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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심의 이름으로, 헤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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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헌영의 세계문학기행
<
격변기 문호들을 찾아 떠나다>

전세계 문학 현장을 25년 누빈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 소장의 새 연재 매주 만나는 세계 문학의 절정 “자유, 평화, 인도주의”


문학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오래된 질문을 <한겨레21>이 다시 묻는다. 야차 같은 정권의 그늘 아래 한반도 남쪽 민주주의는 갈수록 창백해지고 있다. 농민은 병실에 누워 있고, 노동자는 붉은 띠 두르고 하늘에 오른다. ‘이생망’(이번 생은 망했다)이라는 말이 넘쳐난다.


그런데도 문학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세상살이의 태반은 말글살이다. 사람들은 비정한 비언어의 세계에서 언어로 소통하고 언어로 환호하며 언어로 절규한다. 언어 없는 인간세를 상상할 수 없듯이, 언어의 힘을 불신하는 문학은 존재할 수 없다. 문학이 ‘겨울공화국’의 혹한을 견디고 봄날을 꿈꾸며 삶의 근육을 다지는 데 조금이라도 이바지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 문학비평가 임헌영(75·사진)의 세계문학기행 연재를 이번호부터 싣는 까닭이다.


연재는 일본의 두 형제 이야기로 시작해, 유일한 한국인 이미륵에서 마침표를 찍을 참이다. 전쟁과 역사, 민중의 저항, 침략과 제국주의 반대를 열쇳말 삼아 세계문학의 ‘절정’이 차례로 소개된다. 작품의 현장을 두루 돌아본 저자의 안내에 따라 독자들 또한 시대를 읽고 자신을 해석하며 타인과 공존하는 길을 찾을 수 있기를 기대한다. 연재는 매주 이어진다. _편집자

[시작하는 글]
기획연재 <임헌영의 세계문학기행> 격변기 문호들을 찾아 떠나다

[연재] 1화 일본의 윤동주 일본의 톨스토이


[연재] 2화 춘원 이광수의 양부 일본의 괴벨스


[연재] 3화 위대하고 혼란스런 파리의 빅토르 위고

[연재] 4화 무시무시한 시절의 위고

[연재] 5화 늙어서 오히려 진보한 위고

[연재] 6화 민중의 눈으로 전쟁을 본 톨스토이

[연재] 7화 “나는 침묵할 수 없다!” 인도주의 상징 톨스토이

[연재] 8화 지복을 누린 괴테 바이마르 권세에 취하다

[연재] 9화 정치는 우리의 운명 스탕달

[연재] 10화 실러의 위대한 투쟁

[연재] 11화 ‘감옥의 벽’ 허물려 한 자유의 투사 횔덜린

[연재] 12화 ‘오리새끼’에서 ‘혁명가 친구’ 된 푸시킨

[연재] 13화 유언비어 용의자 1호 러시아의 푸시킨

[연재] 14화 천재 연애대장 바이런



전쟁과 맹목적 애국주의 거부하고 인류애 추구한 순수문학인의 진정한 스승

문학인 중 가장 선량한 모습인 헤르만 헤세(1877∼1962)의 고향은 독일 남서쪽 끝 바덴뷔르템베르크주 나골트 강변의 칼브이다. 그 강의 성 니콜라이 다리에 헤세의 등신상이 서 있다. 그가 즐겨 놀았던 곳이라 2002년에 세운 것이다.

‘너도 헤세처럼 될래?’

고향 독일 칼브의 성 니콜라이 다리 위에 세워진 헤르만 헤세의 동상. 임헌영

아버지 요하네스 헤세는 바젤선교협회에서 교육받고는 인도의 말라바르 해안에서 5년간 근무하다가 건강 때문에 칼브의 기독교서적 출판사로 전근됐다. 이 출판사의 대표 헤르만 군데르트는 말라바르 지역 선교기지를 개척, 현지 방언 7종에 능통한 명망가로 만년에 칼브에 정착했다.


군데르트의 사위는 선교사로 인도 복무 중 건강이 나빠져 귀국했으나 이내 죽어버려 두 아들을 가진 채 과부가 된 딸 마리가 이 출판사에 근무했다. 요하네스는 자기보다 5살 연상인 이 과부와 결혼, 처가살이에서 얻은 둘째아들이 헤르만 헤세다.


헤세는 마울브론 기숙신학교를 중퇴, 권총 자살 시도, 서점 판매원 견습 중 무단결근, 탑시계 공장 기계공 견습, 다시 서점 점원 등 말썽꾸러기로 동네 사람들이 자기 아이를 꾸짖을 때 “너도 헤세처럼 될래?”라고 했다.


그런 중에도 이 골치는 서점 점원으로 자립, 스위스 바젤에서 차츰 문인으로 성장, 9살 연상의 사진작가 마리아 베르누이와 결혼했다. 스위스에서 계속 셋집으로 이사 다니다가 제1차 세계대전을 맞아 복무 불능 판결을 받고는 베른 주재 독일 영사관에서 독일군 포로 후생사업에 자진 참여했다. 그러다가 독일을 방문, 호텔 이름조차 프랑스어는 깡그리 사라지고, 아듀·메르시 등의 프랑스어에도 증오의 눈길을 번득이는 맹목적인 애국주의에 경악했다.


“독일에서 군국주의가 없었다면 독일 문화는 오래전 자취를 감추었을 것이다”는 황당한 논리가 난무, 게르하르트 하웁트만과 빌헬름 뢴트겐 등 지식인 93명이 전쟁 지지 선언을 내자 헤세는 격분했다.


헤세는 스위스의 한 신문에다 ‘오, 친구들이여, 그런 음조로 노래하지 마오!’라는 시론을 발표, 맹목적인 애국사상에서 깨어나 유럽의 공동 유산을 인정하라며, 전쟁이 끝나면 우리는 함께 살아가야 하기에 “민족적인 한계를 넘어서는 인류애”를 고수할 것을 주장했다.(<헤르만 헤세: 모든 시작은 신비롭다>, 알로이스 프린츠 지음, 이한우 옮김, 더북 펴냄, 2002)

독일이 패전하자 헤세는 정치평론집 <차라투스트라의 복귀>를 내어 패배를 비통해 말고 역사를 바꿀 기회를 잡으라고 충고했다. 독일이 야기할 보복 전쟁을 강력히 경고하자 무수한 증오의 편지가 쇄도했지만 그로서는 평화에 대한 신념을 굳히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스위스에서만 평화사상을 주장할 수 있다고 여겨 이 나라에다 삶의 뿌리를 박았으나, 미국의 부자들이 레저 시설을 짓는 등 개발을 부추기자 맹비난했고, 유대인들과 나치의 등장도 불길하다고 비판했다.


나치 전범 친구의 변론 거부



▲ 칼브 헤세 박물관에 전시된 헤세의 사진들. 임헌영

정신질환이 악화되어 아이들이 함께 살기를 거부할 지경에 이른 아내와는 이혼(1923), 20살 연하의 부잣집 딸 루트 벵어와 신고만으로 재혼(1924)했으나 성격 차이로 이내 이혼, 이혼녀인 헤세 숭배자 니논 돌빈(18살 연하)과 호적 신고만으로 3혼(1931), 평생을 함께했다.


1930년대로 들어서자 독일에선 파시스트가 민주주의를 위협했다. 아들 하이너가 사회주의에 경도, 아버지에게 강권하자 그는 “나 자신이 파시스트가 되느니/ 차라리 파시스트들에게 맞아 죽으리라!/ 나 자신이 공산주의자가 되느니/ 차라리 공산주의자들에게 맞아 죽으리라!”(시 ‘거부’, 위 같은 책)고 썼다.


그는 ‘한 공산주의자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마르크스주의의 사회 해석에는 공감하기에 “가장 좌파적인 볼셰비키 당원보다도 더 좌파적”이지만 어느 정당에도 소속될 수 없고, 혁명의 방법에도 동조할 수 없다는 자세였다.


히틀러가 제국의 수상으로 임명(1933년 1월30일)되자 스위스 헤세의 집은 망명가들의 은신처가 되어 토마스 만, 베르톨트 브레히트 등도 찾곤 했다.


오랜 친구이자 작가인 우겔 핑크는 나치 청년단에게 보낸 글에서 읽을 만한 독일 문학인 목록 중 헤세를 탈락시켜버렸다. 대전이 본격화되자 헤세의 책은 금지당했고 더 찍고 싶어도 종이가 배당되지 않았다.


전쟁이 끝나자 그는 서독의 반공 풍조를 강력하게 비판하면서도 동독이 제안한 예술원 명예회장직도 거부했다.


<유리알 유희>로 노벨문학상을 받은(1946) 그는 연미복이 안 어울린다며 시상식장에 불참하여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는 친나치 전범으로 특별법정에 선 친구 핑크의 변론 요청을 거절하며 이렇게 썼다. “히틀러를 곧이곧대로 믿었고, 그의 정당을 순수하고 애국적이며 이상적인 것으로 믿었다는 것은 서글픈 일이고 용서될 수 없는 일이네. 그것은 또한 독일 지성인 90%의 죄이기도 하네.”


민족주의는 위험하다


이 평화와 양심의 대가는 카프카의 친구 막스 브로트가 갓 독립선언을 한 이스라엘이 아랍의 공세 위기에 처해 있으니 항의해달라는 요구도 거절했다. 헤세에게는 유대민족주의도 위험해 보였기 때문이다. 헤세야말로 진정한 순수문학인의 스승이다.


임헌영 문학비평가·민족문제연구소 소장


<2016-05-20> 한겨레21

☞기사원문: 양심의 이름으로, 헤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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