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터뷰 │ 이양재 전 일성이준열사기념사업회 부회장
정리 : 박한용 교육홍보실장
낙원동 찻집에서 오랜만에 이양재 선생을 만났다. 인사동에서는 유명한 컬렉터이기도 한 이양재 선생은 근대시기 고서 등을 연구소 특별전시에 출품해 주신 계기로 인연을 이어오고 있다.
사회가 급격히 수구화하면서 살림살이마저 팍팍해졌던 이명박 정부 초기 서울살이를 아예 접고 거처를 제주도로 옮겨간 지 8년째이다. 10년을 넘게 만나온 분이지만 이양재 선생이 인사동에서 유명한 컬렉터라는 사실이 떠올라 먼저 그의 직업부터 물었다.
선생님은 원래 어떤 일을 해 오셨습니까?
20대부터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 하나의 직업을 가지고 매진하기 보다는 엎치락뒤치락 많은 활동을 해왔습니다. 애서가클럽, 고전문화진흥회, 한국고서동호회와 같은 단체의 발기인이나 임원 등을 역임했어요. 여행사 등 이런 저런 사업도 했지만 장사에는 소질이 없어 사업은 대부분 적자였죠. 좋은 옛 자료들을 부지런히 수집한 덕에 최근 10여 년간은 박물관에 그동안 수집한 자료들을 많이 납품하기도 했고요. 한국-일본-중국의 경매시장을 연결해 박물관 등에 자료를 제공하는 일을 주로 하고 있습니다.
고미술품에 조예가 깊은 전문 컬렉터로 알고 있었는데요?
원래 고미술품보다는 고서에 관심이 많아, 고서에 나오는 옛 그림이나 판화를 보면서 연구를 시작했어요. 그렇게 회화사, 서지학, 판화사를 다룬 글을 쓰다 보니 발표한 글만도 100편이 넘습니다. <오원 장승업의 삶과 예술>, <안견연구> 등 저서도 3권 냈습니다. 이러다보니 조금 이름이 알려진 것 같아요. 보통 우리 같은 컬렉터들을 골동품이나 모으는 수집가들이라 보수적일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미술과 문화재에 애착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과거와 오늘을 다 살펴보고, 서구나 낙후된 사회까지 다시야에 넣고 탐색하기 때문에 그렇게 진부한 사람들은 아닙니다.
특별히 소개하고 싶은 애장품은.
자랑 같지만 제가 수집해 세상에 내놓아서 문화재로 지정된 것이 상당히 많습니다. 국립중앙박물관과 서울역사박물관에 양여한 것들 중에 보물로 지정된 것도 여러 점 있어요.
그 중에 대동여지도 초판본도 있습니다. 호생관(毫生館) 최북(崔北)의 금강전도는 3m가 넘는 대작입니다. 크게 각 성씨의 초간본, 금속활자본 그리고 독립운동가 관련 자료들과 기독교 자료 이렇게 네 종류가 제가 집중해서 수집하는 자료입니다.
지난 7월 국회 의원회관에서 광복70주년 특별전을 열었는데 무슨 계기라도?
작년이 광복 70주년이었는데 독립운동가나 순국선열을 기념하는 행사가 일체 없었어요. 광복 50주년, 60주년에는 전시회가 열려 출품하기도 했는데, 광복 70주년을 아무 기념행사도 없이 보내는 상황을 보니 오기가 생겼죠. 제가 한번 해보자 결심하고 자료를 추리니 300점이나 되었습니다.
독립운동가들의 유묵과 친필자료, 해방직후 발간된 독립운동 증언록, 이준 열사와 그 동지들에 관한 자료들을 모아 그중 절반 정도를 선별해 국회에서 전시회를 열었어요. 전시회 제목은 「광복 70주년 순국열사전, 그리고 이준열사와 그 동지들」이라고 붙였고요. 2015년 8월 15일부터 2016년 8월 14일까지가 만 70년이니 ‘광복70주년’이란 타이틀을 걸고 7월에 전시회를 열었습니다. 만약 정부에서 광복70주년 행사를 제대로 했다면 내가 전시회를 열 생각도 안했거니와 전시회를 열어도 71주년이라고 붙였을 겁니다.
정부도 관심 없었던 순국선열 전시회를 개인적으로 준비하니 경제적 부담이 무척 컸습니다. 진열장도 만들어야 하고, 제주도에서 자료들을 운반해 와야 하니 운송비도 만만치 않았어요. 이런저런 비용을 합치면 개인적으로 2천만 원 정도 쓴 것 같아요.
이번 국회 개원 때 건국절 논란으로 의원들의 대립이 있었는데, 이 전시회가 새로 개원한 국회에 문제의식을 던진 계기가 된 것 같아 보람을 느낍니다. 초선의원인 오영훈 의원이 공동 개최해 주었고, 다른 초선의원들도 많이 관람했습니다. 독립운동가 후손인 이종걸 의원, 정세균 국회의장, TV에 자주 나오는 표창원 의원도 와서 보고 갔어요. 친일논란 때문인지 새누리당 김무성 의원도 관심을 보이더군요. 국회에서 실증자료를 전시하며 일종의 항의 비슷한 전시 시위의 효과가 있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현 정권이 ‘건국절’ 이야기만 하고 민족적 행사인 광복절에 대해서는 도외시하는 처사에 불만이 크셨군요.
‘건국절’ 발상 자체가 무모하다고 봅니다. 정부수립 때 사진을 보면 ‘건국’이 아니라 ‘정부수립’이라고 써 붙였습니다. 미국도 1776년 독립선언을 하고, 실질적 국가체계를 갖춘 건 수십 년 후이죠. 미국은 건국을 독립선언일로 잡는데 우리는 왜 해방된 후 그것도 정부수립일자를 건국으로 하려고 하는지. 독립운동을 한 순국선열을 모독하는 짓이고, 그 존재와 숭고한 희생을 부정하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독일은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탓에 분단이 됐지만, 우리의 경우 미국의 속셈으로 정작전범국가 일본의 침략전쟁의 죄를 대신 치러 분단되었습니다. 그리고 미국은 일본의 경제적 성과와 기술적 토대를 독식했습니다. 사실 일본이 우리를 강제병합해서 수탈하지 않았다면 전쟁을 일으킬 여력도 없고, 경제 발전도 할 수 없었을 겁니다. 자원뿐 아니라 인력도 수탈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보상도 제대로 못 받고 국토도 분단되고, 친일파가 득세할 수 있는 상황이 되었으니 미국의 탓을 안 할 수 없는거죠.
또 수구세력이 건국절을 들먹거리는 것은 국민을 다시 한 번 분열시키고 갈등을 일으키겠다는 의도입니다. 영호남 지역갈등이 아물어 가니까 건국절로 다시 국민들을 갈라놓겠다는 의도 말고는 없습니다.
많은 순국선열 가운데 일성 이준 열사 기념사업에 관여하시게 된 동기는 무엇입니까?
순국100주년을 1년 앞둔 2006년에 기념사업이 사실 아무런 준비가 안 되어 있었습니다.
그 당시 기념사업회 대표가 제 고등학교 선배였는데 제게 협조를 좀 해달라고 해서 관여하기 시작했어요. 조사를 해보니 이준열사기념사업회가 해방되자마자 최초로 생긴 순국선열 기념단체였어요. 이준열사 아드님인 이용(본명 이종승)씨가 북청에서 있다가 1946년 월남해서 7월 14일 기일에 해방 후 첫 번째 추모제를 가졌습니다. 해방 직후니 좌우가 다 모였는데, 이 모임이 이준열사기념사업회의 모체가 되었죠. 그 때는 이준열사의 호를 따서 일성회라고 불렀고, 나중에 법인등록을 하면서 사단법인 등록1호가 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2006년 10월 ‘이준열사순국100주년기념사업추진위원회’를 조직할 때는 여야, 좌우 구분 없이 넓게 재조직을 해보자는 의도로 사람을 모으는 노력을 많이 했어요. 당시 여당의 장영달 의원과 야당의 이재오 의원, 감리교회 감독회장 신경하 목사 이렇게 세 분을 위원장으로 모셨어요. 국회에서도 예산을 편성해 몇 가지 기념행사를 진행할 수 있었죠. 2007년 중명전에서 헤이그특사 100주년 특별전도 열었고, 학술대회도 열었습니다.
그 때 보훈처에서 따로 예산을 책정하지 않아서 우리가 순국100주년 기념사업에 쓸 특별예산을 국회에 요청을 해 3억 원이 편성되었죠. 그런데 정작 이준열사기념사업에는 6,000만원밖에 지급이 안 되었어요. 그마저도 기념사업회에 지급되는 바람에 순국100주년기념사업추진위원회가 쓸 돈이 전혀 없어서, 제 돈을 내서 학술대회를 강행했습니다.
나중에 일부 비용 1000만 원 정도만 기념사업회가 보조해 주었고, 그 많은 예산이 이벤트성 행사로 소비되었죠. 시청 앞에서 대규모 행사를 기획하기도 했지만 2007년 연말에 있을 대통령선거의 여파로 이 행사도 무산되었어요. 내년에 순국110주년 행사도 했으면 좋겠지만 또 12월에 대선이 있으니 여의치 않을 것 같습니다. 우리는 정치성을 탈피한 민족적인 행사라고 하지만 수구세력들은 그렇게 보지 않고, 오히려 자기들을 공격하려는 의도로 보는 것 같아요.
수구세력이 이준열사를 적대시하는 까닭이 궁금합니다.
이준 열사는 1907년에 돌아가셨기 때문에 사상적으로는 좌우 모두 아무 거리감이 없을 것입니다. 원래 민족적인 성향이고, 어느 면에서는 민주주의적인 발상을 가지셨던 분이라 더 그렇다고 봅니다. 그러나 대한민국의 수구세력이 볼 때는 외세로부터의 자주 독립의 뜻을 품고 헤이그 특사를 결행한 분이니 부담스러운 것 같습니다. 수구 정권은 이준열사에 대한 사회적 추모 열기가 일어나면 선거에 악영향을 미치지 않을까 노파심을 가지고 있어요. 오히려 그럴수록 자신들이 당당하게 나서서 과거를 털어버려야 하는데 과거를 합리화시키려고만 하고 있는거죠. 그래서 건국절 얘기가 나오는 거라고 봅니다. 건국절은 합리화 시키고, 친일을 이야기하면 연좌제냐면서 빠져 나가려고 합니다.
왜 군 출신 인사가 기념사업회장을 맡게 되었는지요? 또 열정을 쏟아 온 기념사업회 일을 그만 둔 배경은 무엇인가요?
그게 지금 기념사업회의 큰 문제입니다. 기념사업회가 처음 조직될 때는 좌우 모두 모였고, 한국전쟁 후에는 독립운동가, 민족주의자 위주로 기념사업회를 이끌었습니다. 박정희정권 때 헤이그에서 이준 열사 묘소를 옮겨오고 장충단에 동상도 세웠습니다. 추모식에서 박정희가 직접 추모사를 읽기도 했어요. 대통령이 관심을 쏟으니 정권에 빌붙고자 하는 정치인, 기업인이 많이 모여들었습니다. 그러니까 5.16군사쿠데타 이후에 이준열사기념사업회가 보수화한 것입니다.
하지만 군 출신인 전 이연길 회장은 기념사업에는 모든 사회층이 참여해야 한다는 열린마음을 가진 분이었어요. 내가 이준 열사의 할복 자결을 입증할 기사를 일본 문서에서 발견했다고 이야기 했더니 자신의 평생소원을 풀었다며 내게 회장직을 제안하기도 했죠. 그 후 전재혁 부회장(현 회장)이 이사회를 조직하면서 슬그머니 내 이름을 빼버렸어요. 그래서 2007년 추모제까지만 하고 손을 뗐습니다.
그런데 전재혁 회장의 행보가 문제가 되어 올해 유족대표가 묘소에서, 기념사업회는 강북문화회관에서 따로 추모제를 열었습니다. 지금 기념사업회 회장은 1948년 건국설을 내세워서 문제가 된 것입니다. 3~4년 전에 그가 쓴 글을 보면 뉴라이트의 주장을 가장 앞장서서 그대로 옮기는 이론가나 다름없습니다. 정보기관에서 근무했다던데, 노재봉 총리 때 비서실에서 일했고, 민주시민연합이라는 걸 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이연길 전 회장의 자서전 비슷한 책을 쓴 것도 있습니다.
이연길 회장의 부탁도 있고 해서 내가 기념사업회와 유족대표를 화해시키려고 노력을 한 적도 있어요. 유족대표는 기념사업회와의 오랜 반목을 청산하는 조건으로 단 한 가지, 전재혁 회장이 지금까지 표명한 글을 취소하거나 번복하는 입장으로 나와야 대화를 시작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전 회장은 이를 번복할 사람이 아닙니다. 2007년 순국 100주년 기념사업을 그렇게 망가트린 장본인이면서도 오히려 그 모든 책임을 나에게 돌리는 이메일을 유족에게 보내 내가 일일이 해명을 해야 했습니다. 내년 순국110주년을 앞두고 유족대표와 기념사업회는 각자 기념사업을 추진하고 있어 가슴이 쓰립니다. 다른순국선열 기념사업회들도 전반적으로 유사한 문제들을 안고 있어요. 그 많은 기념사업회들이 일본군‘위안부’ 문제가 나와도 성명서 한번 안 내고, 교과서에서 ‘건국절’을 다루겠다고 해도 입을 다물고 있으니 도대체 무슨 기념사업이고, 순국선열을 추모하겠다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유족대표는 어떤 분이신가요?
유족대표인 조근송 씨는 이준 열사의 외증손자예요. 이준 열사의 큰 따님이 그 분의 할머니가 되는거죠. 아들인 이용 선생에 대해서도 거의 안 알려져 있어요. 이 양반은 1911년도 즈음 헤이그에서 이준열사 시신을 모셔오겠다고 어머니와 함께 블라디보스토크로 갔습니다. 워낙 먼 거리여서 포기한 채 1년 정도 머물다가 이준 열사 부인은 국내로 돌아오고 이용 선생은 중국 남방으로 가서 포병학교에 들어갔어요.
1919년 상하이에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생기자 거기에 가담했습니다. 1920년에는 중국동북으로 올라가 독립운동을 하다가 자유시참변 때 러시아 군인한테 잡혀 이송되던 와중에 겨우 탈출했어요. 다시 독립군을 모아 고려의용군을 조직, 독립운동을 하다가 1931년인가 연길에서 일본 헌병에게 체포되어 국내로 이송되었죠. 1937년까지 거주제한에 걸려 북청에 살았습니다. 이용 장군이 붙잡힌 다음 그 휘하에 있던 독립운동세력들은 항일빨치산 활동을 이어갔어요. 동북 항일전쟁의 핵심세력은 1930년을 기점으로 나뉘는데 그 전반기를 주도했던 인물이 바로 이용 장군입니다.
이동휘와 관계 때문에 당시 국내신문에 고려공산당의 수괴로 소개되었지만 사회주의자는 아니었고, 기본적으로 민족주의자였습니다. 북청에 거주할 때 동북항일연군 측에서 보낸 특사가 이용을 찾아왔어요. 그게 바로 김정일 모친 김정숙이었다고 합니다. 김정숙을 만나서 조국광복회와 인연을 맺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해방된 후 이용 장군은 북청에서 초대 인민위원장을 지내다가 월남합니다.
이용 선생이 월남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두 가지 설이 있는데, 하나는 북과 입장이 안 맞았다는 주장이 있고, 북한의 백과사전에 따르면 북에서 일부러 내려 보낸 것으로 나옵니다. 그러나 다른 자료에 인민위원장을 하면서 죽음에 처한 사람들을 남쪽으로 빼돌린 이야기가 나오는 것을 종합해 보면 자의반 타의반으로 월남한 것이 아닌가 싶어요. 그러다 1948년 남북연석회의 시기에 다시 북으로 갑니다.
이준선생이 이승만 하고도 가까운 사이였고, 워낙 상징성이 큰 독립운동가였기 때문에 이용 장군까지 건드리지는 못했어요. 그러나 월남한 후 민진당을 만들지만 제대로 활동하기 어려웠고, 당시 민족주의자들이 암살을 당하거나 위협을 받자 북행을 선택한 것 같습니다.
1948년 9월 북한 정권이 출범하자 첫 도시경영상으로 발탁되었고, 1951년에 사법상을 역임했어요. 1954년 무임소상을 맡았던 시기에 사망했습니다. 북쪽에서는 그를 상당히 우대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북으로 월북한 상당수의 독립운동가들은 사회주의자, 공산주의자라기보다는 민족주의자들로 봐야 합니다. 남한에서는 독립운동을 했음에도 포상을 못받았어요. 만약에 이승만 대통령이 친일파가 아닌 독립운동가를 우대했다면 여기 남았을 분입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기념사업회를 그만두신 후 언제부터 유족대표와 함께 일을 하신 건가요?
한 1년 전일 겁니다. 작년 8월 외교부에서 주최한 유라시아철도기행에 함께 하면서 조근송 씨를 알게 되었어요. 내년 순국100년을 맞아 제대로 된 기념사업을 하기 위해 유족 대표 분들과 협력해 나가기로 했습니다.
기념사업회에서 하는 것도 잘 했으면 좋겠고, 유족대표가 준비하는 것도 그 나름대로 성과를 냈으면 좋겠어요.
제 개인적 소망은 이제껏 모아온 자료로 기념관을 하나 만들 수 있으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년이 순국110주년이니까 이준열사 전시를 제대로 한번 하고 열고 싶어요. 그래서 장소도 물색 중이고, 가능하면 전국 순회 전시로 하고자 합니다. 저는 명예나 이런 것보다 일에 대한 욕심으로 지금 해왔던 일들을 잘 마무리 하고 싶습니다.
연구소도 식민지역사관을 건립하려고 하는데, 좋은 동반자로 함께 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제 증조부도 경기도 가평에서 독립운동을 하셨고, 감옥에도 가셨습니다. 불령선인으로 지목당해 젊은 시절에는 만주지역으로 다니고 결혼도 늦게 했어요. 제가 할아버님의 영향을 받아서 그런지 민족주의적인 성향이 강합니다. 민족문제연구소의 활동 내용을 보면 상당히 반가운 내용이 많습니다. 친일인명사전도 2질이나 구매해 한 질은 남을 주고 남은한 질은 집에 모시고 있죠.(웃음)
이런 사업들을 민간에서 해나가고 있는 것을 보면 민족문제연구소가 일종의 독립운동, 민주화운동, 끝나지 않은 백년전쟁의 사령부 역할을 하고 있다고 봅니다. 크게 도움을 줄수 있는 여건과 능력은 없지만 항상 연구소의 활동을 응원하고 지켜보고 있습니다. 마치많은 고국의 동포들이 상하이 임정을 마음에 품고 있었던 것처럼 민족문제연구소도 많은사람들이 마음에 담고 지켜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긴 대화를 마친 후 그는 서둘러 제주로 향했다. 내년 삼일절, 또는 이준 열사 순국110주년 기념일에 이양재 선생의 귀한 자료들을 시민들에게 소개하는 멋진 전시회가 열리길 기원하며 연구소도 내년을 준비해 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