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사랑

[기고] 훈장 취재는 독립운동과 민주이념을 찾아가는 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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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중석 뉴스타파 기자

한때 ‘OO으로 보는 역사’가 유행한 적이 있습니다. 특정한 주제나 소재를 프리즘 삼아 그 사회와 역사를 반추해보는 것입니다. 훈장은 국가와 민족에 헌신한 이에게 바치는 최고의 영예입니다. 그렇다면 훈장을 통한 대한민국의 모습은 어떨까요?
1948년 정부수립 이후 전체 서훈 72만 건의 데이터를 다루면서 집중했던 문제의식이었습니다. 이런 고민이 깊어지면서 이후 세분화된 질문으로 나아갔습니다.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재임 12년 동안, 자신과 부통령 이시영 이외엔 김구와 안중근, 윤봉길 등 국내 독립운동가들에게 일체 건국훈장을 수여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박정희는 독립운동가에게도 건국훈장을 수여하면서 동시에 수많은 친일파에게도 각종 훈포장을 무더기로 수여했는데, 그 의도는 뭘까? 민주주의를 총칼로 짓밟은 전두환 등 신군부의 훈장 잔치는 과연 정당한 것일까? 이명박은 상훈 내부 규정을 무시하면서까지 5개월짜리 장관 경질자에게 훈장을 수여한 까닭은 뭘까?
그리고 궁극적인 질문은 “대한민국 훈장의 역사는 독립운동과 민주이념 등 헌법 정신을 잘 구현하고 있는가”였습니다. 지난 4개월 동안 진행된 뉴스타파의 훈장 취재는 이런 질문의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었습니다. 민족문제연구소와 함께 한 여정이었습니다. 그러나 확인하는 과정은 순탄치 않았고 때론 고통스러웠습니다.

전체 서훈 데이터는 72만 건이었습니다. A4 용지로 출력할 경우 2만 5페이지가 넘는 방대한 분량입니다. 그런데 이 중 1950년대 서훈자의 경우, 주민번호 등 인적사항이 제대로 기재돼 있지 않았습니다. 이 때문에 동명이인 여부를 확인할 수 없었습니다. 문제는 전체 상훈을 관리하는 정부도 정확한 서훈 명단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상훈 기록에 나온 인물의 인적사항을 묻는 뉴스타파 취재진의 질문에 행정자치부 상훈 담당 공무원은 “특정인의 서훈 내역을 추정만 할뿐, 확정할 수 없다”고 답했습니다. 이런 사람이 6천 명 가량 됐습니다. 대부분 한국전쟁 시기 수여된 무공훈장 서훈자들이었습니다.
결국 뉴스타파와 민족문제연구소는 독자적으로 확인해야만 했습니다. 6천 명 가운데 국가유공자로 국립현충원에 안장돼 있는 경우, 묘비를 찾아 거기에 기재된 서훈 내역을 확인했습니다. 현충원 묘비의 기록은 유족들이 의뢰한 내용을 토대로 작성되지만, 고인의 수훈 사실을 입증하는 주요한 근거가 될 수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또 군인이나 경찰의경우 한국전쟁 시기 당사자가 속했던 부대의 전투기록과 당시 신문자료 등을 찾았습니다.
이런 방식으로 파악한 친일파 서훈 내역은 80여 건에 이릅니다. 이중에는 악질 친일경찰 노덕술도 포함돼 있었습니다. 노덕술은 1950년과 51년, 53년, 이렇게 3차례 이승만으로부터 무공훈장을 받습니다. 소속기관은 육군본부 헌병사령부였습니다. 헌병사령부는 반민족행위의 처벌을 두려워한 친일경찰들의 ‘피신처’였죠. 대한민국 훈장의 역사는 단죄없는, 반성없는 친일파의 기록이기도 했습니다.

훈장 취재를 본격화하던 6월 9일 연세대 정문에서 이한열의 동판 제막식이 있었습니다. 그가 직격 최루탄에 맞아 숨진 지 29년 만입니다. 올해 6월 10일에도 민주항쟁 29주년 행사가 서울성공회성당 등 곳곳에서 열렸습니다. 많은 이들에게 6월 10일은 1987년 민주항쟁을 떠오르게 됩니다. 독재 권력의 폭압 통치에 저항하며 민주주의를 요구했던 6월항쟁은 대한민국 민주주의 역사에서 중요한 이정표입니다. 그러나 대한민국 훈장의 역사만 본다면 6월 10일은 전혀 다른 날로 기억됩니다. 6월 10일 이날은 중앙정보부(현 국가정보원) 창설기념일입니다. 박정희는 중앙정보부 창립일을 맞아 중앙정보부 직원들에게 훈장을 수여하기 시작했고 지금까지 이어져오고 있습니다. 매년 20명 안팎이 국정원 창설유공 명목으로 훈포장을 받습니다. 이 중에는 고문과 가혹행위를 통해 간첩을 조작한 대공 수사요원도 적지 않습니다.
대한민국 훈장의 종류는 모두 12개입니다. 국민훈장, 보국훈장, 체육훈장, 건국훈장 등등이죠. 하지만 ‘민주’라는 명칭의 훈장은 없습니다. 정치·경제·사회·교육·학술분야에 공적을 세워 국민의 복지향상과 국가발전에 기여한 공적이 뚜렷한 자에게 수여한다는 국민훈장에도 ‘민주’라는 단어는 없습니다. 물론 대한민국 상훈법에도 ‘민주’를 찾아 볼 수 없습니다. 서훈의 기록에도 이한열과 박종철 등 민주주의에 목숨을 바친 이들은 거의 보이지 않았습니다.

뉴스타파가 민족문제연구소와 함께 한 넉달 동안의 훈장 취재는 제대로 청산되지 않은 친일반민족행위와, 군사독재 하수인들의 뻔뻔한 민낯을 확인하는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그만큼 훈장의 굴곡진 역사는 대한민국의 일그러진 자화상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대한민국 훈장이 이제 민주주의로, 국민의 품으로 돌아와야 하는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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