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사랑

정의와 공의의 역사를 만들어 가는 작은 밑돌이 되었으면 – 이두황 단죄비 제막 후기

1939

김재호 전북지부장

30기나긴 여름의 끝자락에 묵은 체증을 내려 보냈다. 몇 달 간을 전주의 기린봉 자락을 오르내리며 보냈던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간다. 전북 진안 부귀면에 윤치호 단죄비를 세운 적이 있었다.
그리고 거짓말같이 데자뷰처럼 4년 후인 2016년 8월13일 같은 날 이두황 단죄비를 세웠다. 윤치호
가 한말의 사상가로 사회진화론과 오리엔탈리즘으로 무장한 제국주의 논리에 맥없이 무너지며 민족개조론으로 일제의 침략에 무장해제되어 친일의 길을 걸었다면 이두황은 역사의 중요한 고비마다 일제 주구로서 선봉대 역할을 자임하며 온 산하에 피를 뿌린 전형적인 실천적 매국노였다.
기린토월(驥麟吐月), 전주 사람들은 전주 완산의 8경중 제1경을 그렇게 불렀다. 기린봉에 떠오르는 달이 그만큼 아름다워 그렇게 부른 것이리라. 그러나 애석하게도 친일파의 땅을 밟지 않고 달맞이를 하기는 불가능하다. 몇 년전 이두황의 묘를 답사하면서 땅의 소유권에 대한 강한 의구심이 들어 기린봉 자락에 대한 전수 조사를 한 적이 있었다. 놀랍게도 1만 여평이 넘는 땅이 아직도 친일파 이두황의 직계 후손들에게 소유권이 그대로 유지되고 있었다.
이두황이 죽은 지 정확히 100년이 지났다. 그리고 전주의 사대문과 조선왕조의 발상지의 위패가 있는 경기전을 지척에 바라보며 100년의 세월이 저리도 불경스럽게 누워있다. 백년만의 단죄(斷罪), 오랜 세월 친일과 식민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진 한국사회에서 역사의식의 부재를 통감하며 단죄비를 세웠다. 전주시에 첫 공문을 보내기 시작한 후 3년 만에 전주시에서도 화답을 보내왔다. 시유지 제공 및 점용허가에 이르기까지 여러 편의를 제공하였다. 전주시 추경예산에 반영된 단죄비 예산은 우여곡절은 있었지만 지부 회원 모임과 운영위원회 회의를 통해 정중히 돌려보내는 걸로 결정되었다. 그리고 600여 만원이 소요된 단죄비 설치와 행사 예산은 지부 회원들의 손으로 온전히 만들어졌고 차질 없이 진행되었다. 이두황의 단죄비는 이두황 묘가 있는 장소로부터 360여 미터 아래 설치되었다. 인적이 드문 산에 있는 것보다 그래도 사람들이 많이 오가는 사거리에 설치해 후대의 교훈으로 삼고자 했다. 그리고 전주시는 훼손을 우려하여 민문연 전북지부가 요구했던 CCTV를 10월까지 차질 없이 설치 완료하기로 했다고 연락해 왔다. 단죄비를 설치하며 함께 고생했던 지부 회원님들과 격려하고 응원해주신 모든 민문연 식구들에게도 고마움을 전한다.
오욕의 역사, 구천을 중음신으로 떠도는 동학 농민군과 항일 의병들의 원한에 작은 위로의 씻김굿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과 더불어 정의와 공의의 역사를 만들어 가는 과정에 작은 밑돌이 되었으면 하는 소망을 가져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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