 착상부터 자료조사와 현장답사를 포함하여 ‘쓰고 지우기’에만 30년 가까운 세월의 공력이 투입된 대작이다. 원폭의 도시 나가사끼에서 멀지 않은 섬 하시마, ‘군함도’로 더 알려진 그 섬의 지하탄광에 징용으로 끌려온 조선인 노동자들, 그들의 지옥 같은 삶과 안타까운 죽음, 불굴의 저항과 처절한 탈출로 이어지는 숨 막히는 서사를 통해 우리는 70년 전의 고난의 역사가 오늘 우리 자신의 현실처럼 재현되고 있음을 생생하게 경험한다. 원폭투하의 처참한 현장 속에서 일본인보다 더 심각한 피해를 겪어야 했던 조선인의 운명을 일찍이 이처럼 실감 있게 묘사한 소설이 있었던가 묻고 싶다. 염무웅 문학평론가
일제강점기 징용 문제는 위안부 문제와 함께 한국 근대사에서 반드시 해결해야 하는 과제다. 어떤 목적에서, 어떤 과정을 거쳐서 갔건 간에 징용에 끌려갔던 식민지 조선인들은 제국주의와 식민지라는 구조 하에서 정당한 대가를 받지 못한 채 인권을 유린당해야 했다. 그리고 냉전의 시작을 알리는 원자폭탄 투하로부터 고통받아야 했다. 1945년 이후 전개된 냉전의 상황은 그 피해자들이 오히려 숨죽이고 살 수밖에 없는 구조를 만들었다. 이들을 강제로 동원하고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지 않았던 자들은 도리어 그 장소를 문화유산으로 만들었고, 탐욕으로 일으킨 자신들의 전쟁과 동원을 정의의 전쟁으로 미화했다. 한수산의 『군함도』는 왜 그들의 행위가 범죄였는지, 그 범죄로 인해 식민지 조선인들이 어떠한 고통을 겪어야 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역사학자라면 그려낼 수 없는 생생한 현장을 단순한 상상이 아닌, 직접 발로 뛰면서 고증하고 재현한 작가의 힘이 느껴진다.
박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
│지은이 소개│
한수산 韓水山
1946년 강원도 인제에서 태어나 춘천에서 자랐다. 경희대 영문과를 졸업했다. 1972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단편 「사월의 끝」이 당선되고 1973년 한국일보 장편소설 모집에 『해빙기의 아침』이 입선되며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장편소설 『유민』 『푸른 수첩』 『말 탄 자는 지나가다』 『모래 위의 집』 『4백년의 약속』 등이 있고, 그가 아끼는 작품에는 『거리의 악사』 『바다로 간 목마』도 있다. 『부초』로 제1회 오늘의 작가상, 「타인의 얼굴」로 제36회 현대문학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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