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사랑

열전 친일파·7 조선귀족편, 을사오적의 후손들, 친일과 항일로 갈라서다(2)

3409

이용창 편찬실장·책임연구원

(지난호에서 이어짐) 박제순의 자작 작위를 이어받은 박부양은 조선귀족이면서 드물게 군수, 중추원 서기관 등의 관직을 지냈고 이런 저런 사업도 벌리면서 좋지 않은 행실로 언론의 가십거리가 되었다.
박부양은 1923년 3월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1935년 무렵까지 조선총독부에서 지방세조사에 관한 사무촉탁으로 일하면서 한성은행의 대주주이자 운송업과 자전거 판매업에도 투자했다.
<1931년판 조선은행회사조합요록>에 따르면, 1929년 3월 설립된 자동차 매매 전문 합자회사 한양자동차상회(사장·대표 이성우)의 사원으로 전체 자본금 1만 2000원 중 1,000원의 지분을 보유했다. 또 1921년부터 1925년까지 주식회사 한성은행의 대주주로 이름을 올려 회사 전체 주식 12만 주 중,880주를 보유하고 있었다. 박부양은 ‘청년귀족’으로 적지 않은 재산을 축적하고 있었으며 당시에는 그야말로 상층계급의 전유물이었던 자동차와 자동자전차(오토바이-필자 주)를 즐겼을 뿐만 아니라 각종 스포츠 단체의 임원으로도 활동했다. 1925년 7월에 농구협회가 조직되었는데 이때 ‘자작 박부양’이 회장을 맡았고, 그해 4월에 개최된 제6회 축구대회 위원으로 소개된 ‘박부양’도 동일인으로 보인다.
박부양은 부친 박제순이 매국의 대가로 축적한 재력을 물려받아 풍족한 삶을 누렸지만 일말의 양심의 가책도 없었고 품행마저 불량해 세인의 손가락질을 받았다. 20살 전후에는 자동차·오토바이를 몰다가 사고를 친 일로 신문지상에도 여러 차례 오르내렸다.

10

<동아일보> 1925.12.17. 5면

11

<매일신보> 1925.12.16. 2면

‘말썽 많기로 유명한 청년 자작’이 “습작과 유산상속을 받아 요리점 출입, 자동차, 자동자행거(오토바이-필자 주) 타기, 기생 첩 두기로 날을 보내” 관할 동대문경찰서 보안계가 골치를 앓을 정도였다.
당시 조선귀족들은 주로 “금전과 토지관계”로 소송이 끊이지 않았다. 심지어 조선귀족과 관련한 소송이 하루에 6건이나 있을 때도 있어서 경성지방법원에서 조선귀족에 대한 소송을 전담해 맡고 있는 재판장 야마구치(山口)는 “귀족으로 소송사건이 많기는 세계 각국을 통하여 조선이 제일갈 줄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나는 조선귀족의 소송사건은 조선명물의 하나”라고 말할 정도였다. 오죽하면 친일신문인 <매일신보> 조차 「전문 재판관을 둔 조선명물 귀족 재판」이라는 기사를 내보냈을까. 박부양도 예외가 아니어서, 상습적인 음주 자동차 운전, 오토바이 교통사고, 폭행 등으로 고소를 당하기도 했다.

12

<매일신보> 1926.5.17. 3면

매국의 대가로 쌓아올린 부는 오래가지 못했다. 1920년대 초 조선귀족들의 사치, 낭비, 투기, 축첩, 도박 등 무분별한 재산소비로 골머리를 앓게 되자 이왕직에서 예산을 마련해 조선귀족을 구제하기도 했지만 감당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이 때문에 박부양은 1926년 10월에 조선총독부 촉탁 명의로 「조선귀족에 대하여」라는 장문의 글을 총독 사이토(齋藤實)에게 보내 조선귀족을 후원해줄 것을 요청하기도 했다. 짧게 요약하자면, 조선귀족은 ‘일한합방’의 공로에 의한 것인데 무지몽매한 일부 조선인들이 귀족을 국적(國賊)으로 칭하며 생명과 재산을 위협하지만 이것은 오해이고, 지금 귀족들은 파산상태에 이르러 체면도 잊고 이기주의로 흐르고 있으며 당국의 무관심으로 멸망에 이르렀으니, “대우를 개선하여 일한합방의 취지를 그릇되지 않게 하고 순조롭게 처치(處置)하기를 성심으로 바라는 바”라는 것이다.
이런 구걸이 효과를 발휘한 것일까. 조선총독부는 1927년 2월 10일 「조선귀족세습재산령」을 공포해 세습재산을 보호하려 했다. 「조선귀족세습재산령」 공포 다음날 자 <매일신보>는 「빈궁에 빠진 조선귀족의 참상」이라는 기사에서 조선귀족들의 재산을 조사해 발표했다. 이 중 박부양은 5만 원 이상의 재산을 보유해 “의식은 곤란치 않을 만하고”라고했지만 자산 유지에는 실패했던 것으로 보인다. 박부양도 몰락 조선귀족을 구제하기 위해 1929년 9월 설립된 재단법인 창복회(昌福會)의 교부금을 받았기 때문이다.
창복회는 일본정부가 국채 250만 엔(원과 등가-필자 주)의 자금으로 조선귀족들을 경제적으로 지원하기 위해 만든 단체다. 기금 250만 엔을 조선은행·조선식산은행·조선상업은행·한성은행에 예금하고 연간 약 12만 5,000엔의 이자수입으로 이해 12월부터 교부금을 지급했는데 당시 박부양은 월교부금 170원을 받는 것으로 되어 있다. 보통학교 훈도 평균 월급이 53엔(1930년), 55엔(1941년)이었던 것과 비교하면,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매월 3배 이상의 ‘생활비’를 받는다는 것 자체가 특수한 신분이었기에 가능했다.
1937년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박부양을 비롯한 친일귀족들의 반역 행각은 도를 넘어섰다. 중일전쟁 발발 직후인 8월 25일 박부양 등 “청년귀족” 10여 명은 “시국인식의 철저, 총후후원의 전력, 동양평화의 실현, 황운부익(皇運扶翼)에 적성” 등을 기치로 하는 시국단체 동요회(同耀會)를 발기했다. 조선귀족 전원이 참여한 동요회에서 박부양은 이사로 선출되었다. 이사장에 이병길(후작 이완용 습작자), 이사에 이홍묵(자작 이병무 습작자), 김호규(자작 김성근 습작자), 한상억(남작 한창수-한상기 습작자) 등 쟁쟁한 친일파 후손들이 일제 침략전쟁의 앞잡이로 나선 것이다. 박부양 등 임원들은 동요회를 조직하면서 귀족과 명문가들에게서 1만 원의 국방헌금을 모아 9월 3일 직접 총독 미나미(南次郞)를 방문해 헌납식을 가졌다.

13

<매일신보> 1937.9.4. 석간 2면; <동아일보> 1937.9.4. 석간 2면.
1940년 동요회 임원들이 미나미 총독에게 국방비를 헌납하는 장면.
점선 안의 인물이 박부양으로 추정된다.

친일에는 그 대가가 이어졌다. 박부양의 관운이 활짝 열린 것이다. 박부양은 1937년 9월 종4위 자작으로 전라북도 임실군수에 임명되었고, 1939년 3월 전라북도 금산군수로 자리를 옮겨 1941년 11월까지 재직했다. 박부양은 광적인 친일로 관작에 보답했다. 임실군수 재직 당시 그의 ‘친일 활약상’에 대해 <부산일보>는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14

<부산일보> 1938.10.24. 석간 3면

임실군수 박부양 씨 담, 「건승을 기원, 총후를 철벽같이 수호」. “우리 총후의 신민들은 철벽과 같이 수호하고 있습니다. 전지에도 냉풍의 가을이 와서 혹한도 매우 가까이 왔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건승하고 분투하시기를 우리는 기원합니다.
임실군의 총후의 노력
① 군용비행기 전북호 헌납금 7,383원
② 국방헌금 3,794원 84전
③ 위문대 3,500개
④ 황군위문 연초 27,625포” (이하 생략)
또 국방 헌납만이 아니라 이른바 “황군의 필승을 기원”하는 내용을 반복해서 신문에 광고하기도 했다. 1940년 4월에는, 임실과 금산의 군수로 재직하면서 국방사상 보급(국민정신총동원운동), 위문금품 모집, 군수품 공출, 군사후원연맹의 기부금 모집 등의 활동을 적극 수행한 공로로 ????지나사변공적조서????에 이름이 올랐다.
박부양은 금산군수를 그만두고 곧바로 조선총독부 중추원 서기관에 임명되었으며, 1942년 5월부터 1943년 9월까지 조선사편수회 간사를 겸임했다. 중추원 서기관으로 재직중이던 1942년 7월에는 매일신보사가 제창한 ‘황군위문 히노마루(일장기-필자 주) 부채헌납운동’에 호응해 박부양이 중추원 의관들을 대표해 1000개를 기탁했다. 이에 앞서 친일잡지 <동양지광> 1942년 3월호 「싱가폴 함락에 부쳐」라는 특집란에 「사자항 함락 즈음하여」라는 일본어 글을 발표했다. “황군의 분투에 대해 감사와 감격의 극진한 감정이 차고 넘치게 된다”면서 “우리는 이에 황군의 빛나는 위훈을 찬양함과 동시에 마음 깊이 감사와 경의를 표하며 아울러 전 국민이 일어나 이 위대한 전과에 부끄럽지 않도록 총후 철벽의 태세를 구축하고 더욱더 강고하게 하여 성업(聖業)을 완수하는 데 협력 매진할 것을 맹서하는 바이다.”라고 일본 남방군의 싱가포르 함락을 찬양하였다.
1943년 9월 경기도 안성군수(정4위)로 옮겨 1945년 해방될 때까지 재직했는데, 장남인 박승경은 경복중학교를 졸업하고 가큐슈인(學習院) 고등과에 재학 중이던 1943년 11월 학병에 지원했다. 그리고 박승경의 뒤를 이어 ‘안성군 내 적격자’ 20명도 모두 학병에 지원했다. 3대에 이어지는 친일이었다.
해방 이후 박부양은 10월 2일까지 자리를 유지하다가 미군정청에 의해 같은 날짜로 경기도 농상부 농상부장에 임명되었다. 1949년 8월 당연범으로 반민특위에서 불구속으로 조사를 받고 특별검찰부로 송치되었다가 9월에 기소유예로 풀려났다. 1974년 4월 20일 사망했다.
다시 돌아가 자작 박제순-박부양 부자(父子)의 후손으로 독립운동에 헌신했던 박승유의 남은 이야기로 마무리를 하자. 박승유는 “선대의 친일행적에 염증을 느끼고 경기중학교 시절부터 음악에 심취”했던 인물이다. 그리고 1944년 일본군에 입대한지 한 달 만에 탈출해 광복군에 들어감으로써 속죄의 길을 택했다. 자신의 음악적 재능을 항일과 연결시켜 광복군 시절 “야전 방송대에 파견되어 동포 사병들에 대한 반정(反正) 권고와 염전(厭戰) 가곡 등의 방송으로 적지 않은 성과를 거두었다.”(<공훈록>) 해방 후에는 음악인의 길을 걸어 1970년 미국 캘리포니아주립대학교(UCLA) 음대 유학 후, 1975년 OO대OOOO과 교수로 부임해 후진양성에 힘썼다. 박승유는 1990년 11월 3일 춘천시의 자택에서 숙환으로 별세했다.
1999년 8월 29일자 <경향신문>은 「여적: 조상의 죄」라는 기사에서 박승유를 조상의 업보와 후손의 “보통 이상의 용기”를 보여준 사례로 소개하면서 8월 29일 국치일을 앞두고 과거사를 잊고 있는 현실을 안타까워하였다. 곧 박승유가 “을사오적의 한 사람인 박제순의 손자였음이 최근 밝혀진 것도 조상으로부터의 업보가 얼마나 무거운 것인가를 다시생각케 하는 사례”로 들면서 “광복군에 들어감으로써 속죄의 길”을 택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친일파들이 일제강점기에 이어 해방 후까지 영화를 누리고 대한민국의 리더십을 장악해 “민족정기를 훼손”시켰으며, 심하게는 “일제로부터 수여받은 훈작을 아들이 상속한 것도 모자라 해방 후에까지 그 후손들이 공적서를 조작하는 방법으로 훈장과 연금을 타낸” 뻔뻔함을
개탄했다. 이런 세태와 대비해 볼 때 “고위관료의 아들로 장래가 촉망되는 경성법학전문대 출신의 박승유씨가 친일을 굴레를 벗어 던지고 광복군 활동을 한 것은 보통 이상의 용기와 의지가 필요했을 것”이라고 평가하면서 “그의 행적은 널리 기릴 일이지 부끄러움”이 아니며, “정작부끄러운 것은 또다시 국치일(29일)을 맞고도 과거사를 잊고 있는 우리들”이라고 지적했다. 참으로 맞는 말이다.


NO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