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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독립 운동가? 나라 망신시킨 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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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유신의 몰락, 스물두 번째 마당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법이다. 사회 전반의 분위기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른바 진보 세력 안에서도 부박한 담론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역사를 깊이 있게 이해하는 것이 절실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러한 생각으로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를 이어간다.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은 한국 현대사 연구를 상징하는 인물로 꼽힌다. 매달 서 이사장을 찾아가 한국 현대사에 관한 생각을 듣고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열세 번째 이야기 주제는 유신의 몰락이다.



[유신의 몰락, 첫 번째 마당] 99.9% 박정희 옹립한 북한식 거수기들, 그 실체는…

[유신의 몰락, 두 번째 마당]
박정희 코 납작하게 만든 또 하나의 12·12

[유신의 몰락, 세 번째 마당]
‘야당에 공작 중’, 오만한 청와대의 희한한 고백

[유신의 몰락, 네 번째 마당] 박정희 만난 카터, ‘당장 짐 싸라’ 펄펄 뛴 사연

[유신의 몰락, 다섯 번째 마당] 박정희 장송곡 초래한 “배고파 못살겠다” 절규

[유신의 몰락, 여섯 번째 마당] 똥물 테러와 박정희 직속 기관, 그 수상한 관계

[유신의 몰락, 일곱 번째 마당]
예수 가르침 따른 ‘죄’에 철퇴 휘두른 박정희

[유신의 몰락, 여덟 번째 마당] 박정희 최측근 이후락·김형욱은 왜 도망쳐야 했나

[유신의 몰락, 아홉 번째 마당]
박근혜 “북한이 김형욱 죽인 것 같다고 아버지가…”

[유신의 몰락, 열 번째 마당]
분별력 상실한 박정희의 폭주, 김영삼 날치기 제명

[유신의 몰락, 열한 번째 마당] 부산에서 분노 폭발했는데 잔치 벌인 청와대
[유신의 몰락, 열두 번째 마당]
이승만 몰아낸 마산, 박정희 사진도 찢었다

[유신의 몰락, 열세 번째 마당]
김영삼 때문? 박정희 경제 파탄이 항쟁 불렀다

[유신의 몰락, 열네 번째 마당]
“100~200만 죽인다고 까딱 있겠나”, 막가는 청와대

[유신의 몰락, 열다섯 번째 마당]
“그놈들이 어떻게 알겠나”, 국민 깔본 독재자 최후

[유신의 몰락, 열여섯 번째 마당]
박근혜·최태민 문제와 10·26, 그 미묘한 상관관계

[유신의 몰락, 열일곱 번째 마당] 박정희 쏜 김재규는 배신자인가?

[유신의 몰락, 열여덟 번째 마당]
박정희는 왜 총을 맞아야 했나

[유신의 몰락, 열아홉 번째 마당] 투기 부추긴 박정희 정부…그런데도 경제 대통령?

[유신의 몰락, 스무 번째 마당]
박정희와 재벌은 왜 ‘한국병’을 만들었나

[유신의 몰락, 스물한 번째 마당] 박정희만은 부패하지 않았다? 기이한 환상



프레시안 : 굴욕 외교라는 비판을 자초한 한일협정 문제에서 단적으로 드러난 것처럼, 일본 편향 문제도 많은 국민이 박정희를 곱게 볼 수 없게 만든 요소 아니었나.


서중석 : 심한 친일 정책, 이것도 박정희가 국민들의 지지를 받는 데 심각한 문제로 작용했다. 사실 박정희는 국가 지도자로 적합하지 않은 과거를 가졌다는 지적들을 많이 하지 않나. 박정희 최대의 금기가 만주군 시절, 만주군관학교 시절이었다고 한다면 얼마나 슬픈 일이냐, 이 말이다.

박정희는 국가 권력을 장악한 후 처음으로 일본에 갔던 1961년 11월에 만주군관학교 시절 교장을 특별히 만났다. 이런 것도 정말 있을 수 있는 일인가 하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한일 회담 때 친일 정책이 너무나 노골화되고 그것에 더해 밀실 야합까지도 얘기가 되지 않았나. 그래서 한일 회담이나 한일협정에 대한 반대 운동이 거세게 일어났다. 저자세 외교라고 하면서 얼마나 강한 반대가 있었나. 또한 1970년대 반유신 운동에서 빠지지 않고 따라붙은 것이 대일 경제 예속이었다. 박정희 정권이 너무나 심하게 대일 경제 예속 정책을 쓰고 있고 이러다가는 우리 경제 큰일 난다는 얘기였다.

여기서 아돌프 히틀러 같은 사람에 대해 한번 생각해보자. 히틀러는 1차 세계대전 때 독일군 하사관으로 복무하면서 심하게 다치기도 했다. 그 후 나치 운동을 펼 때 ‘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이 진정으로 패배한 것이 아니다. 독일인은 위대하다’고 하면서 독일인의 자긍심을 부추겼다. 그러면서 나치가 급격하게 성장하지 않았나. 히틀러가 엄청난 잘못을 저질렀다는 건 말할 필요도 없지만, 그런 잘못된 것도 박정희와는 유형이 크게 다르다는 점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독립 운동? 말짱 엉터리…나라 망신시킨 자들” 박정희, 독립 운동을 모욕하다

▲박정희 전 대통령. ⓒ연합뉴스

프레시안 :
지난번에 박정희와 장제스, 프랑코를 비교했는데 장제스도 박정희처럼 친일 문제에서 자유롭지 않지 않았나.


서중석 : 장개석에 대해 ‘친일적이지 않았느냐’, 이런 얘기를 할 수도 있다. 장개석은 1906년 보정(保定, 바오딩)군관학교에 들어갔는데, 1907년에는 일본에 유학해 일본 육사를 다니고 1911년까지 일본에서 군 생활도 하고 그랬다. 그래서 장개석도 일본군에 대한 향수가 좀 있었다. 1931년 만주사변이 일어났을 때 장개석이 거국적인 항일 투쟁을 벌이지 않고 만주를 송두리째 넘겨준 것도 그러한 친일 의식과 관계가 있는 것 아니냐는 비판도 당시에 나왔다.


대륙에서 쫓겨나 대만 총통으로 있을 때에도 친일 정책을 폈다. 그렇지만 그건 많은 사람에게 ‘미국의 동아시아 정책의 일환으로 대만을 지키기 위한 선택이다’, 이런 생각을 갖게 했지 박정희처럼 그렇게 심한 친일 정책이라는 얘기를 듣지는 않았다. 또 나중에는 야당인 민진당이 더 친일적이기 때문에도 ‘장개석의 친일이 문제다’, 이런 얘기는 듣지 않았다.


프레시안 : 일제 때 박정희는 만주군관학교에 들어가기 위해 혈서까지 쓰는 등 일본에 충성을 맹세했다. 그렇지만 해방 후 박정희가 그러한 행위들을 반성한 흔적 같은 건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독립 운동을 무시하고 비하하는 모습까지 보이지 않았나.


서중석 : 이병주 글에 나오듯이 1961년 5·16쿠데타를 일으키기 전 박정희는 독립 운동에 대해서도 정말 이해하기 어려운 태도를 취했다.


“똑바로 말해 그 사람들 독립 운동 때문에 우리가 독립된 거요? 독립 운동 했다는 거 말짱 엉터리요, 엉터리. (…) 해방 직후 우후죽순처럼 정당이 생겨갖고 나라 망신시킨 자들이 누군데. 독립 운동 했습네 하고 나선 자들이 아닌가. (…) 독립 운동을 합네 하고 모두들 당파 싸움만 하고 있었던 거여. 그 습성이 해방 직후의 혼란으로 이어진 기라 말이다. 그런데도 민족의 체면을 유지했다고?” 


이런 식의 발언에서도 독립 운동에 대한 태도를 볼 수 있는데, 그게 소위 민족 지도자라는 사람으로서 있을 수 있는 건가.

다만 대통령이 된 후에는 그런 얘기를 하지 않았다. 최고 권력자로서 독립 운동에 대해 그런 얘기를 해서는 안 되기 때문에 안 했다고 볼 수 있다. 그렇지만 이 사람은 일본 국수주의, 식민 사관 같은 것에 강하게 젖어 있었던 것 아니냐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모습을 많이 보였다. 그리고 만주군 시기에 대한 향수가 아주 컸다. 1945년 해방을 맞았을 때 어떤 심정이었겠는가를 전에 내가 얘기한 바도 있지 않나.

그런 사람이 자주 의식, 자주성, 자주 정신 같은 걸 꾸짖듯이, 호령하듯이 1960년대건 유신 시대건 끊임없이 얘기했다. 그렇지만 당시 일제 잔재가 청산되지 않고 사상적 혼란이 심해 도착적이라고 할까, 전도된 사고를 가진 사람들이 적지 않았기 때문에도 ‘그게 제대로 된 자주 의식, 자주성, 자주 정신이냐?’, 이런 비판을 충분히 하지는 못했다.


박정희는 군국주의 청년 장교들의 반서구주의, 반의회주의, 반자유주의, 반개성주의와 연결된 국수주의로서 자주, 자주 의식을 대단히 강조했다. 이 사람은 일본 노래도 좋아했고 일본 검도에 대해서도 자긍심이 있었다. 이병주와 술 마실 때에는 정종을 즐겨 마셨는데, 당시 정종은 일본에서 들여오는 데 문제가 있을 수도 있는 술이었다.


군국주의 일본 교육칙어를 술안주 삼아 줄줄 외운 박정희와 선우휘

ⓒ오월의봄

프레시안 :
어떤 노래나 술을 좋아하는지는 개인 취향 문제라고 볼 수도 있지 않나.


서중석 : 그런 건 개인적인 기호라고 얘기할 수도 있기는 하다. 이후락이 주일 대사를 할 때 박정희가 좋아하는 음식을 비행기로 보내줬다는 것까지 포함해서 그렇게 볼 수도 있다. 그렇지만 그런 식으로 보기 어려운 것도 적지 않았다.

김진 기자 책을 보면, 어느 날 박정희의 부름을 받고 강창성 전 보안사령관이 집무실에 가봤더니 박정희가 일본군 장교 복장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가죽 장화에 점퍼 차림으로 말채찍을 들고 있었다는 것이다. 전형적인 일본군 장교 복장이지 않나.

“박 대통령은 가끔 이런 옷차림을 즐기곤 했지요. 만군 장교 시절이 생각났던 모양이에요. 다카키 마사오 소위로 정일권 중위 등과 함께 말 달리던 시절로 돌아가는 거죠. 그럴 때 보면 항상 기분이 좋은 것 같았어요.” 

이렇게 회고하는 걸 볼 수 있다.

노재현 기자가 쓴 글에는 “일본군 장교 출신이라는 박 대통령의 경력은 그의 통치 시절에는 공개적으로 거론될 수 없는 금기 사항에 속했지만”, 이런 내용이 나온다. 나도 전에 이것에 대해 얘기를 한 바가 있는데, 굳이 일제 때 사관학교, 군 경력을 들추지 않더라도 정서나 체질에서 일본식 배경의 영향을 많이 받았던 것은 분명하다.


그런데 박정희는 선우휘와 술 마실 때 일본 천황의 교육칙어를 번갈아 외웠다고 한다. 선우휘는 소설가이자 조선일보 주필도 지낸 자인데, 선우휘 동생으로 청와대 공보 비서관을 한 선우련은 이렇게 회고했다. “임자, 아직도 (교육)칙어를 외울 줄 아나?” 대구사범학교 출신 박정희가 선우휘한테 이렇게 묻자 경성사범학교 출신인 선우휘는 “물론이지요”라고 하고는 먼저 외우기 시작했다고 한다. 교육칙어는 국민교육헌장보다 훨씬 길다. 선우휘가 한동안 외우면 박정희가 그 뒤 문장을 받아 외우고, 다시 선우휘가 받으면서 두 사람이 교육칙어를 끝까지 다 낭송하는 걸 봤다고 한다.

그런 식으로 박정희와 선우휘가 번갈아가면서 외운 건데, 세상에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겠다. 아니, 외울 게 따로 있지 이럴 수 있는 건가. 물론 이런 것들 때문에 국민교육헌장을 만들고 그걸 강제로 외우게 하는 일이 생겼겠지만, 그래도 이건 너무 심한 것 아닌가. (1890년 공표된 교육칙어는 천황 절대주의와 군국주의를 고취하는 역할을 했다. 그 때문에 패전 후인 1948년 폐기됐다. ‘편집자’)

프레시안 : 박정희는 일본 무사를 떠올리게 하는 모습을 여러 차례 보였다고 지적하는 이들도 있지 않나.

서중석 : 박정희는 사무라이 영화에 대한 애착이 아주 강했다고 한다. 볼 만한 영화를 선정해 외교 행낭 편으로 필름을 청와대에 보내는 것이 해외 주재 중앙정보부 요원들의 중요한 임무에 속했다. 한 중앙정보부 간부는 “사무라이 영화나 메이지 유신 전후를 소재로 한 영화, TV 드라마는 거의 다 사 모아 고국에 보냈다”고 말했다. 박정희는 유교식의 가부장적 통치관과 함께, 충효 사상을 강조한 것도 이런 것과 관련이 있을 터인데, 사무라이적 사생관의 영향을 받았다고 보는 시각이 많다.

출신 배경과 일제 때 받은 사범학교 및 사관학교 교육, 그리고 만주군 장교 생활 탓이라고 하지만 박정희는 해방 후 수십 년이 지났는데도 일본 천황의 교육칙어를 줄줄 외웠다. 아울러 국수주의 및 일본 군인들이 가졌던 반의회주의를 비롯한 특이한 정치적 성향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고, 기호 측면에서도 영화건 노래건 일본 것을 아주 좋아했다. 그뿐 아니라 일본 측 인사들, 그중에서도 특히 대륙 침략의 우두머리급인 기시 노부스케 같은 사람들과 관계를 그렇게 깊게 맺으면서 친일 정책을 폈다. 그런 사람이 자주, 자주성, 자주 의식, 자주 정신 같은 걸 어떻게 얘기할 수 있는 것인지 난 참 이해하기가 어렵다.


이러한 박정희의 성향, 지나친 친일 정책 같은 것은 박정희가 한국의 국가 지도자로 적합한가 하는 것과 관련해 항상, 충분히 문제를 일으킬 수 있는 면모였다. 그런데 유신 체제는 모든 권력을 박정희 한 사람한테 집중시킨 것 아닌가. 그런 점에서도 조금 전에 얘기한 사항들을 경제 예속화 사안과 더불어 문제 삼을 경우 박정희가 지탱하기가 쉽지 않은 점이 있었다.


박정희가 총애한 전두환조차 유신 말기 박정희를 두둔하지 않았다


프레시안 : 그동안 몇 차례에 걸쳐 되짚어본 여러 요인이 작용해 유신 독재는 무너졌다. 유신 체제가 천년만년 갈 수 있으리라는 망상이 7년 만에 깨졌다는 건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만든다.

서중석 : 전체적으로 볼 때 유신 체제를 끝까지 지켜줄 세력을 어디에서도 찾기가 어려웠다. 경상도 지역이 보루였다고 많이들 얘기하지만, 부마항쟁이 경상도 일각에서 일어난 것을 보더라도 경상도에서도 한 지역 중심으로만 박정희를 굳게 지켜준 것 아니냐는 생각을 갖게 한다. 제대로 된 2인자나 측근도 없었기 때문에 말년에는 차지철을 빼고는 바로 옆에서 정말 자기 몸처럼 알고 박정희를 지켜준 사람이 그리 많지 않았다. 총리 최규하나 국회의장 백두진도, 1978년까지 대법원장을 오랫동안 한 민복기 같은 사람도, 그리고 중앙정보부나 청와대 비서실도 정말 박정희를, 유신 체제를 끝까지 지키려 노력했느냐 하는 걸 생각해보면 그렇게 보기가 어려운 점이 있다. 특히 박정희가 지지하고 지원하며 일심동체가 되다시피 한 차지철의 전횡으로 그런 충성심은 점점 더 희박한 상태가 돼갔다.


또 하나의 보루인 군에서도 차지철의 오만 방자, 서열 무시, 지휘 계통 무시 같은 것들 때문에 거리를 두는 자들이 많아졌다. 박정희가 그렇게 키워주고 있었던 군내 사조직, 대통령이 그런 걸 키워준다는 건 용납할 수 없는 일인데, 그런 사조직인 하나회에서도 나중에 집권했을 때 박정희 정권을 비판하지 않나. 전두환을 포함해서 그랬다.


지금까지 내가 쭉 말한 것들을 보면 박정희 유신 정권이 망하는 건 당연하다고 생각할 수 있었다. 심지어 박정희로부터 가장 신임을 많이 받은 자 중 한 명으로 얘기되는, 그래서 군 요직을 골고루 거쳤던 전두환조차 유신 말기의 박정희를 두둔하거나 찬양하는 언사를 하지 않았다. 냉소적인 태도를 취하거나 잘못돼도 크게 잘못됐다는 얘기를 했다. 차지철과 박정희의 관계에 대한 언급에서도 그렇고, 부마항쟁 때에도 계엄령을 선포해도 제어가 안됐고 경찰이 데모 진압을 하려고 하지 않는 등 장기 집권, 부정부패 때문에 군부가 흔들려 김재규가 거사한 것이라고 주장한 데서도 그런 것을 엿볼 수 있다. 다만 계엄령을 선포해도 제어가 안됐다고 한 건 현지 상황을 잘 모르고 한 소리로 보인다.

전두환에게 유신 체제 붕괴는 변괴가 아니었고 당연한 현상이었다. 전에도 얘기한 것처럼 속으로는 그렇게 생각한 사람이 많았다. 겉으로는 ‘박 대통령을 쏜 건 정말 잘못이다’, 이렇게 해야 했지만. 하여튼 전두환이 유신 말기 박정희를 오죽 부정적으로 봤으면 “비서실 내부도 엉망이고 우군 싸움이 김일성이와의 싸움보다 더 심했어. 망하려니 그런가 봐”라고 하면서 “박 대통령이 돌아갔다는 걸 알게 된 순간 결국은 이렇게 오는구나 하고 생각했어”, 이렇게 <전두환 육성 증언>에서 밝혔겠나. 유신 체제가 망하는 건 당연하다고 전두환조차 얘기하는 판이었으니 다른 사람들은 어땠겠나.

프레시안 : 세간에서 ‘박정희의 양아들’이라는 얘기까지 듣던 전두환의 그런 평가는 여러모로 인상적이다.

서중석 : 10·26 후 유신 체제를 지지하는 사람을 찾기가 굉장히 어려웠다. 군 상층부 분위기가 어떠했는지 정승화가 쓴 글에서 엿볼 수 있다. 1979년 11월 24일 육본 회의실에서 육군 전체의 사단장 이상 지휘관 회의가 열렸는데 회의가 끝난 후 몇몇 지휘관이 질문했다. “우리는 장병들에게 지금까지 유신 헌법의 장점과 그 당위성을 교육하고 그 법을 잘 지켜야 한다고 해왔습니다. 그 헌법이 적절치 못하니 개헌해야 한다는 정부 방침을 어떻게 장병들에게 교육해야 합니까?” 그때 정승화는 자신이 이렇게 말했다고 썼다. “유신 헌법은 제정 당시에는 타당성이 있었으나 점차 문제점이 노출되어 가던 중 박정희 대통령의 서거로 그 존립 근거가 없어졌어.”

11월 10일 드디어 최규하가 10·26 이후 최초로, 중요한 정치 일정에 대해 발표했다. 현행 헌법, 즉 유신 헌법에 규정된 시일 내에 헌법이 정하는 절차에 따라 대통령을 뽑고 그 대통령에게 정부를 이양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면 자기가 대통령이 되는 것이었는데, 이건 권력 핵심들이 그렇게 합의한 것이다. 제일 중요한 건 군부 내에서 그렇게 합의했다는 점이다. 그러면서 최규하는 새 대통령이 전임 대통령의 남은 임기를 채우지 않고, 빠른 시간 내에 헌법을 개정해 그 새로운 헌법에 의해 선거를 실시한다는 정치 발전 일정을 제시했다. 이건 최규하 개인 의견이 아니었다. 군부를 중심으로 한 당시 권력 핵심들이 ‘이 길밖에 없다. 유신 체제로는 안 된다’는 것을 분명히 한 것이다.

박정희 국장 이틀 후인 1979년 11월 5일 국회는 본회의를 열고 의원직 사퇴서, 그러니까 김영삼 제명에 반발해 야당 의원들이 냈던 그것을 일괄 반려하기로 결의했다. 속개된 11월 15일 본회의에서는 아까 얘기한 정치 일정 관련 내용이 포함된 최규하 대통령 권한 대행의 시정연설을 들었다. 그리고 12월 3일 백두진이 국회의장직 사퇴서를 제출했다. 그에 앞서 11월 26일에는 국회에서 만장일치로 헌법개정심의특별위원회 구성안이 가결됐는데 김종필의 공화당이건, 김영삼과 김대중의 야당이건 모두 1972년 유신 쿠데타 이전의 헌법으로 돌아가는 데 의견을 같이했다.


▲ 전두환. ⓒ연합뉴스


그렇지만 서울의 봄은 살얼음판이었다


프레시안 :김영삼 제명안을 날치기 처리하는 과정에서도 박정희·차지철 친위대다운 면모를 유감없이 드러낸 백두진이 물러나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백두진 외에도 유신 체제에 빌붙어 잇속을 챙긴 이들은 많았다. 그 사람들은 어떤 모습을 보였나.


서중석 : 유정회건 공화당이건 지도적인 위치에 있었던, 간부직을 맡았던 자들도 유신 체제에 대해 비판적인 발언을 하고 있었다. 심지어 유정회 의장이었던 태완선은 박정희한테 강제 징집을 당했다는 식으로까지 얘기했다. 유신 헌법을 만드는 과정에서 이론적인 지주로 알려져 있는 유정회 의원 한태연은 “헌법의 이론과 실제의 차이를 절감했다”는 식으로 유신 체제를 얘기했다. 대개 이런 태도를 보였다. 그때 내가 만난 아주 극우적인 사람들도 “이제 민주화는 대세가 아니냐”, 이렇게 얘기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서울의 봄은 그야말로 살얼음판이었다고 할 수 있다. 5·16쿠데타를 일으킨 박정희나 김종필 못지않게 권력 지향적인 군인들이 이미 5·16쿠데타 직후부터 정치 문제에 관심을 강하게 보이고 있었다. 이자들은 나중에 하나회를 만들게 된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유신 체제 말기에 대해 전두환은 비판적이었지만, 박정희가 만들어놓은 유신 체제는 전두환·신군부가 권력을 유지하는 데 너무나도 좋은 모범 사례가 될 수 있었다.

이들이 정권을 잡는 데에는 심각한 경제 불황도 작용을 했다고 볼 수 있다. 그와 더불어, 한국인들이 민주주의를 충분히 익힐 수 있는 기회나 여건을 많이 갖지 못했고 그런 속에서 군국주의 파시즘에 젖어 있는 자 또는 ‘한국 민족성이 나쁘다. 강권 독재 정치가 필요하다’고 얘기하면서 ‘언제부터 우리나라가 민주주의를 했느냐’, 이런 모습을 보인 사람들이 상당수 있었던 것도 영향을 끼쳤다.

하나회를 중심으로 정치 군부가 쿠데타에 성공하자 유신 체제에 봉사했던 자들, 극우 정객이건 언론인이건 지식인이건 그자들은 다시 그 대열에 들어갔다. 유신 잔당이 유신 체제를 모방한 새로운 권력 체제에 들어간 것이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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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덕련 전 기자


<2016-08-21> 프레시안


☞기사원문: 박정희 “독립 운동가? 나라 망신시킨 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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