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리보는 시민역사관

친일파는 한국판 전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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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리보는 ‘식민지역사박물관’

해방이 되자 제일의 민족적 과제가 친일파 숙정이라는 데는 이론의 여지가 없었다. 그러나 미군정의 친일파 재등용은 이러한 민심을 철저히 외면하는 것이었다. 정부가 수립되자 친일파에 대한 단죄는 다시 전면화하게 된다. 1948년 9월 22일, 제헌국회는 반민족행위처벌법을 제정하고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를 설치하였다. 이어 친일파 기소와 재판을 담당할 특별검찰부와 특별재판부를 구성하여 친일파 체포에 나섰다. 국민들은 반민특위의 활동을 적극 지지하며 반민특위에 친일파의 행적을 증언하거나 제보했다.

언론들의 취재 경쟁도 치열했는데 당시의 정황을 구체적으로 전해주는 자료 하나를 소개한다.특별재판부 재판정으로 들어가는 친일파의 모습이 실린 1949년 4월 4일자 <주간서울> 1면이 바로 그것이다. <주간서울>은 1948년 1월 창간되어 6·25전쟁 직전인 1950년 5월까지 간행된 해방이후 최초의 종합시사주간지이다.

1949년 3월 28일부터 반민족행위자특별재판이 개정하자 <주간서울>은 “한국판 <뉴른베르그> 피고들 궤변과 방청석의 공기”라는 제목으로 이 재판의 의의와 분위기를 상세하게 보도했다.

먼저 친일파 처단의 목소리는 해방과 동시에 일어났지만 미군정의 소극적인 태도로 4년이라는 긴 시간을 그대로 흘려보낸 점을 비판하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친일파 처단은 해방민족으로서의 절대 요청’으로 정부가 수립되자마자 반민족행위처벌법이 상정(1948년 8월 17일)되고 정식 공포(1948년 9월 22일)되어 법적 근거가 마련된 사실에 안도감을 표현하고 있다.

이어 1949년 1월 8일 친일파 박흥식의 수감을 시작으로 반민특위의 실질적 행동이 개시되어 3월 28일부터 개정된 8명의 피의자에 대한 반민족행위자특별재판에 대해 ‘도로 찾은 민족정기가 겨우 소생의 실마리’를 잡게 되었다고 평가하며 특급 친일파인 피의자들의 사진을 전면에 실었다. 또 이 재판을 뉘른베르크와 도쿄 전범 재판에 빗대어 친일파를 ‘히틀러와 도죠의 핏줄을 받아 한솥밥을 먹어온 혈연들’인 ‘한국판 전범’들로 규정하고, 세계인의 생명과 재산을 위협한 파시즘의 무리들이 남아 있는 한 세계를 다시 혼란과 전화戰火로 뒤덮을 것이기에 그들의 처벌로 ‘세계평화의 병病’을 미리 없애려는 예방의 차원에서 의의가 있으니 ‘한국판 전범을 숙청하지 않고는 우리나라가 평화로울 수 없다’는 것을 잊어서는 아니 된다고 주장하였다.

마지막으로 <주간서울>은 재판정에 선 친일파들의 어처구니없는 변론을 비판하고 이들의 처단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결코 민족이 용납할 수 없다는 방청객들의 분위기를 전하며 반민특위의 활동을 기대하고 있다.

<주간서울>에 비친 바와 같이 국민들의 반민특위에 대한 지지와 기대가 컸음에도 이승만 대통령은 반민특위를 비난하고 활동에 제동을 걸었다. 친일세력을 주요한 정치적 기반으로 삼았던 이승만은 처음부터 친일파 처벌을 반대하였고 심지어 체포된 친일파의 석방을 요구하면서 반민특위의 활동을 불법으로 몰아갔다. 친일파는 이러한 상황을 이용하여 반민특위 요인의 암살을 계획하는 등 역공을 취하면서 반민특위의 활동을 집요하게 방해하였다. 마침내 친일경찰들이 반민특위를 습격하여 무력화시킴으로써 친일파 처벌은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해방된 지 70년이 넘었지만 친일문제는 여전히 금기의 영역으로 남아있다. 뿌리 뽑지 못한 독버섯의 포자가 널리 퍼져 이제 공고한 세력을 구축하고 대한민국의 주류 행세를 하고 있다.

불행하게도 오래 전 “민족정기를 소생시키기 위해서 친일파 처단을 해야 함”을 주장한 <주간서울>의 논지는 여전히 유효하다.

∷ 강동민 자료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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