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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아들은 어떻게 연좌제로 인생을 망쳤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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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김정육 임시정부기념사업회 부회장… 독립유공자 후손 10명 중 6명, 무직에 고졸이하 저소득층


“공무원(매형) 월급은 빤한데 시동생 둘까지 데리고 있었고, 제가 기댈 곳은 없죠. 머리를 짜낸 게 국민대를 가면 되겠구나. 국회의장하던 신익희 선생이 국민대 학장이었거든요. 아버지(김상덕 반민특위 위원장)랑 신익희 선생이랑 이박사(이승만)한테 같이 끌려가기도 했고, 동경유학부터 아버지랑 임시정부 거쳐 독립운동 27년 동지였으니까요.”


김정육씨는 국민대 법학과에 진학했다. 첫 등록금만 어렵사리 해결했다. 어린 마음에 ‘신익희 선생에게 혹 도움을 청할 수 있을까’ 했지만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들렸다. 설립자이자 초대 이사장이던 신익희가 학장 자리에서 물러났다. 김씨는 절망했다. 그의 생애 첫 도전은 등록금이 없어 1학년을 마치지 못한 채 좌절됐다.


김씨는 고등고시를 보기로 했다. 김씨는 아버지가 임시정부(임정) 문화부장을 하는 덕에 중국 남경에서 태어나 한문으로 적힌 법률서적 공부에 경쟁력이 있었다. “3독을 마치고 시험 등록서류를 준비하려고 관에 갔어요. 다시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더라고요. 연좌제에 걸려 신원증명서를 발급할 수 없다고 나온 거죠. 제 앞길이 완전히 막혔죠.”


김씨의 아버지 김상덕은 이승만 정권의 방해로 반민특위(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위원장에서 물러난 뒤 얼마 안 돼 발발한 한국전쟁 때 납북됐다. 이로 인해 김씨는 연좌제에 걸려 ‘빨간줄’이 그어졌다. “친구들에게 제 속사정도 말할 수 없잖아요. 저를 보는 시선이 달라질 텐데… 친구들은 절 달래보기도 하고 나무라기도 했죠. 공부 계속하라고.”


독립운동가 김상덕의 아들 김정육씨(81)는 현재 전시납북국회의원유족회 부회장과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부회장을 맡고 있다. ‘독립운동하면 3대가 망한다’는 말은 김씨 가족을 표현한 것이었다. 미디어오늘은 지난 3일과 12일 서울 광화문에서 김씨를 만나 그의 인생역정을 들었다.


김씨의 아버지 김상덕은 1891년 경북 고령군에서 태어나 경신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유학 중 1919년 2·8독립선언에 참여해 투옥됐다. 그 뒤 상해로 가서 꾸준히 독립운동을 하다 해방이 된 후 임정 문화부장 자격으로 김구, 김규식 등과 귀국했다. 제헌 국회의원, 반민특위 위원장으로 선출돼 민족반역자 처벌에 힘썼지만 이승만 정권과 결탁한 친일세력의 방해로 실패했다. 김상덕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아래 기사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관련기사 : “‘살살하자’ 말 안들으니 총들고 와서…”]


어머니 유일한 평화 3년 뿐


1917년 아버지 김상덕은 경남 합천사람 강태정과 결혼한 뒤 일본 유학을 떠났다.


“남편과 첫날밤도 제대로 못 보내고 시집살이가 시작됐죠. 아버지가 막내였는데 막내며느리 설움이 오죽했겠어요. 십리길 교회에 찾아가 주님께 의지하며 버틴 거죠. 1926년 2월 만주로 떠납니다. 아버지를 만나러. 당시 아버지는 조선총독부에 위험인물로 올라가 있었어요. 어머니는 위험하다는 걸 직감하고 사진을 한 장 남겼어요. 그게 유일한 어머니 사진이죠.”


▲ 지난 12일 미디어오늘과 인터뷰중인 김정육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부회장. 아버지와 어머니 사진을 보여주는 모습. 사진=장슬기 기자



김씨 가족은 1933년부터 남경에 ‘호가호원’이란 곳에서 3년간 있었다. “그 3년이 어머니가 시집와 평화를 누린 유일한 기간입니다. 그 3년이 어머니가 누린 전부입니다.” 2년 터울로 장녀 길성, 아들 능, 막내 영이가 태어났다. 김정육씨는 금릉(현재 남경)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이름이 능이었다.


일제의 공격으로 1937년 아이 셋을 데리고 피난길에 올랐던 어머니는 양자강 남쪽에 닿자마자 쓰러졌다. “그길로 회복 못하고 돌아가셔요. 5살이었지만 정확히 기억할 수 있죠.” 그는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독립운동은 가야하는 길


어머니를 잃은 김씨는 ‘손가화원’에 살았다. 임정 청사까지 가려면 하루가 꼬박 걸렸다. “아버지는 한 달에 두 번 정도 식량을 가지고 와요. 셋 다 어리니까 밥을 해먹을 수는 없죠. 다빈이라는 짠맛 나는 빵을 자주 먹었는데 많이 보관해봤자 일주일이죠. 일주일은 양식이 없어요. 제가 그 5살 때 나무를 좀 탔어요. 잘 타서 탄 게 아니라 절박했던 거죠.”


▲ 대한민국 3년(1921년) 1월1일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원들의 단체사진. 사진=국가보훈처


김씨 가족이 살던 ‘손가화원’은 손씨 가문이 운영하는 큰 농장이라는 뜻이다. 포도, 당근, 복숭아, 연근 닥치는 대로 서리해 끼니를 해결했다. “그 일대에 마적들이 많아서 아버지는 보통 보름달이 밝은 밤에 동지와 같이 몰래 와요. 그런데 젖먹이(막내)가 젖떼기 전에 어머니가 돌아가셨으니 견딜 수 없었죠. 반년을 못 버티고, 영양실조라는데 그냥 굶어죽은 거죠.”


막내를 잃고 아버지는 누나와 김씨에게 근사한 아침상을 차려줬다. “생전 처음 보는 거였어요. 맛있게 잘 먹고 셋이 양자강을 따라 걸었죠. 저는 신이 났는데 아버지는 그날따라 아무 말씀이 없으셨죠. 반나절 가서 닿은 곳이 고아원이었어요. 결국 독립운동은 가야하는 길이고 자식들 다 죽이게 생겼으니 삼시세끼 나오는 곳에 맡겼죠.”


김씨가 어린 시절 유일하게 ‘밥 먹던 기억’은 고아원 시기였다. 김씨 7살 무렵 학교 갈 나이가 돼 고아원에서 나왔다. 아버지는 계모를 붙였고, 계모는 밥을 굶기지 않았다. 무엇 때문이었을까? 계모에게 참 많이도 맞았다. 임정에서 오랜만에 돌아온 아버지에게 이를 말할 수 없었고, 아버지는 이 사실을 알 수 없었다.


해방, 가난의 연속


1945년 해방 직후 한반도의 상황은 김씨의 상황처럼 자유롭지 않았다. 독립운동가 아버지 밑에서 한국인으로 자랐지만 중국에서 태어난 그는 한국말에 서툴렀다. 일제가 물러갔지만 백범 등을 노리는 총부리가 사방에 널려있어 김씨 역시 경교장 밖을 함부로 나갈 수 없었다. 반민특위는 실패했고, 아버지는 전쟁 통에 북으로 끌려갔다. 다시 오누이만 남았다.


“전쟁 끝나고 부산으로 갔어요. 임시수도였기도 하고 안전지대였으니까. 영화 ‘국제시장’에 내막이 절박하게 나오지는 않던데, 그 생존경쟁을 필름에 담을 순 없겠죠. 거기서 지게꾼들 골목이 있었어요. 거기서 보따리에다 이거저거 팔았죠. 밤에 (길에서) 자다가 추워서 깨보니 이렇게 살 수 없겠더라고요. 걸어서 합천 외갓집으로 갔죠.”


남의 집 신세는 오래질 수 없었다. 반민특위 위원장 관사에 있을 때 고려대 다니던 유학생이 김씨 집에서 신세진 적이 있는데 그 학생을 다시 만났다. 전쟁 통에도 같이 있었고, 전쟁 끝나고도 식량을 구하러 사냥까지 다녔다. “형이 사냥 솜씨가 예술이었어요. 그때 전쟁 격전지 가면 총이 널려있었죠. 카빈이나 딱콩, 딱콩은 유효사거리가 200m쯤 됐죠.”


부산 지방검찰청에 취직한 그 형은 매형이 됐고, 시동생까지 책임져야하는 그들을 떠나 김씨는 다시 떠돌이 신세가 됐다. 대학 진학과 고등고시가 경제적 문제와 연좌제로 무산된 뒤 공사장으로 향했다. 반공이 친일을 압도한 세상에서 연좌제는 큰 죄였다.


▲ 독립운동가, 반민특위 위원장 김상덕.


“반민특위 부위원장 김상돈, 아버지 동지고 이승만이 친일분자로 몰 때 아버지가 끝까지 막았죠. 당시 서울시장으로 있었어요. 이청천 장군은 국방위원장, 국무총리 이범석, 백관수… 줄줄이 아버지 동지들인데… 아버지가 경신학교 설립자인데, 행정말단직 하나 얻을 수 없었죠. 서류가 안 되니까. 한문만 가지고도 큰소리 칠 때였는데, 글도 괜찮게 썼는데”


아내의 투병생활


김씨는 “일용직 말단노무자로 들어가 현장소장까지 올라갔다”고 말했다. 공사를 마치면 시공확인서를 받아오고 보고서를 작성해 올리는데 소위 ‘공사판용 보고서’ 치고는 뛰어났다. 능력을 인정받아 현장소장까지 올라가 생활이 조금 안정될 무렵인 1988년 아내 이건자씨가 신부전증으로 쓰러졌다.


“콩팥 두 개가 다 망가졌어요. 피를 기계로 걸러주는데 한번에 4시간이 걸려요(혈액투석). 빚이 늘어갔죠. 돈 때문에 괴로워하는 걸 아내가 눈치 채면 치료를 안 받으려고 해요. 애들에게도 ‘절대 걱정하는 모습 보이지 말라’고 했죠. 의사가 그러더라고요. 환자에게 제일 중요한 건 애정이다.”


김씨는 고민했다. 건설현장을 따라 지방을 전전하는 삶마저 포기해야 아내 곁에 있을 수 있었다. “직장을 그만둬야 아내를 살리는데 애들은 중고등학생이고, 여기서 그만두면 먹고 사는 문제, 교육문제가 해결이 되지 않고…” 결국 김씨는 일을 관두고 동아일보 서울지국에서 신문배달, 구독확장 일을 담당했다. 월급은 박했다.


동아일보에서 다행히 기사를 크게 써줘 시민들의 성금을 전달받아 빚도 해결하고, 이를 본 평화민주당 김대중 총재가 봉투를 전달하기도 했다. 독립운동가의 후손은 국가의 외면 속에 시민과 일부 야당 정치인들 선의에 의존해야 했다. 아버지 김상덕에 대한 건국훈장 독립장 역시 무관심 속에 1990년에야 추서됐다.


콩팥 이식, 그럼에도 회복 불가


선의가 이어졌다. 혈액검사, 조직검사까지 다 완료해 적합판정을 받은 신장 기증자가 나타났다. 상대 신원은 철저하게 비공개였다. 수술을 마치자 조선일보 기자 한명이 찾아왔다. 김씨에게 물었다. “축하합니다. 어떻게 그분께 제공받았나요?” “네?” 김씨는 상대가 누군지 몰랐다. 기자는 “민주당 이기택 선생 아내 이경애 여사”라고 말했다. 기증자 부부가 병원비까지 정리하고 문병을 왔다. “아내가 눈물을 펑펑 쏟았어요. 드디어 10년 만에 처음으로 소변을 보게 된 거죠.”


신장을 이식받으면 약과의 싸움이 시작된다. 외부에서 들어온 장기를 공격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 약을 쓰고, 약이 독하니 위장을 보호하는 약을 쓰고, 그 약에 또 다른 장기가 다치는 과정의 연속이다. 약의 종류는 15가지로 늘었다. 약이 몸을 잡아먹었다. 2004년 의약분업으로 간호사들이 파업에 들어갔다. 병원에서는 중환자실에만 간호 인력이 있다고 했고 할 수 없이 아내는 중환자가 됐다.


“애정이 중요하다고 했는데…기가 막히는 거죠. 30분밖에 면회를 못해요. 그것도 손 소독하고 뭐하고 하면 20분 남짓. 아내는 하루 종일 갇혀있는 거죠. 급속도로 병세가 악화되더라고요. 당시 병원건물 옥상에 공원이 하나 있었어요. 거기서 아내 몰래 기도를 참 많이 했어요. ‘어머니, 아버지, 동생 그렇게 갔는데…아내가 아직 필요합니다. 좀 낫게 해주십쇼. 공원에서 참 펑펑 많이도 울었어요.”


병원 옥상공원에서 그는 아버지의 옛 동지 곽상훈을 많이 떠올렸다. 곽상훈은 3·1운동에 가담해 투옥된 이후, 신간회·상해한인청년동맹 등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였다. 해방 이후 반민특위 검찰차장으로 있었던 김상덕의 동지였다. 친일경찰 노덕술 등이 테러리스트 백민태를 고용해 특위요원 암살을 꾸몄을 때 곽상훈 역시 암살대상자였다.


▲ 곽상훈. 독립운동가, 1~5대 국회의원, 반민특위 검찰차장. 하지만 1972년 유신체제에 참여해 변절자라는 비난을 받은 인물.


하지만 김씨는 곽상훈을 “유일한 원흉”이라고 표현했다. 곽상훈은 유신체제에 참여해 육영재단 이사장, 통일주체국민회의 운영위원장 등을 역임했다. “제가 부산에 살 때 오랜만에 누나도 볼 겸 서울에 온 적이 있어요. 박정희·육(영수)여사가 곽상훈씨를 지극정성으로 모셔요. 그래도 아버지의 동지였는데 찾아가야 하는 거 아닌가 싶었죠.”


곽상훈의 사무실은 김씨가 찾기엔 화려했다. “허름한 점퍼하나 입고 갔으니 면회하긴 힘들겠구나 싶었어요. 그냥 반민특위 위원장 아들이 왔다고만 전해달라고 했죠. 한참 뒤에 불러서 들어갔어요. 붉은 카펫이 깔려있는데 은근히 주눅이 들더라고요. (곽상훈이) 내게 소파에 앉으라고 하더니 말이 없어요. 눈을 지그시 감아버리더라고요.”


김정육씨는 아버지 김상덕과 닮았다. 곽상훈은 그때 옛 동지 김상덕을 떠올렸을 것이다. 초라한 옛 동지의 아들의 모습에 가슴이 아팠을까? 혹시 양심에 가책을 느꼈던 것일까?


곽상훈은 김씨에게 잘 지내냐고 물었다. “절대 잘 지내는 행색이 아니었죠. 제가 잘 지낸다고 하니까 (청탁하러 왔는데) 비서가 메모준비하고 서있으니까 (부담스러워서) 제가 말 못하는 줄 알고 비서를 나가라고 하더라고요.”


김씨에 따르면 당시 곽상훈은 김씨에게 “괜찮아 도와줄게 얘기해봐, 나 대통령도 움직일 수 있어”라고 했다. 김씨는 순간 ‘내 자신을 잃겠구나, 아버지를 욕되게 하겠구나’ 싶어서 “다음에 뵙겠습니다” 짧은 한마디를 남기고 나왔다.


“제가 병원 옥상공원에서 그 당시를 생각하며 얼마나 후회했는지 몰라요. 그때 도움 한번만 받았어도 다인실 치료 부담스러워하는 아내를 2인실에서 쾌적하게 치료받게 할 수 있는데, 내가 왜 굳이 그렇게 못했나, 머리를 쥐어뜯고 통곡을 했죠.”


강준만 전북대 교수는 ‘한국현대사산책’에서 답답한 마음을 이렇게 표현했다.


“먼 훗날(2004년), 독립유공자 후손 10명 중 6명은 무직에 고졸 이하 ‘저소득층’인 것으로 나타났다. 차라리 이때부터 하지도 못할 친일파 단죄보다는 독립유공자와 그 후손에 대한 보상과 지원이나 법제화했더라면, 역사가 그렇게까지 뒤틀리진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마저 들게 한다.”


아내 이씨는 중환자실에서 회복하지 못했다. “이천오년 시월십팔일…십삼시 삼십이분” 그는 아내와 이별순간을 또박또박 읊었다. 나이 마흔에 만난 아내, 그 중 17년 투병. 먼저 떠난 가족들을 품고, 그는 다시 역사를 후대에 전달하는 일에 전념한다.


최근 김씨와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는 임시정부기념관을 짓기 위해 노력중이다. 시민들이 정성을 모으고 있고, 정부에도 신청해 볼 예정이다. “중국에는 여러 곳 있는 임정기념관이 임시정부를 계승한다는 한국에는 아직도 없어요. 말이 됩니까?” 그는 여전히 아버지의 길에서 이탈하지 않았다.


▲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상하이를 떠날 때까지 청사로 사용한 건물에 붙은 중국정부의 표지판.


장슬기 기자 wit@mediatoday.co.kr

<2016-08-15> 미디어오늘

☞기사원문:
독립운동가 아들은 어떻게 연좌제로 인생을 망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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