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호 선임연구원
쿠바혁명
1953년 7월 26일, 피델과 라울을 포함한 165명의 청년들이 쿠바 제2의 도시인 산티아고에 자리 잡은 몬카다 병영을 습격했다. 이들은 병영과 방송을 장악해 전국적인 봉기의 도화선을 만들려고 계획했다. 그러나 습격사건은 실패하였고, 피델과 라울은 체포되어 산티아고감옥에 갇혔다. 몬카다 병영 습격사건은 무모했지만, 쿠바혁명의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이 습격사건을 계기로 쿠바 전역에서 7·26운동으로 불리는 무력투쟁노선이 전면에부각되었다. 헤로니모는 곧바로 이 운동에 합류했다.
피델은 2년간 수감생활을 하고 1955년에 특별사면으로 풀려났다. 그리고 그해 멕시코로 망명했다. 1955년 7월 피델은 멕시코에서 이후 자신의 인생과 쿠바혁명에 절대적 영향을 끼친 청년을 만나게 된다. 그는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아이레스대학 의학과를 졸업한 에르네스토 라파엘 게바라였다. 후에 체 게바라(Che Guevara)라는 애칭으로 불리게 되는 이 청년은 과테말라에서 의사로 활동하다, 미국 CIA가 후원하는 반공세력이 과테말라혁명정부를 전복하자 멕시코로 망명하였다. 피델과 체는 1956년까지 2년 동안 멕시코에서 게릴라훈련을 받았다. 그리고 그들은 압제를 피해 멕시코로 망명한 중남미 사회주
의자들을 모아 800명의 혁명군을 창설했다.
피델이 멕시코에서 혁명군을 창설할 때, 헤로니모는 아바나에 있었다. 7·26운동에 합류한 그에게는 수도 아바나의 지하투쟁이 맡겨졌다. 그는 도시에서 비밀리에 혁명세력을 규합하고, 정보를 수집하는 지하투쟁을 전개했다. 지하활동 중 가장 큰 위기는 1952년 결혼 직후에 있었다. 바티스타 정부의 경찰과 정보 요원들이 헤로니모의 집을 급습했다. 그러나 바로 전날 우연히 집에 있던 중요 문건과 무기를 옮겨 체포를 모면했다.
헤로니모가 지하투쟁을 지속하던 1956년, 피델과 체 게바라는 그란마함선을 타고 쿠바에 상륙했다. 쿠바 정부군 제17보병대대가 막았지만 이들의 혁명 의지를 꺾지 못했다.
쿠바 혁명군은 험준한 산악지대인 시에라 마에스트라에 혁명기지를 구축하고, 주기적으로 도시에 내려가 혁명 참가를 호소하는 전단을 살포했다. 바티스타정부의 압제와 실정으로 쿠바의 경제난은 악화하였고, 쿠바인들은 점점 산악지대에 있는 혁명군에게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1958년 가을, 산악지대에 있던 혁명군은 일제히 도시로 진격했다. 전세는 급격히 기울었고, 그해 12월 바티스타는 도미니카공화국으로 망명했다. 이로써 쿠바혁명은 성공했다.
1959년 1월 8일, 피델이 이끄는 혁명군이 수도 아바나에 도착했다. 혁명 당시 피델과 헤로니모는 33살, 체 게바라는 31살이었다. 피델은 쿠바통일사회당을 수립해 사회주의 일당체제를 구축하고, 마르크스레닌주의에 입각해 개혁을 추진했다. 헤로니모는 혁명의 공로를 인정받아 지하투쟁 메달을 받았다. 피델은 1959년부터 본격적으로 사회주의정책을 도입해 친미적 산업들을 국유화했다. 당시 쿠바 산업체의 79%가 국유화되었다. 이에 대응해 미국은 쿠바에 대한 경제봉쇄를 단행했다. 더 나아가 미국은 1961년 쿠바 망명자 1,500명으로 특수부대를 조직하고, 쿠바혁명정부를 전복하기 위해 피그스만을 침공했다. 그러나 이 침공계획은 사전에 소련에 입수되었고, 미국의 침공은 실패로 돌아갔다. 이로써 쿠바와 미국은 완전히 적대국이 되었다. 쿠바와 소련의 관계도 1962년 이른바 ‘쿠바미사일위기’를 계기로 전변했다. 피델은 쿠바에 배치된 미사일을 철수시키라는 케네디의 압력에 굴복한 흐루시쵸프를 더는 믿지 않았다.
아바나를 행진하는 혁명세력. 왼쪽 끝이 피델 카스트로, 가운데가 체 게바라다 (위키백과)
미국은 1902년 쿠바공화국을 전복한 이래 라틴아메리카의 혁명정부를 수십차례에 걸쳐 무력으로 전복했다. 닉슨정부는 1973년 CIA를 통해 라틴아메리카 최초로 선거를 통해 출범한 칠레의 아옌데 혁명정부를, 레이건정부는 1983년 2,000명의 해병대를 투입해 그레나다의 혁명정부를 전복했다. 혁명정부가
스러진 자리에 들어선 것은 칠레의 피노체트로 대표되는 군사독재였다. 이에 맞서 라틴아메리카의 혁명
세력은 피델과 체가 그랬듯, 국가를 넘어선 반미통일전선을 구축했다. 라틴아메리카 현대사의 군사독재와 좌파연합은 미국의 냉전정책과 반미투쟁의 직접적 결과물이다.
붉은 관료
쿠바혁명 직후, 헤로니모는 지하투쟁의 경력이 고려되어 쿠바 경찰조직에 배치되었다. 그는 혁명정부의 경찰청장으로 부임한 혁명군사령관 아메 헤이가스의 보좌관으로 발탁되었다. 그러나 헤로니모는 경찰생활을 오래 지속하지 못했다. 당시 혁명정부의 주도세력은 대부분 교육받지 못한 사람들이었다. 그들 중 피델과 헤로니모처럼 대학을 졸업한 간부는 극소수였다. 대학을 졸업한 지식인이었던 헤로니모는 인텔리가 필요한 경제부처로 발령받았다. 그는 체 게바라가 장관을 맡고 있던 산업부의 고위관료로 임명되었다.
체 게바라는 쿠바혁명 후 경제개혁을 전담했다. 그는 가장 먼저 쿠바의 토지개혁을 주도했다. 그리고 1959년에는 쿠바국립은행 총재, 1961년에는 산업부 장관을 맡았다. 체 게바라는 1959년 쿠바 통상사절단을 이끌고 일본을 방문하기도 했다. 쿠바는 1960년 북한과 수교했는데, 체 게바라가 1960년 12월에 북한을 방문해 김일성과 직접 회담했다. 쿠바와 북한의 접점은 사회주의혁명과 반미였다. 북한은 이미 1946년에 토지개혁을 완료했고, 1958년에는 농업협동화와 상공업의 사회주의적 개조를 완료한 상태였다. 1960년 당시 쿠바와 북한은 미국에 정면으로 맞서고 있던 제3세계의 양대 국가였다.
1960년 12월 북한을 방문한 체 게바라(국방부 블로그)
1965년 4월, 체 게바라는 “쿠바에서는 모든 일이 끝났다”라는 편지를남기고 쿠바에서 사라졌다. 그는 쿠바를 떠나 벨기에의 식민지였던 아프리카 콩고로 갔다. 그는 콩고 반군과 함께 콩고혁명을 추구했으나 실패했다. 그는 다시 아바나로 돌아왔다가, 1966년 중남미혁명을 위해 볼리비아의 정글로 들어갔다. 볼리비아 정부군은 1967년 10월 8일 치열한 교전 끝에 체 게바라를 체포했다. “20세기 가장 완벽한 인간”이라 불린 게바라는 10월 9일 총살되었다. 쿠바계 CIA 요원인 펠릭스 로드리게스가 체의 마지막 모습을 촬영했다. 체의 사망으로 쿠바와 미국의 관계는 더욱 악화되었다. 그 후 쿠바와 미국의 관계가 해빙된 것은 50년이 지난 2016년 3월 20일이다. 이날 오바마 대통령이 88년 만에 쿠바를 국빈 방문했다. 그를 맞이한 쿠바의 최고지도자는 바로 피델의 동생, 라울 카스트로였다. 아바나의 택시운전수 헤로니모는 1961년부터 체 게바라와 함께 쿠바의 국유화 사업을 추진하였다. 이들은 4년동안 함께 일했다. 그 후 헤로니모는 쿠바 산업부와 식량 산업부에서 경제 관료로 활동했다. 헤로니모는 1988년 식량구매 국장을 마지막으로 공직에서 은퇴했다. 그는 퇴임 후 아바나 인근의 키테라스 시장 선거에 출마해 당선되었고, 동아바나 지역 인민위원장도 역임했다. 쿠바 정부는 이 은퇴한 노 혁명가에게 은퇴선물로 1965년산 소련제 라다 승용차를 선물했다. 그러나 헤로니모는 연금만으로 생활하기가 어려워지자, 라다 승용차를 몰고 택시 운전을 시작했다. 1991년 소련이 붕괴하자 사회주의경제블록도 해체되었고, 쿠바의 혁명가는 아바나의 택시운전사가 되었다. 그리고 나이가 들어 운전이 힘들어진 후에는 차를 빌려주고 거기서 나오는 임대료로 생활했다.
말년의 헤로니모 임과 크리스티나 장(프레시안)
헤로니모 임은 퇴임 후, 쿠바에 뿔뿔이 흩어진 한인회를 재건하기 위해 활동했다. 그는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곳곳에 한글학교를 세우고 한국문화를 보급하기 위해 노력했다. 헤로니모는 한국의 언론인·학자들이 쿠바에 오면, 라다 승용차를 직접 운전해 조선인들이 처음 거주했던 엘볼로 농장, 에네켄 밭, 아바나 시내, 한인들이 많이 거주하는 마딴사스·카르데나스를 안내했다.
헤로니모 임의 아버지 임천택은 결국 고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1988년 마딴사스에서 사망했다. 그는 생전에 한국전쟁이 발발한 것을 가장 가슴 아파했다고 한다. 그는 노후에 멕시코와 쿠바 한인들의 이민역사를 기록한 <큐바이민사>를 저술했다. 헤로니모 임의 여동생 마르타 임도 1971년 쿠바와 멕시코 한인들의 이민역사를 담은 <쿠바의 한인들>을저술했다. 임천택은 독립운동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1997년 한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애국장을 받았다. 그의 유해는 헤로니모 임이 한국으로 가져왔고, 현재 대전 현충원에 안장되어 있다.
이민 2세이자 쿠바의 혁명가 헤로니모 임은 2008년 아바나에서 사망했다. 그의 한국이름은 임은조였다. 헤로니모의 아들 넬손 임은 아바나종합대학을 졸업하고, 오리엔테주 종합대학 경제학 교수를 역임했다. 그는 2006년에 귀국해 경희대학교 국제교육원에서 한국어를 공부하고 다시 쿠바로 돌아갔다. 헤로니모 임의 아들과 딸은 모두 쿠바 공산당원이다. 헤로니모 임의 부인 크리스티나 장은 아직 생존해 있다. 그녀는 자손들과 함께 아바나 근교에서 살고 있다. 2016년 현재, 쿠바에 사는 한인은 1,119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