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민특위의 재구성 ⑤] 반민특위 한계와 비극의 반복, 노무현 때 친일문제 다시 다뤘지만 반쪽짜리
1960년 3월15일 밤10시, 마산경찰서 경비주임 박종표는 동료로부터 ‘최루탄이 눈에 박힌 괴이한 형상의 시체를 발견했다’는 연락을 받았다. 이를 보고받은 서장 손석래는 ‘적당히 알아서 처리하라’고 지시했다. 박종표는 순경, 운전수 등과 함께 마산세관 앞 해변으로 갔다. 돌덩이 여섯 개가 매달린 시체는 물속으로 사라졌다. 4월11일 오전 10시 중앙부두 앞바다에 ‘주먹을 꽉 쥔’ 시체가 떠올랐다. 부산일보 허종 기자가 촬영해 AP통신을 통해 전 세계로 알렸다. 김주열. 그는 사망 하루 전인 3월14일 마산상고에 합격한 뒤 이승만 정권 부정선거에 항의하다 박종표가 쏜 최루탄에 맞았다. 학생의 처참한 모습을 본 마산시민이 다시 궐기했다. 전국으로 퍼진 시위는 4·19혁명이라고 불린다.
▲ 4.19혁명의 도화선이 된 김주열이 왼쪽눈에 최루탄을 직격으로 맞은 모습. 사진=연합뉴스
박종표는 혁명재판소에서 최루탄 발사와 시신 유기 사실을 자백했다. 사형을 선고받았다가 나중에 시신 유기만 인정해 무기징역으로 감형받았다. 시인 고은은 ‘박종표’라는 시에서 “대구교도소 형장/ 일제 시대 이승만 시대의 끝이 그의 끝이었다”고 했다. 가해자 박종표는 잊혔다. 국민들은 4월혁명을 배울 때 김주열만 한번 들어볼 뿐이다.
박종표는 우연히 등장한 경찰이 아니다. 일본 헌병대에 근무하면서 조선독립운동가 등을 고문한 혐의로 반민특위(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에 체포됐다. 허나 이승만 정권이 반민특위를 무산하는 과정에서 무죄를 받고 풀려난 인물이다. 민족반역의 대가로 처벌이 아닌 출세 길을 달렸다. 친일헌병은 ‘애국경찰’로 변신해 김주열을 쐈다.
▲ 맨오른쪽이 박종표
▲ 부정선거를 이끈 이기붕(오른쪽)과 부인 박마리아
아이러니한 비극이다. 김주열의 죽음은 이승만 독재 12년을 몰아내는데 한몫했던 억울한 희생이었다. 경찰은 김주열의 시신을 병원에서 몰래 빼내 그의 고향 남원으로 보냈다. 김주열의 어머니 권찬주 여사는 “나는 시체를 못 받겠으니 (3·15)부정선거로 당선된 (부통령)이기붕이한테 갖다주시오”라며 분노했다.
반민특위는 박종표가 일제 헌병대에서 저지른 각종 고문사건을 파헤쳤다. 체포 당시 박종표는 공무원(철도서기)이었다. 황학명사건. 중경임시정부를 돕기 위해 황학명, 이창석, 신동균 등이 만주 북평 탄광폭파사건을 기도했고, 제주도 일본군 무전대에서 독립운동가들 방송과 연합국의 소식을 전했다. 박종표는 이들을 체포해 고문했다.
학인동우회 사건. 김주석 등 10대 학생들이 조선인 학생 차별에 분노해 일본군 헌병을 구타했다. 이들은 독립운동자금 조달, 친일요인암살 등을 목표로 학인동우회를 만들었다. 1944년 이들을 체포해 신상묵과 박종표가 고문했다. 그밖에도 부산세무과직원사건(김대근 등 고문), 양태의사건(양태의·임석춘 고문), 김영민 사건 등 밝혀진 게 한두 건이 아니었다.
박종표는 고문 사실에 대해서는 인정했지만 책임지려하진 않았다. 반민특위 조사관 질문에 “신상묵의 명령으로 (고문을) 거부할 수는 없었다”며 “주무는 아니고 보조였기 때문에 누구에게 어떤 고문을 했고 어떤 폭언을 했는지 자세히 모르겠다”고 말했다. 조사관이 ‘고문이 가혹했다’고 말하자 “명령과 강요에 의해 과도했던 것 같다”고 변명했다.
박종표는 헌병대 취직 동기에 대해 “2대 독자로서 징용·징병을 피하기 위해”라고 답했고, 수차례 “상관의 지시로 뺨을 친 일이 있다”고 말했다. 그는 “과거를 회오하고 상당한 처벌을 감수하겠다”고 답했지만 반민특위 재판정에서 그는 “신체의 구속을 받지 않고” 풀려났다. 선고는 1949년 8월19일이었다. 이승만 정권의 ‘6월 공세’로 사실상 반민특위가 무산된 이후다.
▲ 박종표 관련 반민특위 진술서 사진=정운현 제공
이승만 정권의 경찰이 반민특위를 습격하고(6월6일), 백범이 암살당해(6월26일) 김상덕 위원장 체제가 끝났다. 1949년 7월 이후 반민특위는 반민법(반민족행위처벌법) 피의자들을 풀어주는 과정이었다. 박종표 뿐 아니라 고등경찰로 독립운동가를 검거하고 ‘황민화, 전쟁필승’을 강조했던 노기주는 7월12일 풀려났다.
노기주는 ‘일제 때 과실로 양심의 가책을 받은 일이 없냐’는 검찰 질문에 “없다”고 답했고 조사관에게도 “경찰관 재직 26년 동안 양심에 어그러지는, 민족을 해롭게 한 적은 없다”고 말했다. 노기주가 당당할 수 있었던 이유는 당시 농림부장관이던 이현종이 증인으로 출석해 노기주에 대해 “경찰로서 보편적이었고, 악하다는 평은 아니었다”고 한데서 추론할 수 있다.
이인(훗날 이승만 정권의 법무부장관) 위원장 체제는 피의자에게 우호적인 증인의 말을 참고해 노기주를 풀어줬다. 이현종은 “증인(이현종)은 목사 입장으로서 엄정중립이었는데, 피고인 노기주가 취하는 태도가 극히 공정해 감격한 바 있다”고 말했다. 장관까지 나서서 ‘문제없다’고 해주는데 어떤 피의자가 반성할까?
반민특위의 한계, 기간·전문성 모두 부족
반민특위는 343일간 688건을 취급했다. 특별검찰부에서 다룬 사건은 559건, 영장발부는 408건, 기소는 221건, 판결은 40건으로 줄어든다. 사형과 무기징역은 각각 1건씩, 공민권 정지는 18건, 형 면제 2건, 무죄 6건이었다. 그나마도 1950년 3월까지 형집행정지 등으로 전원 석방됐다.
일제강점기가 35년에 가까운데 채 1년도 조사하지 못했으니 실적이 부진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반민특위는 최선을 다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1949년 1월부터 8월말까지 매일 하루에 2~3건을 취급하고 하루에 한 건 이상을 기소한 수치다. 반민특위의 필요성이나 정당성과는 무관한 반민특위와 반민법의 구조적인 한계다.
전문성이 부족했다는 지적도 있다. 이강수 역사문제연구소 연구원은 “정치인 출신의 비전문가 집단”이라는 사실을 실패요인 중 하나로 꼽았다. 그는 “특별검찰부가 비전문가 집단이라는 것은 승소를 위한 법률적·기술적 능력이 상대적으로 떨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지적했다.
이 연구원은 “반민법은 일반법이 아니라 특별법이었기 때문에 일반 형사소송법을 따를 이유가 없었다”며 “결국 반민특위는 조직적·인적 한계를 안고 출발했고 이를 뛰어넘기 위한 반민법 운영 원칙을 별도로 만들지 못한 것이 반민재판의 본질적 한계였다”고 지적했다. 그는 “반민법에 병보석을 통제할 법적장치를 마련하지 않은 게 큰 문제”라고 덧붙였다.
형사소송법을 따를 경우 민족반역자를 처벌하기 위해서는 이들의 친일행위를 반민특위가 증명해야 했다. 이 연구원은 “국가권력이 총동원해 방해하고 반공 이데올로기로 고립시키는 정국에서 보편타당한 법적 증거로 증명한다는 것은 처음부터 불가능한 문제”라고 주장했다.
형사소송법상 병보석 서류가 준비될 경우 반민특위는 이를 거절할 수 없었다. 반민특위 1호 체포자 박흥식은 공탁금 100만 원에 병보석이 결정됐고, 악질 친일경찰로 유명하고 반민특위요인 암살음모사건 주모자인 노덕술 역시 공탁금 10만 원에 병보석이 결정됐다. 친일로 번 돈으로 친일혐의에서 탈출했다.
반민법 1장에서 민족반역범죄의 범위를 구체적으로 정하지 않고 ‘민족에게 해를 가한 자’, ‘독립운동을 방해한 자’ 등으로 모호하게 규정한 것, ‘단 기술관은 제외한다’ 등 단서조항이 붙어있는 것, 형 면제까지 가능하게 한 것 등도 한계로 지적받는다. 반민법은 한국전쟁으로 혼란한 틈을 타 폐기돼 친일파를 처단할 법적 수단이 아예 사라졌다.
암흑의 시대
친일청산시도는 단순한 민족주의 운동이 아니다. 부정한 권력을 청산하고 민주주의의 정신을 실현하는 움직임이다. 대한제국의 부활이 아닌 민주국가 설립을 추구했던 3·1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직후부터 친일청산의 필요성이 제기됐다.
1920년 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신문’에는 칠가살(七可殺, 죽여 마땅한 일곱 부류)을 발표했다. ‘매국적, 밀고자, 고등경찰 또는 형사, 친일부호, 적의 관리, 불량배, 배반한 자’ 등으로 곧 친일파와 일제를 다양하게 표현한 말이다. 해방이 가시화된 1941년 임정은 ‘건국강령’을 통해 “적에게 부화한 자”, “독립운동을 방해한 자”는 “선거권·피선거권을 박탈한다”고 규정했다.
하지만 1949년 반민특위가 무산되고 1950년 반민법이 사라지면서 부정했던 친일부역자들은 독재 권력의 기반이 됐다. 1961년 5월16일 쿠데타를 일으킨 군인 중 장성급 인사들은 모두 일본육사나 만주군관학교 출신이었다. 친일연구의 금자탑이라고 할 수 있는 임종국의 ‘친일문학론’(1966)은 오랫동안 사실상 금서로 묶여있었다.
친일을 부끄러워하는 풍토는 사라졌다. 친일청산의 열망은 공론화되지 못했다. 그러다 친일문제가 다시 역사 전면에 등장한 배경은 1987년 6월항쟁 이후 민주화다. 1991년 설립한 반민족문제연구소(민족문제연구소의 전신)는 1994년 ‘친일인명사전’을 내겠다는 계획을 세웠고, 1998년 ‘친일인명사전 편찬지지 전국교수 1만인 선언’이 있었다.
제2의 친일청산? 단지 친일 진상규명!
본격적인 움직임은 노무현 정부 들어와서다. 2003년 말 ‘친일인명사전 편찬 국민의 힘으로’라는 모금운동이 일어났고, 비슷한 시기 국회 예산심의위원회에서는 정부 예산안에 ‘친일인명사전’ 편찬에 대한 국고 지원금이 포함됐다. 2004년 3월 ‘일제강점하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에 관한특별법(반민규명법)’이 국회를 통과했고 이에 따라 2005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반민규명위)가 출범했다.
2003년 이법을 처음 발의했던 열린우리당 김희선 의원의 ‘반민규명법’의 원안은 해방 직후 반민법의 한계를 뛰어넘지 못했다. 이준식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위원은 “문제의 핵심은 반민법을 원형으로 삼았기 때문에 친일행위를 너무 자세히 규정해 결과적으로 조사 대상의 범위를 처음부터 특정하는 우를 범했다는 것”이라며 “조사의 비밀주의 원칙도 문제가 있는데 비밀주의는 1948년 반민법 제정 당시부터 반민법 반대 논리의 하나였다”고 지적했다.
그나마 이런 원안도 국회 법사위(당시 위원장 한나라당 김용균)에서 훼손돼 ‘누더기법’이라는 비아냥거림을 듣고 통과됐다. 당시 원안 수정 중 눈길을 끄는 건 장교 이상으로 돼 있던 군 관련 친일파를 중좌(중령)이상으로 제한한 것이다.
이 연구위원은 “당시 한나라당 실세였던 박근혜 의원의 아버지이자 한나라당의 정신적 지주인 박정희 전 대통령을 의식한 수정이라는 사실은 삼척동자도 알 수 있는 일”이라며 “중좌(중령)이상의 일본군 장교는 10명 남짓”이라고 지적했다. 박정희는 만주국 중위(중좌보다 3계급 밑) 출신이다.
한나라당의 방해공작도 이승만 일당의 방해공작과 비슷했다. 색깔론은 어김없이 등장했다. 한나라당 김광원 의원은 “북 등의 멤버가 개입한 의혹이 있으니 법안(반민규명법)을 부결해야 한다”, “일련의 흐름이 북의 흐름 쪽으로 가고 있고, 북에 이용될 수 있기 때문에 법안에 반대한다” 등의 주장을 펼쳤다.
반민규명법에 대한 유언비어도 퍼졌다. “21세기판 마녀사냥이 될 것이다. 말단 관공리는 물론 학교 교사까지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몰릴 것이다.” 이는 1948년 반민법을 반대하던 친일파 이종형의 논리와 비슷하다. “반민법은 통반장까지 잡아넣을 수 있어 온 국민을 옭아매는 망민법(網民法)이다”
조사기간은 최장 6년에서 4년반으로 상임위원은 3인에서 2인으로 축소돼 2005년 5월 출범한 반민규명위는 2009년 11월까지 4년 6개월간 1006명의 반민족행위자를 결정했다. 해방 직후 남한에서 친일파 20만명의 사법적 처벌을 고려했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여전히 미흡한 진상규명이다. 논란이 된 전직 대통령 박정희, 최규하와 전직 총리 장면, 정일권 등은 모두 결정에서 빠졌다. 일본군 위안부를 강제동원한 가해 행위자는 단 한명도 결정되지 않았다.
▲ 지난 1월16일 서울 일본대사관 앞 수요정기집회에서 위안부 피해자 문제를 최초 고백했던 고 김학순 할머니 상을 껴안는 행위극 모습. 사진=이치열 기자
중국과 프랑스는 달랐다
중국은 일본 괴뢰정부인 왕징웨이(왕자오밍) 정부 관계자를 중심으로 한간(漢奸)을 청산했다. 한간이란 중국에서 외국 침략자와 내통하거나 부역한 사람 즉 친일파·매국노와 같은 말이다. 중국 공산당은 국민당 정부가 제정한 형법과 ‘징판한간조례’를 주로 사용했고, 1937년 중일전쟁이 시작한 뒤 ‘항일구국 10대 강령’을 발표했다.
“한간의 재산을 몰수해 항일경비로 한다. 한간, 매국노, 친일파를 숙정해 후방을 강화한다”며 해방 전부터 한간 청산을 시도했다. 중공의 한간재판은 변호인이 없고, 재판관은 민중들이었다. 지금 들으면 ‘억울한 사람이 친일파로 몰려 죽으면 어떡하느냐’는 우려가 들지만 동시대를 살고 있는 친일파를 골라내는 건 ‘식은 죽 먹기’였다는 게 다수의 전언이다.
중국 국민당은 한간을 청산하기 전에 권력이 먼저 한간을 이용했다. 국민당 장개석 정부는 중국 공산당 확산을 저지하기 위해 공산당에 투항하지 않는다면 관대하게 대하며 한간의 각종 물자를 이용해 전쟁을 치렀다. 하지만 1945년 9월 하순 국민당 부대가 어느 정도 전쟁을 마무리하자 한간을 체포하고 적산을 접수했다. 1947년 10월까지 한간죄 혐의자 2만5000여건을 처리했고, 신문에는 한간 숙청 관련 기사들이 쏟아졌다.
중국 공산당에 대해 “인민재판을 통해 민중의 울분을 마음껏 발산하는 동시에 기술자 등은 일부 살려 활용했다”는 지적, 중국 국민당에 대해 “권력 확장을 위한 야심이었을 뿐”이라는 비판이 있지만 친일청산에 실패한 한국과는 비교된다.
▲ 나치부역자(친독파) 처벌
민족반역자 청산의 모범사례로는 프랑스가 꼽힌다. 1944년 8월26일 파리에 입성한 드골정부는 나치협력자에 대해 상당히 가혹하게 처벌했다. 같은해 6월부터 “나치협력자 처리를 위한 전담 재판소를 전국에 설치하라”, 8월 “시민법정, 비국민제도 창설하라”, 1945년 11월 “비시정권의 3부요인을 특별심판하는 최고재판소를 설치하라”는 훈령을 연이어 발표했다. 최고재판소는 비시내각 3요인을 재판에 세웠다. 다르낭 민병대장, 피에르 라발 총리, 페탱 장군 3명 모두 사형시켰다.
1943년 9월부터 이미 비공식적인 숙청이 이루어지기도 했다. 주로 레지스탕스(독립운동가)가 이를 주도했다. 1951년 프랑스 의회보고서에 따르면 나치협력자에 대해 사형선고 6763건, 사형집행 767건을 비롯해 즉결처형으로 1만명이상을 심판했다. 종신강제노동도 2072명, 유기강제노동은 1만637명, 유기징역 2만2883명, 공민권 박탈 3578명 등이었다. 언론계도 숙청해 나치부역신문들은 모두 폐간하고 저항언론지만 살아남았다.
나치에 협력한 공직자에 대한 행정처분은 더 광범위했다. 군 장교 4만2000명, 정부관료 2만8750명, 철도원 7039명, 전기가스공사 5000명, 경찰간부 170명, 판검사 334명 등 총 12만여명에 대해 시민권을 박탈하거나 파면 또는 조기퇴직시켰다. 덴마크, 네덜란드, 벨기에, 노르웨이 등도 나치협력자에 대해 강도 높게 처벌했다.
이로 인해 아돌프 히틀러의 혈족들의 태도는 한국 친일파 후손들의 태도와 사뭇 다르다. 미국에 거주하는 3명은 히틀러의 부친의 후손으로 ‘히틀러의 핏줄이 더 이상 세상에 나오지 말아야 한다’며 독신으로 살고 있다. 오스트리아에 살고 있는 혈족들도 가명을 쓰고 살고 있다. 한 친척은 히틀러의 저서 “‘나의 투쟁’에 대한 저작권을 요구할 의사가 없다”며 “집안의 수치인 히틀러를 떠올리고 싶지 않다”고 했다.
▲ 나치부역자 처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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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문헌
정운현, 풀어서 본 반민특위 재판기록
김주완, 김주열 살해 유기 원흉은 친일헌병 박종표였다
이강수, 반민특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이동일, 1948~49년 반민특위의 구성과 피의자 기소내용에 관한 분석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 (32회 반민특위-승자와 패자, 2001년 5월25일자)
<반민특위 재구성> 연재목차
1. 세월호 특조위와 반민특위
2. 국부 이승만의 반민특위 방해공작
3. 반민특위 김상덕 위원장
4. 친일파들의 논리
5. 반민특위 실패
장슬기 기자 wit@mediatoday.co.kr
<2016-09-11> 미디어오늘
☞기사원문: 반민특위에서 풀려난 친일 헌병, 김주열을 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