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사랑

식민지 비망록 17, 친일파 기념공간으로 변질된 베델의 집터 – 홍난파 가옥에 가려진 항일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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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우 책임연구원

서울에서 가장 먼저 봄꽃이 피는 곳이 어딘지를 묻는다면 대개는 말문이 막히기 십상이지만, 그 정답은 송월동 언덕마루에 있는 서울기상관측소이다. 이곳에는 관측표준목(觀測標準木)이라는 꽃나무들이 있어서 이를 기준으로 개화 여부를 가늠하는 탓이다. 따라서 우리 집 마당에 또는 근린체육공원에 개나리가 먼저 피었네 마네 하더라도 그것이 공식적인 기록으로 인정받지는 못한다. 첫눈이 내리는 것도 마찬가지인데, 우리 동네에 아무리 함박눈이 내렸더라도 이곳 서울기상관측소에 싸라기눈조차 오지 않았다면 그날 서울지역의 강설기록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가 흔히 서울기상관측소가 있는 곳을 ‘송월동’이라고 지칭하나 엄밀하게 말하면 이 자리는 서울도성이 지나는 구간으로 경희궁(신문로 2가) 구역도 함께 걸쳐있는 공간이다.
일제강점기인 1932년 11월 1일에 경성측후소(京城測候所)가 서울도성을 헐어낸 자리에 신축 이전하였고, 해방 이후에도 중앙관상대(1948년 8월), 중앙기상대(1982년 1월), 기상청(1990년 12월) 시절을 거쳐 기상청이 신대방동 보라매공원 신축청사로 이전(1998년 12월)한 뒤로도 옛 측후소 건물은 그대로 남아 서울기상관측소로 사용되고 있는 상태이다.

21<일본지리풍속대계> 제17권(1930)에 수록된 송월동 월암바위와 홍파동 베델 집터 주변의 옛 전경 사진

원래 송월동(松月洞)이라는 것도 일제가 1914년에 송정동(松亭洞)과 월암동(月巖洞)을 합치면서 어거지로 만들어낸 명칭이다. 일찍이 이유원(李裕元, 1814~1888)의 문집 <임하필기(林下筆記)>에는 “돈의문밖 서성(西城) 아래에 바위가 있어 깜깜한 밤에도 오히려 밝은 빛이 난다”고 적었는데, 이것이 월암(月巖) 즉, ‘달바위’이다. 실제로 이 지역에는 멀리서 봐도 매우 밝은 느낌이 나는 암질로 구성된 바위들이 두루 눈에 띄며, 특히 ‘월암동(月巖洞)’이라고 새긴 바위글씨(서울시 문화재자료 제60호, 2014년 6월 26일 지정)도 남아있어서 지명유래의 근거를 명확히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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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난파 가옥으로만 잘못 기억되고 있는 홍파동 서양식 가옥(등록문화재 제90호)의 최근 모습

이로 인해 서울기상관측소가 있는 지점을 기준으로 서울도성의 서쪽 외곽으로 흘러내리는 경사면 일대가 공원으로 변하면서 이곳에는 월암근린공원이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다. 그런데 이 공원 구역이 끝나는 지점으로 몇 걸음 발길을 돌리면, 아담한 벽돌집인 ‘홍난파 가옥(등록문화재 제90호, 2004년 9월 4일 등재)’이 나타난다. 이곳은 ‘고향의 봄’, ‘봉선화’, ‘봄처녀’와 같은 무수한 대표곡을 남긴 작곡가이자 제금가(提琴家, 바이올리니스트)로도 유명세를 떨쳤으나 1937년 수양동우회 사건 이후 친일음악가로 변절한 난파 홍영후(蘭坡 洪永厚, 1898~1941)가 1934년에 두 번째 부인 이대형(李大亨, 1913~2004)과 재혼한 이후 세상을 뜰 때까지 7년 가량 거처로 삼았던 집이다.
하지만 이 집을 홍난파의 거처로만 이해하는 것은 큰 잘못이다. 그렇게 된다면 이곳의 공간사적 맥락을그저 반에 반에 반쯤만 아는 꼴이 되니까 하는 얘기이다. 우선 지번상으로 말하면 이 집이 속한 ‘홍파동2-16번지’는 당연히 ‘홍파동 2번지(1,827평)’에서 분할된 구역일 텐데, 원래 이 땅은 대한제국 시기 항일 언론인으로 유명했던 대한매일신보 사장 영국인 베델(Ernest Bethell, 裵說, 1872~1909)의 집이었던 공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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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홍파동 집 앞에서 포즈를 취한 항일언론인 베델의 생전 모습. 옛 집터에는 표석 하
옛 집터에는 표석 하나가 간신히 남아 있지만, 홍난파 가옥 안에도
그의 활동상을 알리는 전시물이 설치되어야 마땅할 것이다.

실제로 1917년 경성부청 지적조사국이 발행한 <경성부관내지적목록>에는 이곳의 소유자가 여전히 그의 부인인 메리 모드 베델(Mary Maud Bethell)로 표기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던 것이 1929년에 제작된 <경성부일필매지형명세도(京城府一筆每地形明細圖)>를 보면 이 구역이 여러 지번으로 분할되기 시작했던 것으로 나타나는데, 이로써이 무렵에 주택지가 본격적으로 형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홍난파 가옥 앞에 설치된 문화재 안내문안에는 이 집의 건축시기를 1930년으로 설정하면서 “독일계통 선교사의 주택으로 지어졌다고 한다”고 적는 한편 “근처 송월동에 독일영사관이 있었기 때문에 이 일대에 독일인 주거지가 형성되었는데 주변의 건물들은 다 헐리고 이 집만 남아 있다”고 덧붙이고 있다. 그러나 이는 터무니 없는 설명이다. 독일영사관의 소재지는 송월동이 아니라 ‘평동 26번지’일 뿐더러 제1차 세계대전의 와중에 1914년 8월 26일 일본의 선전포고로 외교관계가 단절되면서 폐쇄된 이후 14년 동안은 독일영사관 자체가 존재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이 집에서 살았던 사람들의 면면은 토지가옥대장에 기재된 내용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문화재청에서 발간한 관련자료에 따르면 이 집의 원 소유자 또는 거주자 명단에는 홍난파 이전에 최선복, 홍어길, 한치진 등과 같은 이름이 포함된 것이 눈에 띈다. 나름 유명인이거나 각각의 행적이 제법 쟁쟁한 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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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최선복(崔善福)이라는 사람은 ‘불놀이’의 작가로 유명하지만 친일행적도 뚜렷했던 주요한(朱燿翰, 1900~1979)의 부인이었다. 이들 부부는 신혼 초기에 홍파동에서 살다가 당주동으로 옮겨간 것으로 확인되는데, 이 당시 주요한의 집 주소가 ‘홍파동 2-4번지’구역이었다. 말하자면 현재 ‘홍파동 2-16번지’와는 바로 이웃하는 위치에 살면서 이곳까지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다음으로 1932년에 이 집의 새 주인으로 등장하는 홍어길(洪魚吉, 1899~?)은 여러모로 무척 흥미로운 인물이다. 그는 광희문배화여학교(光熙門培花女學校)의 교원 신분으로 수양동우회 활동을 전개하였고, 해방 직후에 발행된 <흥사단보(興士團報)>(1947년5월호)에 서울지방회 반장의 명단에도 그의 이름이 수록된 사실이 확인된다. 다만, 일제패망기 상해 거류민 친일단체인 상해계림회(上海鷄林會)의 조직 명부에도 홍어길이라는 이름이 포함되어 있어 동명이인 여부에 대한 추가조사가 필요하다.

어쨌건 <동아일보> 1933년 1월 4일자에 수록된 「홀아비가 키우는여섯 자녀」 제하의 기사에는 바로 이 홍어길이 사는 집이 등장한다.
여기에는 양젖을 짜 먹이기 위해 키운다는 양 한 마리와 더불어 벽돌집 앞에서 아이들과 나란히 선 그의 모습이 포착되어 있다. 또한 이에 앞서 <동아일보> 1931년 2월 4일자에는 홍어길의 부인인 신수옥(申秀玉)의 육아경험에 관한 가정탐방기사가 수록된 일도 있었는데, 이 기사에는 이들이 같은 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다는 내용이 함께 소개되어 있다.
이들이 1917년에 진남포에서 혼인을 한 사실은 <매일신보> 1917년 4월 22일자에 게재된 「임씨 양녀 혼의」 제하의 기사를 통해 확인할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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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남포 서선광무소(西鮮鑛務所) 주임 임치정 씨의 양녀 신수옥과 홍재응(洪在膺) 씨의 영손 노길(魯吉; 魚吉의 오류)의 혼례는 본월 21일 진남포 억량기 장로교예배당에서 거행한다더라.

이러한 기사내용을 시시콜콜하게 소개하는까닭은 이 신수옥이라는 신부가 바로 단재 신채호(申采浩, 1880~1936) 선생의 조카딸이기 때문이다. 위의 기사에 등장하는 임치정(林蚩正, 1880~1932)은 신채호 선생과 신민회 동지였던 사이였다. 그런데 벽초 홍명희(洪命憙)의 증언에 따르면, 이들 간에는 꽤나 심각한 불화가 있었던 것으로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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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1931년 2월 4일자에는 신채호 선생의 조카딸인 신수옥과 그의 소생 육남매의 모습을 담은

사진자료가 수록되어 있다. 안타깝게도 그는 1932년 이 아이들을 남긴 채 폐병으로 숨지고 말았다

…… 고 임치정 씨가 맡아 기른 단재의 질녀(姪女)를 출가시키려고 할 때 단재는 북경(北京)서 기별을 듣고 임씨가 질녀를 매끽(賣喫)한다고 분노하여 노자를 변통하여 가지고 질녀를 데리러 들어갔는데 그 질녀가 임씨의 이설(利說)을 청종(廳從)하고 삼촌의 엄명을 거역한 까닭에 단재는 질녀더러 이제부터 너는 나의 질녀가 아니고 나는 너의 삼촌이 아니다, 골육이라도 이렇게 끊어 버린다 하고 손가락을 한마디를 끊고 혼자 돌아 나왔다고 말들 합디다. 내가 단재더러 이것을 물어보고 둘이 같이 탄식한 일도 있었습니다. (홍명희, 「상해시대의 단재」, <조광> 1936년 4월호, 212~213쪽) 그러니까 홍어길은 신채호 선생에게는 조카사위가 되는 관계였고, 그의 반대를 물리치고 혼인을 한 이들이 마련한 보금자리가 한때나마 홍파동 가옥이었던 것이다. 자료에 따라서는 ‘란’ 또는 ‘향란’으로 표기되는 신채호의 조카딸 신수옥은 안타깝게도 1932년 세브란스병원에서 폐병 치료를 하다가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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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1928년 7월 11일자에 실린 미국 철학박사 한치진의 귀국관련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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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1948년 11월 24일자에 게재된 한치진의 저작물에 대한 일괄 광고문

그리고 홍어길 이후의 소유주로 표시된 한치진(韓稚振; 1901~한국전쟁 때 납북)은 일제강점기에 ‘철학박사’로 유명세를 떨쳤던 인물이었다. 1933년 무렵 이 집(홍파동 2-16번지)은 ‘철학연구사’라는 출판사의 주소지로도 표시되어 있는데, 이는 한치진 본인이 저술한 여러 책을 바로 자신의 출판사 겸 집에서 만들어낸 탓이 아닌가 여겨진다. 그는 1944년 일제의 패망을 예견하는 시국담을 논하다가 체포되어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을 선고받고옥고를 치렀으며, 이 일로 지난 2007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이상에서 보듯이, 베델의 집터에 세워진 서양식 벽돌집을 홍난파 가옥으로만 기억하거나 그를 기념하는 장소로 활용하는 것은 그야말로 항일의 터전을 친일파를 기리는 공간으로 격하시키는 일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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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년 4월 10일 서울 남산 방송국 앞에서 거행된 홍난파 흉상 제막식 광경. 이 흉상은 여의도 KBS본관 앞으로 옮겨졌다가 그의 친일행적이 문제가 되어 후손들이 자진 철거하였으나, 이후 홍파동 홍난파 가옥 앞에 재설치되었다. (ⓒ <정부기록사진집>)

이 집의 의미와 가치를 온전하게 이해할 수있도록 등록문화재의 명칭변경과 함께 이곳에서 살았던 여러 주인들의 삶과 흔적을 일괄하여 살펴볼 수 있는 기회가 서둘러 마련되어야 한다는 점은 새삼 강조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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