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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민관 의거’ 현장을 아십니까?..서울시의회 재조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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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지금의 서울시의회 건물이 일제시대 최후의 의열 투쟁, ‘부민관 폭파 의거’ 현장이라는 사실 아십니까? 대부분 사라진 의열 투쟁 현장과 달리 이곳은 아직 우리 곁에 남아있습니다.


정혜진 기자가 다녀왔습니다.


<기자>


일제 패망 20여일 전인 1945년 7월 24일, 친일파의 거두 박춘금이 당시 시민회관이었던 경성 부민관에서 ‘아세아 민족 분격 대회’를 개최합니다.


[일본군 장군 역 : 박춘금 선생, 지금 관동대지진 때 했던 조선인 시체 청소, 그걸 이번엔 이 조선 땅에서 하겠다는 겁니까?]


바로 이날, 애국청년당 소속 유만수, 강윤국, 조문기 지사가 부민관에 잠입합니다.


[유만수 지사 역 : (폭탄 의거가) 위험하다 한들, 이 나라 꼴, 지금 이 세상보다 더하겠니.]


세 애국지사는 일제의 학살 음모를 막기 위해 폭탄을 터뜨렸고 집회는 열리지 못했습니다.


[조문기/지사, 2005년 생전 인터뷰 : 독립운동은 일제 마지막 순간까지 계속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 사건이라는 것에 (자부심을 느낍니다.)]


서울시의회 건물입니다.


[조완기/서울시의회 입법정책자문관 : 현재 의장단석이 무대라고 보고, 그 출입문 입구에서 터진 겁니다, 폭탄이.]


광복절을 앞두고 지상 12층 높이의 옥탑도 SBS 취재진에 처음 공개됐습니다.


일제 시대 서울에서 가장 높았던 곳이어서 시내 곳곳을 감시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어 관련 연구도 필요해 보입니다.


[이순우/민족문제연구소 책임연구원 : 일제가 만든 그 일제의 잔존물이라 하더라도 (그 속에 우리 민족의) 항거의식이랄까 그것이 오롯이 담겨 있는 공간입니다.]


의열 투쟁 현장 대부분이 사라진 만큼 부민관 의거 현장은 역사 교육의 장으로 새롭게 조명되고 있습니다.


(영상취재 : 설치환, 영상편집 : 박춘배)


정혜진 기자hjin@sbs.co.kr


<2016-08-15> SBS

☞기사원문: ‘부민관 의거’ 현장을 아십니까?..서울시의회 재조명


※참고기사


일제강점기 최후의 의열투쟁‘부민관 폭파 의거’와 조문기


박수현(민족문제연구소 편찬실장)


□ 일본에서 파업을 주도하다

 

일제 패망 직전 서울의 한복판에서 일제와 친일세력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던 ‘부민관 폭파 의거’는 주역인 조문기(趙文紀), 유만수(柳萬秀), 강윤국(康潤國) 등의 투철한 민족의식과 치밀한 사전 계획이 결합된 의열투쟁이었다. 특히 조문기는 어린 시절 외조부 밑에서 생활할 때 그 인근에 살던 송병준 일족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듣고 또 직접 이들의 행태를 목도하면서, 친일파에 대한 적개심과 민족의식이 유달리 강했던 인물이다.

 


▲ 부민관 폭파의거의 주역(왼쪽부터 강윤국,조문기,유만수)

 

 


16세의 나이에 도쿄 근교 가와사키에 있는 군수업체 일본강관회사의 훈련공을 자원한 것도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서는 일본을 제대로 알아야한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일본으로 건너간 뒤 그는 평생 동지인 유만수를 만났다. 4살 위인 유만수는 독립운동을 위해 만주로 갔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6개월 만에 국내로 들어와 기회를 엿보던 중 훈련공 모집광고를 보고 일본에 온 것인데, 그 목적 또한 독립운동을 위한 것이었다. 서로 뜻이 같다는 것을 알게 된 두 사람은 함께 독립운동에 투신하자는 결의를 다지게 되었고, 그 첫 실행이 조선인노동자 파업 주도였다.

 


일본강관회사는 전쟁이 장기화 되면서 군수공장으로 전환된 업체로서, 훈련공은 대부분 여러 차례에 걸쳐 조선에서 모집한 20대 전후의 조선청년들이었다. 그러나 모집 광고와 달리 조선인들은 가혹한 노동에 시달려야 했고 여기에 민족적 차별과 멸시까지 받아야 했다. 조문기와 유만수는 조선인 노동자들을 결집해 대대적인 파업을 일으켰다. 이 파업은 철저한 언론통제로 보도가 되지 않았지만, 3일 동안 계속된 파업으로 가와사키가 발칵 뒤집힐 정도로 큰 사건이었다. 더욱이 전시체제하 군수공장에서 일어난 조선노동자들의 파업사건이었기 때문에 그 파장은 상당히 컸다. 파업에 참여했던 많은 조선인들이 경찰에 끌려가 고초를 겪었으며 잠적한 조문기와 유만수는 일본 전국에 지명수배가 내려졌다.

 


□ 국내로 돌아와 비밀결사‘대한애국청년당’을 결성하고 거사를 계획하다


지명수배 된 조문기와 유만수는 귀국을 결심했다. 이들은 개별적인 독립운동보다는 임시정부와 같은 단체의 조직원으로 활동하기를 원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큰 일을 벌여 독립운동가로 인정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명수배 된 일본에서 자신들의 계획을 실천에 옮기기에는 현실적으로 어려운 일이었다. 이들은 구체적으로 1단계 조선으로 돌아가 동지 규합, 2단계 비밀단체 결성, 3단계 친일 거두와 원흉 처단, 4단계 중국행이라는 계획을 세웠다.

 


1945년 1월에 귀국한 두 사람은 먼저 동지 규합에 나섰다. 주요 대상자들은 강윤국, 권준(權俊), 우동학(禹東學) 등 일본강관주식회사의 훈련공으로 같이 지내다가 먼저 귀국한 인물들이었다. 3월에는 그동안 포섭한 동지들 중에서 행동이 가능한 자들을 중심으로 소수 정예의 비밀결사 조직을 결성했다. 조직의 명칭은 ‘대한애국청년당’으로 정했다. 조직원은 조문기, 유만수, 강윤국, 권준, 우동학, 박호영 등 6명이었고 임시의장에는 연장자인 유만수가 추대되었다. 조직이 결성되자 곧 거사를 일으키기 위한 세부계획을 세웠다.

 


우선 친일거두 3명, 총독부 3명을 처단하자는데 의견을 모았다. 박춘금이 1순위로 거론되었으며, 이밖에 화신재벌 박흥식, 중추원 참의까지 오른 친일경찰 김태석 등이 거론되었다. 대상자 정보 수집은 강윤국, 박호영, 권준 등이 맡고 거사 때 사용할 다이너마이트와 권총 구입은 유만수가 담당하기로 하였다. 경비는 각자 조달하기로 했다. 또한 친일파 처단 외에 침략의 상징물 3곳을 폭파한다는 계획까지 세웠다. 1순위가 조선총독부 건물이고, 그 다음으로 용산의 군사령부, 동양척식주식회사 순이었다.

 


1945년 5월 명월관에서 박춘금을 비롯한 친일파들이 모여 ‘대의당(大義黨)’을 결성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대한애국청년당의 긴급회의가 소집되었다. 대의당은 태평양전쟁 막바지에 전쟁 협력과 황도주의 확산을 위해 박춘금을 중심으로 한 친일파들이 “일신일가(一身一家)의 소의(小義)를 포기하고 진충애국(盡忠愛國)의 대의(大義)에 살자”는 취지로 조직한 친일단체였다. 일제 말기 가장 적극적인 친일단체로서 당수인 박춘금을 비롯해 고원훈·김동환·김연수·박흥식·손영목·신태악·이광수·이성근·이승우·이원보·조병상·주요한 등 당시의 대표적인 친일파들이 거의 망라된 조직이었다. 대한애국청년당은 친일파 처단 계획을 실행하기 위해 대의당 결성에 관한 정보를 수집하는 등 거사 준비를 시작했다. 하지만 대의당 결성식이 갑작스럽게 이루어졌기 때문에 거사를 일으키기에는 준비하는 시간이 부족했고 무기구입 또한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더욱이 결성식 당일 날 경비가 삼엄하여 접근조차 어려웠다. 결국 대의당 결성을 저지하고 박춘금을 처단하려던 1차 계획은 실패로 끝났다.

 


□ ‘부민관 폭파 의거’를 단행하다


그러나 얼마 되지 않아 기회가 다시 찾아왔다. 대의당이 1945년 7월 24일 부민관에서 ‘아시아민족분격대회(亞細亞民族憤激大會)’를 열기로 한 것이다. 아시아민족분격대회는 그 취지서에서 밝힌 바와 같이 “일본군 육해군 장병들의 ‘성전(聖戰)’에 감사를 표하고 아울러 아시아 민족해방이 속히 이루어지기를 기원”하는 대회였다. 주요 참석인사는 박춘금을 비롯한 대의당 핵심인물 뿐 아니라 일본인과 중국인들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대한애국청년당원들은 ‘박춘금 처단’과 ‘대회 저지’를 놓고 난상토론을 벌였다. 확보된 무기 상태로는 두 일을 동시에 성사시키기에는 무리가 따랐기 때문이다. 모두 박춘금을 처단하기를 원했지만, 현실적으로 ‘대회 저지’보다 성공 확률은 적고 위험부담은 훨씬 높았다. 또 누군가의 희생이 담보되어야 하는 상황이었다. 결국 오랜 토의 끝에 아시아분격대회 저지를 만장일치로 결의하였다. 또한 다음 거사를 위해 최소의 인원으로 일을 추진키로 하고 조문기, 유만수, 강윤국 3인이 나서기로 결정되었다.

 


1945년 7월 24일, 세 사람은 아시아분격대회가 열리는 부민관에 직접 제조한 시한폭탄을 숨기고 잠입하는데 성공하였다. 경찰들이 대회장 주변을 철저하게 감시하고 있었지만 많은 사람들이 몰렸던 터라 발각되지 않았다. 그들은 박춘금이 강연을 하는 시간에 맞추어 폭탄을 터뜨릴 계획이었다. 그런데 폭탄 설치장소가 문제였다. 자신들의 위치가 청중석이었고 이곳에 시한폭탄을 설치한다면 강제로 동원된 많은 조선인들이 다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세 사람은 결국 감시의 눈을 피해 단상으로 올라가는 계단과 무대 밑에 폭탄 두 개를 설치하고 밖으로 빠져나왔다.

 

천만다행으로 행사관계자가 무대 관리를 하는 것쯤으로 알았던지 제지하는 사람이 없었다. 시한폭탄은 오후 9시 10분에 굉음을 내며 폭발하였다. 대회장은 아수라장이 되었고 아시아분격대회는 중단되었다. 당시 상황에 대해 <민족정기의 심판>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강연회가 최고조에 달할 즈음 오후 9시 10분 안팎으로 사람이 꽉 찬 부민관에 돌연 회장을 진동하는 폭음이 들리며 폭탄 두 개가 연속 폭발되어 회장은 별안간에 일대 수라장으로 변하고 대의당 당원 한 명이 현장에서 즉사하고 왜놈과 박춘금 일당의 간담을 서늘케 하였으며 불사신 조선민족의 의기를 만천하에 선양하였다.”

 


당황한 일제는 경찰력을 총동원하여 범인 검거에 나섰고 현상금 5만원을 내걸기까지 하였다. 또한 요시찰 대상자를 비롯한 수백명의 조선인들이 연행되었고, 혹독한 고문에 못 이겨 허위 자백한 사람도 수십 명에 달했다. ‘부민관 폭파 의거’는 일제강점기 국내에서 일어난 최후의 의열투쟁으로서 우리 민족이 일제가 패망하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항일투쟁을 멈추지 않았다는 사실을 입증한 사건이었다. 또한 한 달 후의 해방까지도 예견할 수 없는 절망의 서울 한 복판에서 ‘친일파의 격분대회’를 ‘민족 격분의 현장’으로 바꾸어 놓은 의거였다. 그렇기에 해방 이후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에게 회자되면서 그 역사성을 높이 평가받고 있다.

 


심지어 방송에서도 그 내용을 드라마로 다루면서 사실을 왜곡하는 현상까지 일어나기도 했다. 몇 년 전에 방영되었던 SBS의 드라마 <야인시대>는 소설 <야인시대>(이환경 작)를 토대로 하여 부민관 폭파사건의 주역을 김두한으로 묘사하였다. 즉 김두한이 부민관 폭파에 사용한 폭약을 건네주었고, 이 일로 김두한이 끌려가 모진 고초를 당하다가 해방을 맞는다는 내용이었다. 주인공인 김두한을 미화시키기 위해 ‘부민관 폭파 의거’의 주역을 왜곡한 것이다.

 


□ 해방 후에도 독립운동은 계속되다

 


사건 이후 세 사람은 일제의 삼엄한 감시를 피해 우선 각자 피신해 있다가 후일을 도모하기로 했다. 조문기는 고향인 화성군 매송면으로 피신해 은거하다가 해방을 맞이했다. 해방 직후 부민관 폭파 의거의 주역이 밝혀지면서 그는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독립운동가로서 큰 명성을 얻게 되었고, 소용돌이치는 혼탁한 정국에서 자의든 타의든 각종 단체에 이름이 오르는 유명인사가 되었다. 그러나 해방 이후의 현실은 그가 생각했던 독립된 조국이 아니었다. 국토는 남북으로 갈라져 분단될 위기에 처해 있었고 청산되어야 할 친일세력은 미군정을 등에 업고 다시 활보하고 있었다. 그토록 원했던 조국의 독립과 해방은 여전히 미완성인 셈이었다. 또다시 그는 민족과 조국을 위해 남북한 단독정부 수립 반대투쟁에 나섰다.


중구는 지난 5월 ‘박정희 공원 조성사업’을 위한 설계 경기 공모를 진행해 우리동인건축사사무소와 동심원조경기술사사무소가 출품한 ‘시간의 기억을 담은 정원’을 당선작으로 선정했다고 2일 밝혔다. 구는 이 일대에 지하4층~지상1층, 전체 면적 1만1075.19㎡ 규모의 시설물을 지어 지하공간은 차량 259대가 주차할 수 있는 주차공간으로 활용하고, 지하1층 일부에는 전시장을, 지상은 역사문화공간으로 조성할 방침이다. 공원 조성을 위해 중구는 총 228억여원의 자체 사업비를 편성했다. 구는 선정된 당선작을 바탕으로 내년 2월까지 기본 및 실시설계를 마치고 공사에 들어가 2018년 하반기에 공원 조성 사업을 완료할 예정이다.

 

 


▲ 부민관 표석 앞의 조문기(민족문제연구소 이사장 재직 당시)

 

 


하지만 그에게 돌아온 것은 좌익의 낙인, 엄청난 고문, 투옥, 탄압과 감시였다. 상대는 친일경찰 출신들이었다. 해방된 조국에서조차 여전히 독립운동가는 ‘탄압받고 쫓기는 자’였고 친일세력은‘쫓는 자’였다. 이후 그는 독립운동가라는 사실 자체를 부끄러워했고, 독립을 완수하지 못한데 대해 늘 ‘민족과 선열들에게 죄인’이라는 자책감을 품고 있었다. 이 때문에 그는 말년까지 ‘제2의 독립운동’이라며 친일청산운동에 매진했다. 친일청산이 되었을 때 비로소 독립된 나라로 바로 설 수 있다는 신념 때문이었다. 온갖 고난을 무릅쓴 그의 독립에 대한 열정과 민족애는 생을 마감하는 순간까지도 식지 않았다.


전자책으로 보기 (<독립기념관> 2011년 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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