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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난파 가옥’에 서린 항일역사, 친일파 이름에 가려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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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언론인 베델 소유, 홍어길·한치진 등도 거쳐가
민족문제硏 “등록문화재 명칭 변경해달라 청원할 것”

(서울=연합뉴스) 김은경 기자 = 서울 종로구에 있는 ‘홍난파 가옥’을 거쳐 간 수많은 독립운동가의 흔적이 친일 행적이 드러난 작곡가 ‘홍난파’ 이름 때문에 가려지고 있다는 지적이 나왔다.

25일 민족문제연구소에 따르면 이 단체의 이순우 책임연구원은 최근 ‘민족사랑’에 기고한 ‘친일파 기념공간으로 변질된 베델의 집터 – 홍난파 가옥에 가려진 항일의 역사’라는 글에서 “‘홍난파 가옥’이라는 등록문화재 명칭을 변경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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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난파 가옥’ 최근 모습
(서울=연합뉴스) 홍난파 가옥으로만 잘못 기억되고 있는 홍파동 서양식 가옥의 최근 모습 [민족문제연구소 제공]

등록문화재 제90호인 ‘홍난파 가옥’은 ‘고향의 봄’, ‘봉선화’ 등을 작곡한 홍난파가 세상을 뜨기 전까지 7년여간 살았던 곳이다.

홍난파는 1937년 독립운동단체인 수양동우회 회원이라는 이유로 검거되고서 친일음악가로 변절, 국민총력조선연맹의 문화위원으로 활동하며 친일 작품을 발표했다.

홍파동 2-16번지에 있는 이 집은 대한제국 시기 항일 언론인으로 유명했던 영국인 어니스트 베델 대한매일신보 사장의 땅 위에 세워진 것이다. 1917년 경성부청 지적조사국이 발행한 ‘경성부관내지적목록’에는 이 땅의 소유자가 그의 부인인 메리 모드 베델로 표기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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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인 항일 언론인 어니스트 베델
(서울=연합뉴스) 홍난파 가옥이 지어진 땅을 소유했던 영국인 항일 언론인 어니스트 베델 [민족문제연구소 제공]

그러던 것이 1920년대말 이후 여러 지번으로 분할돼 주택지가 형성됐다.

홍난파 가옥 앞에 설치된 문화재 안내문 안에는 이 집의 건축 시기를 1930년으로 잡으면서 ‘독일계통 선교사의 주택으로, 근처 송월동에 독일영사관이 있었기 때문에 이 일대에 독일인 주거지가 형성됐는데 주변의 건물은 다 헐리고 이 집만 남아 있다’고 적어놓았다.

하지만 이 연구원은 “독일영사관의 소재지는 송월동이 아니라 ‘평동 26번지'”라며 “1914년 일본의 선전포고로 외교관계가 단절되면서 독일영사관이 폐쇄돼 14년 간 다시 열리지 않았기에 이는 잘못된 설명”이라고 일축했다.

문화재청에서 발간한 관련 자료에 따르면 홍난파 이전에 최선복, 홍어길, 한치진 등이 ‘홍난파 가옥’에 살거나 부지를 소유했다.

우선 최선복은 ‘불놀이’의 작가로 유명하지만, 친일 행적도 뚜렷했던 주요한의 부인이다.

홍어길은 광희문 배화여학교의 교원으로 수양동우회 활동을 했고, 해방 직후 발행된 ‘흥사단보’에 서울지방회 반장으로 이름이 수록되기도 했다. 그는 단재 신채호 선생의 조카딸인 신수옥과 결혼해 ‘홍난파 가옥’에 한때 보금자리를 마련했다.

일제강점기 때 ‘철학박사’로 유명한 한치진은 1944년 일제의 패망을 예견하는 시국담을 논하다가 체포돼 1년형을 살았다. 이 일로 2007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다.

이 연구원은 “이 집을 ‘홍난파 가옥’으로만 기억하거나 그를 기념하는 장소로 활용하는 것은 항일의 터전을 친일파를 기리는 공간으로 격하하는 일”이라며 “이 집의 의미와 가치를 온전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이곳에서 살았던 여러 주인의 삶과 흔적을 살펴볼 수 있는 자료가 설치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민족문제연구소는 이 가옥의 역사성을 제대로 반영할 수 있도록 안내문을 수정하고 가옥 내부의 공간 구성을 바꾸는 방안을 종로구에 제시하기로 했다.

또 문화재위원회에 ‘홍난파 가옥’이라는 등록문화재 명칭을 변경해달라 청원할 예정이다.

kamja@yna.co.kr

<2016-09-27> 연합뉴스

☞기사원문: “‘홍난파 가옥’에 서린 항일역사, 친일파 이름에 가려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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