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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펀딩] 김수영 격하와 교과서 국정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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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우리의 거울이다. 우리 민족이 수 천년 동안 함께 써온 자서전이다.”


그렇습니다. 거울은 우리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여줍니다. 이쁘고 아름다운 구석이 보이는가 하면 더럽고 추한 구석도 보입니다. 영광도 있고 추억도 있습니다. 집단 자서전이기에 어느 몇 사람이 고치겠다고 덤벼서 고쳐지는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문제는 다음에 있습니다. 같은 얼굴을 보고 이쁘다고 하는 사람과 밉다고 하는 사람이 갈라집니다. 물 반잔을 보고 반잔이나 있다고 하는 사람과 반잔 밖에 없다고 하는 사람으로 갈라집니다. 사물을 보는 관점이 사람마다 다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같은 역사적 사실이 보는 이의 가치관에 따라 달리 해석되면서 한동안 긍정사관이냐, 자학사관이냐 하면서 논쟁을 벌인 일을 기억합니다.


“그래서 역사를 보는 눈,

즉 ‘역사관’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역사를 기술하는 사람이 역사를 왜곡하는 일은 바로 바른 역사관을 가지지 않아서 생기는 일입니다.


총선이 끝난 직 후 4월 26일, 박근혜 대통령은 언론사 편집국장, 보도국장 간담회에서 국정 교과서 추진의지를 밝히면서 “세계 국경선이 없어질수록 자라나는 세대는 국가 정체성을 바르게 배워야 한다. 지금과 같은 교과서로 배우면 통일이 북한에 의해 될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박대통령 말씀대로 국가 정체성을 바르게 세우는 일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정말 지금의 교과서로 배울 경우, 평화통일이 아니고 북한에 의한 일방적인 통일이 된다면 얼마나 위험한 일입니까? 그런데 여기에도 어떤 모습의 국가 정체성이 바른 것이냐는 문제가 남습니다. 그 문제를 풀 수 있는 혜안은 우리의 역사를 바른 역사관을 가지고 바라볼 때 생겨나는 것입니다.


우리 미래세대에게 바른 역사관을 가지게 하는 일, 그것은 곧 우리의 정체성을 바로 세우는 일이자 대한민국의 미래를 담보하는 일입니다.


정지영(영화감독), 명진(스님), 이수호(이주노동희망센터 이사장), 박재동(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만화가), 김민웅(경희대 미래문명원 교수), 정범구(전국회의원), 황현산(문학평론가), 허은실(시인), 백승우(영화감독) 등이 글을 씁니다. 즉, 그들이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어떤 역사 교육’이 바람직한가를 물으며 카카오 스토리펀딩 독자들과 피드백하고자 합니다.

[연재목록]


1화
일본인은 베트남전을 어떻게 생각할까


2화
역사교육이 가르치지 않는 것들


3화
안창호 선생이 안중근 의사 동생이니?


4화
반복되는 역사, 문제는 과거 아닌 현재


5화
국정교과서의 추억


6화
독일은 과거사를 어떻게 인식하는가


7화
언니들이 왜 전쟁에 나갔어?






<우리 역사 교육 어떻게 해야 하나 8화>

김수영 격하와
교과서 국정화

“시여 침을 뱉어라”


글 ㅣ 황현산 (고려대명예교수/문학평론가)


▲ 시인 김수영(1921 ~ 1968)


자유경제원이라는 단체에서 시인 김수영을 격하하기 위한 연속 세미나를 열고 그 자료를 온라인으로 배포했다. 이 세미나는 두 사람의 문화평론가와 대학교수와 겸임교수 등 네 사람이 참석하여 네 차례에 걸쳐 열렸고 한 번의 종합토론이 덧붙여졌다. 주최 측으로서는 상당히 힘도 들이고 돈도 들였을 행사인데 내용이 그만큼 풍요로운 것은 아니다.

백낙청, 염무웅을 비롯한 민족·민중문학 주창자들이 정치적 목적에서 김수영을 내세워 그가 과대평가되었다는 것, 김수영은 좌파 문인으로서도 굳건한 신념과 충분한 재능을 갖추지 못해 ‘패션 좌파’에 불과하다는 것, 김수영의 시는 그를 이용하려는 몇몇 좌파이론가들에 의해 왜곡되었지만 자유주의 문학으로 수용하는 일도 가능하다는 것과 같은 말들이 반복되고 있을 뿐인 데다, 이런 주장마저도 자주 사실 관계가 어긋나고, 참고하는 자료도 편중되어 있어서, 그에 대한 본격적인 비평은 오히려 과분한 대접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이 일을 꾸민 자유경제원이 국사교과서 국정화를 위해 여론몰이를 주도해온 단체인 것을 염두에 두면, 심상하게 넘길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김수영 격하가 국사교과서 국정화를 뒤이은 국어교과서 국정화의 단초일 것임이 불을 보듯 뻔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시에 대한 협소한 이해와 어떤 목적을 위한 조바심에서 나온 수미 없는 언설에 일일이 대꾸할 필요까지는 없을 것 같다.

김수영의 문학사적 의의가 무엇이며, 그의 시가 용출하는 끊이지 않는 생명력이 어디에 근거를 두고 있는지를 확인하는 것만으로 내용 없는 분란을 끝낼 수 있다고 본다.

▲ 김수영 격하 세미나에 관한 6월 17일자 경향 신문의 보도 헤드 라인(캡쳐)


김수영의 시를 비판하는, 비판한다기보다 증오하는 사람들은 그의 거친 언어를 들먹이지만, 김수영은 정작 그 거친 언어를 통해 우리 시에 용기를 주었다. 그는 시에 시적으로 된 말을 모은 것이 아니라 모든 말이 시적 힘을 지니도록 시를 썼으며, 이점에서 그는 자유시의 이상을 실천했던 것이다.


그에게서 처음으로 시적인 말과 일반적인 말의 차별이 완전히 사라졌다. 일상의 대화와 나날의 일기, 신문기사와 술자리의 흥분된 토론에서 거두어들인 것 같은 시의 말들은 하나같이 사물의 속내를 짚어 그것과 그 속에 살아가는 인간의 감정이 맺는 관계를 예민하게 드러내고, 어떤 의문을, 어떤 욕망을, 어떤 성찰을, 어떤 전망을 거기서 솟아오르게 함으로써 유래 없이 강력한 시정을 형성했다.


그에게 시는 소란한 현실 위에 걸리게 될 예쁘고 평화로운 액자도 아니었고, 삶의 전투에서 패배한 사람들이 찾아가는 망명지도 아니었다. 그것은 현실을 현실로 발견하는 일이자 그것을 정신화하는 일이었고, 현실의 확장이자 그 전복이었다. 현실을 시적으로 처리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에서 시를 추출하고, 현실을 시로 끌어올리는 이 능력은 곧바로 우리 문학에서 모더니즘과 사실주의를 연결시키는 힘이 되었다.


현대파들은 종족적 자연정서와 농경적 생활정서를 떠나서도 ‘도시의 피로'(사랑의 변주곡)와 마모 속에서 비범한 시정이 앙양되는 실증을 거기서 보았으며, 사실주의자들은 한 사회를 분석·고발하고 건전한 인간관계를 갈구하고 전망하는 사람들의 절실한 감정이 시적 서정과 다른 것이 아님을 거기서 알았다. 시적 감수성과 심미감의 폭이 문득 넓어졌다. 이제 아무리 난폭하거나 실망스러운 현실도, 아무리 조야하고 생경한 언어도, 그것이 인간의 마음과 깊고 감동적인 관계를 형성할 때, 시가 되고 아름다운 것이 된다.


심미감이
확장되었다는 말은

그것이 세련되었다는 뜻도

포함한다

배척의 원리에 기초하지 않는 이 새로운 심미감은 무정한 현실의 외관에 모험의 길을 내고, 정돈될 길 없는 사물들이 균형 있는 자리를 차지하게 될 더 큰 세계를 육체의 감각 속에 펼쳐 놓는다. 그런데 김수영 비판자들은 이 점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들의 심미감은 좁고 작아서 그의 모더니즘에서는 ‘패션’을, 그의 사실주의에서는 ‘좌파’를 볼뿐이기 때문이다.


▲ 김수영의 산문집


“김수영은 우리 시에서
지적인 것의 개념과
용도를 바꾸었다


그는 알려진 지식체계의 진실성을 다시 한 번 증명하기 위해 또 하나의 실험 데이터를 제공하는 방식으로 시를 쓰지 않았다. 한 번 사물 앞에서 놀라고, 그 놀라움을 저 지혜의 말로 위무하는 절차, 다시 말해서 발견과 정돈의 기승전결은 그의 시에 없다.


마찬가지로 평론가가 알아서 말하게 될 것을 미리 써 놓는 식의 암묵적 공모의 시 쓰기가 그에게 용서될 수는 없었다. 김수영이 말하는 ‘온몸으로 시 쓰기’의 본뜻도 거기 있다. 지식체계에 복무하기를 거부하고 탈주의 모험을 감행하는 그의 시가 말끔하고 지적으로 숙련된 외관을 누릴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한국 현대시의 한 쪽을 오랫동안 지배해온 ‘지성주의 현대파’는 시 속에 혼란의 장소인 몸의 노출을 바라지 않았다. 그들은 현대시의 반항과 모험, 그리고 그 동력이 되었던 육체적 감각의 혼란을 불편하게 여겼을 뿐만 아니라 두려워했다. 이 두려움이 여전히 한국시에 남아 있다는 것은 각종 문학상의 수상작이나 공모의 당선작을 보면 알 수 있다.

김수영은 다른 방식으로 지적이었다. 그는 쉽게 정합되지 않는 현실 속에서 기존의 체계적 지식으로 해명할 수 없는 자리를 발견하고 그것을 감당해 낼 다른 삶을 육체적 감각과 마음의 감동으로 우선 실천하려 하였다. 모든 체계의 억압으로부터, 자신이 쓰고 있는 시로부터도 탈주하는 김수영의 시는 이렇게 해서 존재의 변모를 사회적 변혁과 일치시킬 수 있는 길을 열었다. 김수영의 시가 지닌 생명력이 거기 있고, 독재 권력이 김수영의 시를 두려워하는 이유가 거기 있다.


▲ 김수영의 시 ‘눈’. 독재 치하의 부정한 시대를 극복하려는 순수한 삶의 의지를 노래.

최근에 교육부의 고위공직자였던 한 인물이 ‘민중 개돼지론’과 ‘신분제 공고화론’을 설파하여 크게 물의를 일으켰다. 전후의 정황을 살펴보면 그 일련의 발언이 교과서 국정화 논란에서 비롯되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바로 이 물의에 뒤이어서, 김수영 격하 세미나에 참석했던 한 국립대 교수는 ‘천민민주주의’를 운운하며 어떤 귀족적 품성이 그 천민성을 극복할 수 있을 것이라는 뜻의 말을 했으며, 같은 자리에 참석한 한 사립대 겸임교수는 ‘아인슈타인도 한 표 벙어리 삼룡이도 한 표’가 말이 되느냐며 민주주의는 바보들의 제도라고 강변했다.

국사교과서건 국어교과서건 교과서의 국정화 획책이 민주주의를 그 뿌리부터 부정하는 속내에서 출발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좋은 예다. 아니 교과서의 국정화 자체가 사상에 대한 억압이며 민주주의에 대한 부정이다.


<2016-07-18> 다음스토리펀딩

☞기사원문: 김수영 격하와 교과서 국정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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