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친일인명사전 편찬이나 ‘백년 전쟁’ 영상 제작으로도 유명한 해당 연구소의 대변인 역을 맡고 있는 교육홍보실장 박한용 박사를 <주간현대>가 만났다. 박한용 박사는 친일인명사전 편찬위원이기도 하다. 이들은 자신들과 대척점에 선 ‘뉴라이트’의 역사관은 결국 친일파들에 대한 정당화기 위한 목적을 갖고 있다고 설명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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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라이트 경제학자들, 통계만으로 ‘역사 해석’하는 경향 있어
일제 때 근대화됐다는 그들의 주장, 사실과 많은 부분 달라…
반공 개념 없던 시기, 공산 독립 운동가들과 싸운 것도 포장
일제 말기 100% 무상교육 계획안…日군사요원 양성이 목적
[주간현대=조미진 기자] 친일인명사전 편찬위원인 민족문제연구소 박한용 교육홍보실장은 앞서 3번째 인터뷰에서 뉴라이트 측이 ‘조선총독부에 참여했던 조선인들이 해방이후 1960년대 이승만과 협력해 대한민국 건국을 했고, 박정희 때는 조국 근대화의 기수가 되었다. 따라서 이들을 친일파라고 부르지 말고 조국 근대화의 건국의 아버지로 부르자’라는 논리를 펴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후 인터뷰를 이어서 진행했다.
– 뉴라이트의 주장이 정말 그런가? 그런데 일제 강점기 우리가 빼앗긴 것이나 손해가 훨씬 더 많겠지만, 플러스 요인이 하나도 없지는 않을 것 같다.
▲ 그렇게 볼 수도 있다. 일제 강점기 플러스된 것이 전혀 없다고 볼 수는 없겠다. 문제는 한국의 경제성장이 뉴라이트 측 주장처럼 이뤄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들은 경제학자들이 주축이기에 통계로만 이야기 한다. ‘조선총독부 통계연감’으로만 토대로 말한다. 그러나 역사의 관점에선 ‘조선총독부가 왜 학교를 이렇게 많이 세웠을까’하는 점이 본질이다. historical fact(역사적 사실)와 historical truth(역사적 진실)는 다른 것이다. 일제 강점기 학교가 많이 증설 됐다는 것은 fact(팩트)다. 그러나 historical truth(역사적 진실)는 이와는 다르다.
일본이 한참 세계 전쟁 중이라 군사비도 부족한 상황에서 조선총독부가 왜 식민지 한국에서 왜 학교를 많이 세웠을까? 이를 설명해줄 조선총독부 비밀문서가 있다. 일본인 학자가 발굴해 이미 1970년대에 공개 된 것이다. 일제시기 보통학교(현재의 초등학교)를 1면 당 1학교를 세우는 것이 목표고, 나아가 20~30년 안에 100% 무상교육 계획이 나온다. 그 시절에 사실 정말 놀라운 계획 아닌가? 이것만 딱 보면 거의 식민지로는 OECD급 국가를 만들어주겠다는 수준으로 보인다.
이런 내용을 누가 입안 했을 것 같나? 관계부처는 물론 조선총독부 학무국(현재의 교육부에 해당)으로 돼 있다. 그런데 해당 법안의 입안자가 조선군 사령부였다. 현재로 보면 국방부가 무상교육에 관한 계획안을 제출한 것이다. 즉 군사요원을 만들려는 목적이었다. 전시하의 군인은 다른 소모품과 달라서 15년 정도 훈련을 받아야 총을 쥘 수 있지 않나? 아기를 바로 군대를 못 보내니까.
중국전선에 아무리 일본군을 쏟아도 미약한데, 중국보다 더 넓은 태평양에 일본군인들 쏟아 넣으니 장병수가 부족했던 것이다. 그런데 조선에 조선인들이 많았다. 조선인들을 군인으로 활용만 할 수 있으면 참 좋은데, 총을 쥐어 줬을 때 ‘천황’에게 충성하는 게 아니라 “대한 독립만세” 할 수 있다는 것이 일제의 고민이었다.
1930년대 중후반 보통 여자들은 한글도 모르는 시대였다. 일본에 충성하는 황국신민이 돼야 하는데 조선인 엄마에게서 자라서 ‘조센진’이 되지 않도록 일찍부터 떼어내 황국신민학교, 줄임말로 ‘국민학교’ 제도를 만들어 철저하게 세뇌 시켜 일본 군인으로 만들려고 무상교육까지 주장 한 것이었다.
– 충성스러운 일제 황국신민으로 만들기 위해 국민학교 무상교육까지 계획했다는 배경에 대해 근거가 나온 것이 있나?
▲ 있다. 조선군 사령부 자료가 있어 역사학자들은 다 아는 사실이다. 또 학교 시간표를 보면 된다. 당시 교련과 노동에 대한 과목이 전체 학교 시간표의 절반을 차지한다. 일본어 교육, 송진 채취 라던지 근로 실습, 이것은 전시에 후방에서 물자 동원하는 일을 가르치기 위한 수업이다.
그래서 이 시대 아버지·어머니들은 최초의 사회화 과정에서 ‘식민지 파시스트’ ‘식민지 노예’로 교육된 아픔이 있다. 이것이 역사학자가 보는 시각이다.
그런데 일부 뉴라이트 경제학자들은 일제시대 통계만 놓고, ‘학교 다니는 사람이 늘었으니 문맹이 줄었겠다’라고 본다. 그리고 철도, 도로, 항만 등 교통을 일제가 건설해줘서 해방 후 경제발전에 도움이 됐다는데 실제와 전혀 다르다. 일본의 철도는 너비가 좁은 협괴(좁은 괴도) 철도인데 6.25 전쟁으로 전부 파괴 됐다.
일제 때 만든 공장들의 70~80%도 파괴 됐다. 원산 폭격 등으로 북한은 완전히 잿더미가 됐다. 평양에서는 을밀대 건물 딱 하나만 남았다. 북한은 당시 중공업지대였다. 일제시대 최고의 중공업 관련 대기업들이 북한에 있었다. 그러다가 한국 전쟁으로 80%가량 파괴됐다. 그런데 이후 1960년대까지는 북한이 남한보다 경제 성장을 더 많이 했다. 이 점은 남한에서도 인정하고 있는 부분이다.
일제가 남겨준 공장 덕분에 박정희가 성장을 시킬 수 있었다고 뉴라이트가 주장하지만, 오히려 북한에 공장들이 밀집해 있다가 전쟁으로 다 파괴되고도 그 직후에는 경제 성장이 (남한보다) 더 빨랐던 현상에 대해 설명이 안 된다. 하나하나 따져보면 이렇게 인과관계가 맞지 않다.
또 이때 미국이 들어오면서 모든 것이 달라졌다. 열차도 일본식 협괴 열차에서 미국식 광폭열차로 바뀌었다. 미국의 기준으로 모든 것이 달라진 것이다. 기계 나사, 볼트부터 일제 것과 미국 것은 완전히 달랐다. 이러한 상황 변화는 논문으로도 이미 다 나온 것이다. 이렇게 전부 따져보면 이영훈 교수를 중심으로 한 뉴라이트들의 논리가 맞지 않다.
미국의 원조나 지원 속에 이뤄진 것이 사실은 더 많았고, 일본에 의해 혜택 본 것은 별로 없었다. 조금 기여한 바는 있겠지만 결정적인 기여는 전혀 아니고, 마이너스가 훨씬 많다.
그리고 ‘일제 강점기에 적지 않은 조선인들이 친일을 했다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조선총독부와 같은 국가기관에 참여해서 근대 국가를 운영하는 경험을 익혔다’고 이들이 주장하는데 이는 즉 ‘친일행위를 한 사실이 중요한 게 아니라 근대적 훈련만 받으면 된다’는 식이다.
일제 때 경찰관을 했다면 ‘근대식 경찰’이 된다는 논리다. 이 사람들을 이승만이 받아들여서 대한민국 건국에 기여 했기에 건국의 아버지들이고, 이후 박정희 시대에 박정희와 함께 근대화 혁명을 했다. 그래서 조국 근대화의 기수라는 논리다. 그러면 한번 따져 보자. 이 말이 갖는 큰 문제 중 하나는 빅정희에 면죄부를 준다는 점이다.
그들(뉴라이트)은 일제 때 독립 운동가만 잡았던 직책이 고등계 형사에 대해 ‘일제강점기 고등계 형사를 함으로써 근대적 수사기법을 익히고, 해방 후에 이들이 다시 우리나라 경찰 최고 간부가 됨으로써 공산당을 잡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일제시기 공산주의자를 잡는 노하우를 습득 했기에 이들이 해방이후 수많은 빨갱이들을 때려잡아 대한민국을 지킬 수 있었다. 백선엽, 정일권, 박정희 같은 일제 때 장교들에 대해서도 만주군관학교와 일본 육군 사관학교를 마침으로써 근대적 군사기술을 습득하시고…’이런식으로 서술했다.
이러한 것도 뉴라이트 입장의 ‘식민지 근대화론’ 맥락이다. 또 만주에서 공산주의 독립운동가(빨치산)들과 싸운 것에 대해 ‘일찍부터 만주에서 공산주의 계열과의 전투 경험을 익힘으로써…’라고 라며 일본 편에 섰던 반민족 매국 행위를 공산주의자들과 전투경험을 익힌 것으로만 정리해버렸다.
‘이들이 일제 때 만주에서 이들과 전투 경험이 있었기에 6.25 전쟁 때 북한 인민군이 내려오고 중공군이 내려와도 대한민국을 수렁에서 건질 수 있었다. 대표적인물이 백선엽·박정희 ·정일권 이런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즉, 뉴라이트의 이런 주장은 친일파들의 모든 행동에 면죄부를 주게 된다. 그러니 친일파와 관계자들은 이들에게 기립박수를 칠 수 밖에 없다. 그런데 앞서 밝혔듯 일제 때는 미국과 소련은 서로가 적이 아니었다. ‘반공 개념’이 한반도 지역에 성립하지 않는 시기다.
기업인에 대해서도 ‘일찍이 일제 때부터 기업을 함으로써 경쟁력을 갖춰서 해방 후 대한민국 산업화에 기여할 수 있었다. 이승만도 친일파까지도 받아들인 독재자가 아니다.
– 이승만 대통령에 대해서는 어떤 입장인가?
▲ 역사학에서는 크게 두 가지를 비판하고 있다. 하나는 남북 분단의 주범이라는 점이다. 이승만이 남한 단독 정부를 가장 먼저 주장했다. 또 하나는 독재다.
이에 뉴라이트는 이러한 비판은 잘못이라며 ‘분단 필연론’을 들고 나온다. 남북 분단 된 것은 어쩔수 없었다는 논리다. 통상의 역사학자들과는 굉장히 다른 역사 인식이다.
그러나 우리가 분단 되어야 할 이유는 없었다. 한반도는 무려 고려시대부터 단일국가였다. ‘38도선’은 일본군 무장 해제를 용이하게 시키려는 목적의 ‘일시적 군사경계선’이었다. 38도선 이북은 일본의 관동군 관할 지대였는데 이곳을 소련군이 접수한 것이다.
38도선 이남은 한반도에 있었던 조선군이 있었다. 38선 이남은 미군이 관리하기로 했다. 국경선이 아니었다. ‘모스크바 3상회의’라던지 ‘미소 공동회의’의 원래 의제도 이 38선이 자칫 분단으로 나아가서는 안 되기에 원상회복시키고 통일된 독립 국가를 만드는 것이 원래 의제이고 아젠다 였다.
그런데 우리가 대처를 잘 하지 못해서 분단이 되고 말았다. 그런데 이 부분에 대해 그들(뉴라이트)은 그렇게 얘기하지 않고 ‘원래 분단은 어차피 되게 돼 있다’고 포장한다. 즉 결과를 필연으로 바라본다.
그러면서 분단을 막았던 ‘김구’ 등 수많은 사람은 어리석었다고 바라본다. 이러면서 ‘이승만 외교 기제론’을 들고 나온다. 사실을 알고 보면 뉴라이트의 이런 논리는 코미디다. 이승만 대통령은 일찍부터 ‘미국 워싱턴 정가’에 있었기에 국제 정세에 능통했다. 그래서 ‘해방 후 한국에 들어오면서 누구보다도 먼저 한반도가 분단일 될 것을 알고 왔다’고 한다.
1946년 이승만은 ‘어차피 소련이 이북에 들어왔고, 남쪽은 남로당 박헌영이 있다. 이남까지 빼앗기면 안 된다. 남쪽이라도 건져야 한다’는 ‘정읍 발언’을 했다. 정읍이라는 곳에 가서 이승만이 발언 한 것이다. 서울에서는 미소 공동위원회가 열려 통일 정부 수립에 대해 논쟁하고 있는데 이승만은 아랫 지방 내려가서 ‘따로 따로 갑시다’ 이렇게 주장한 것이다.
– 그러면 왜 그렇게 발언을 했다고 보나?
▲ 속된말로 미리 침을 뱉어 놓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 그런데 이승만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직책이 있었지 않나?
▲ 그건 맞다. 임시정부 초대대통령을 했다. 그런데 이후에 탄핵이 됐다.
– ‘횡령’ 문제가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 맞다. 이승만이라는 인물의 행적을 살펴보면 돈을 정말 좋아하는 사람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일제 때 미국에 있을 때 10여개의 소송에 휘말렸는데 전부 돈과 관계된 소송이었다. 독립운동 관련 소송은 없었다.
– 그래도 이승만 대통령이 독립운동을 한 것은 사실이라고 알고 있는데.
▲ 독립운동을 하기는 했다. 그런데 다른 문제들이 많았다. 독립 운동을 했다는데 그때 왜 꼭 여자문제와 돈 문제가 따라다녔느냐는 것이다. 권력투쟁, 횡령 문제, 여자문제 이 3가지가 늘 같이 있었다.
또 뉴라이트는 ‘이승만은 분단을 미리 알고 남한만이라도 공산화(적화) 되지 않게 사전적 대응을 해서 남한 공산화를 막았다. 반면 김구선생은 국제정세에 어두워 북한과 소련에 이용 당했다’고 (2008년 뉴라이트 측의 ‘교과서 포럼’이 발간한 ‘대안 교과서 한국근현대사’에) 쓰고 있다.
따라서 ‘이승만 대통령을 분단의 주범이라고 말하지만 남로당에게 남한이 적화 됐다면 너희는 오덕 수용소 행이었거나 전부다 굶어 죽었을 것이다. 이승만 대통령이 남한을 건져줬기에 오늘날 너희가 대한민국 국민이 된 것이다. 따라서 이승만을 분단 주범이라고 부르지 말고 ‘아버지’로 불러라’ 이것이 ‘이승만 국부론’이다. 좀 더 격식 있게 표현해야 하니, ‘이승만이 자유민주주의 초석을 닦았다’고 해당 교과서에서 쓰고 있다.
그런데 나는 아무리 봐도 이승만 대통령이 자유민주주의를 위해 기여한 것을 못 찾았다. 독재만 했지. 독재자를 그렇게 말하는 것이 말이 되나.
우리가 문제제기 하는 점은 ‘분단 필연론’ 자체가 ‘사기’라는 것이다. 그것은 결과지 애초부터 운명적인 것은 아니었다. 왜? 유럽의 오스트리아만 봐도 4개국이 신탁통치를 했다. 그런데 통일국가가 됐다.
뉴라이트측은 이승만 대통령의 좋지 못한 점은 ‘사기’를 친다. 우리가 6.25 전쟁 때 사흘만에 서울을 빼앗겼다. 정확하게는 사흘 만에 이승만이 서울에서 도망을 먼저 가버렸다. 처음에는 대구까지 갔다가 부하가 ‘각하 너무 (내려)가셨습니다. 민심이 소란스럽습니다’ 하니까 비판 받을 것 같아서 대전까지 다시 올라왔다.
그런데 그때 이승만은 라디오 방송을 통해 ‘저는 서울에 있다. 우리 국군이 서울을 사수할 테니 절대로 피난 갈 필요 없고, 동요할 필요 없다’고 거짓 방송을 했다.
– 왜 그런 방송을 한 것이라고 보고 있나?
▲ 작전상 도주가 아니라 먼저 도망 간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쉽게 말해 피난민이 몰리면 자기가 빨리 피난을 갈 수 없으니 먼저 가고는 ‘아차 서울 시민들이 남았네’ 하는 식이다. 그래서 피난민들이 피난을 많이 못 가게 된 것이다. 그런데 이승만 측은 북한 인민군이 서울까지 오면 바로 남쪽으로 내려올 수 있으니 그것을 막으려 한강 철교까지 폭파시켰다. 그 바람에 국민들은 피난도 어려웠다. 그래서 수많은 사람이 인민군에게 재판받고 목숨을 잃고, 석달동안 인민군 치하에서 살아야 하니 부역도 하게 됐다.
이런 점에 대해서도 뉴라이트 측은 ‘사실을 모르는 소리’라며 ‘수도 서울을 3일 동안 지킨 덕분에 그 기간 후방 전선을 준비 시킬 수 있었다’고 주장한다. 역사 공부를 제대로 안하면 뉴라이트의 논리에 속을 수 있다. 우리는 이승만이 먼저 피난 간 사건이나 한강 철교 폭파한 사건에 대해 내막을 아니 그들의 주장에 웃을 수 있는 것이다.
또 ‘이승만 외교 귀재론’을 이야기 하면서 뉴라이트 측에서 들고 나오는 것이 있다. 외국에서는 신생국가인 대한민국을 아프리카보다 더 몰랐는데 이승만의 요청에 16개국이 파병을 왔다는 점을 공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어찌보면 16개국에서 파병 왔다는 것이 국가 입장에서는 수치스러운 일 아닌가? 사실 우리 스스로 국방을 해결하지 못해서 16개국이나 도와주러 온 것이지 않나? 1~2개 국가도 아니고.
우리의 국방력을 충분히 키우지 못한 것에 대해 반성하며 분석해야 하는데, 그러지 않고 뉴라이트 측은 ‘앉은 자리에서 이승만이 미국에 전화한통 하니 16개국이 우리나라에 파병 왔다. 전세계에서 이렇게 많은 나라를 순식간에 동원한 대통령이 있었나? 라고 말한다.
그냥 들어보면 맞는 이야기인 것도 같고 틀린 말 같기도 하다. 사실은 궤변인데. 또 ‘무엇보다 이 시기 이승만의 가장 큰 업적은 미국과 군사동맹을 맺었다는 점이다. 드디어 한미상호방위조약을 맺게 됨으로써 우리가 안심하고 경제 건설에 집중할 수 있게 됐다’는 식으로 해당 교과서에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실상은 우리의 군사권을 미국에 넘겨 준 것이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한미연합사’라고 한다. 우리나라의 전작권(전시 작전통제권)이 그때 없어진 것이다. 이것이 큰 자랑이 됐다. 이분들이 강의를 하면 ‘미국군대에게 전작권을 넘겨줬으니 안보에 대한 걱정을 덜게 되어서 경제 건설에 힘쓰게 됐으므로 이는 이승만 대통령의 업적이고 은혜’라 이야기를 한다. 그러니 남산에 이승만 대통령의 동상을 세워야 한다고 해서 4.19혁명 때 시민들이 무너뜨린 동상을 2011년에 동상을 다시 세운 것이다.
<2016-06-17> 주간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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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현대가 만난 사람] 민족문제연구소 박한용④ “뉴라이트의 이승만 추앙, 왜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