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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주년 창간기획-문학평론가 임헌영의 필화 70년](1) 만담가 신불출 테러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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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신탁통치 미국이 큰코다치지” 만담 중 청중 공격에 만신창이

▲ 1920년대부터 1960년대까지 큰 인기를 누렸던 대표적인 만담가 신불출, 나품신, 신일선, 성광현(왼쪽부터).

경향신문은 창간 70주년을 맞아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장(문학평론가·서울디지털대 교수)이 쓰는 ‘필화 70년’ 시리즈를 연재한다. ‘필화’란 개인과 집단의 의사표현에 대한 탄압의 총칭이다. 여기에는 펜뿐만 아니라 설화(舌禍), 사회관계망서비스(SNS)까지 모든 의사소통에 대한 직간접적인 제재가 포함된다. ‘필화 70년’ 시리즈는 광복 이후 정치, 경제, 사회, 언론, 교육, 종교, 문화예술, 노동, 학술 등 모든 분야에 걸친 필화 사건을 다룰 예정이다.

■8·15 이후에도 여전했던 일본의 검열

일본의 항복을 가장 먼저(1945년 8월10일 밤) 알았던 백범은 “이 소식은 내게 희소식이라기보다는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일”이었다고 한탄했다. 독립운동이 연대와 통합을 이루지 못한 채 맞게 될 민족적인 갈등과 비극을 예감했기 때문이다. 일제의 패망이 저절로 민족해방으로 이어져 독립 민주국가로 정착할 기대로 환희에 들떴던 8·15는 백범의 고뇌를 그대로 드러냈다.

일제는 조선 강제 침탈 때 모든 언론을 통폐합하여 한글과 일어, 영자신문을 하나씩만 남겨 총독부 기관지로 삼았다. 3·1혁명 이후 몇몇 민간신문들이 나왔으나 제2차 대전이 일어나자 다시 식민통치 초기의 강압적인 언론 탄압으로 회귀했다. 그 결과 8·15를 맞았을 때 조선은 한글신문이라고는 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가 유일했고, 전파매체는 ‘경성방송’(제1방송은 일어, 제2방송이 조선어)뿐이었다. 1940년대 후반, 매일신보는 9만 이하의 독자, 라디오는 30만대에 훨씬 못 미친 것으로 추산된다.

▲ 1946년 6월11일 ‘신불출 설화 사건’이 일어났던 서울 명동의 국제극장. 설화 사건 이틀 뒤 경기도 재산관리처는 한성극장협회에 “서울 시내 13개 극장은 흥행 목적 이외의 사용을 불허하라”고 지시했다. 대한민국 정부기록사진집

일본의 항복이 전해지자 매일신보와 경성방송의 일부 조선인 종사자들은 즉각 대응에 나섰다. 난삽한 문어체에 어눌한 일왕의 목소리로는 일본이 항복했다는 걸 알 수 없을 정도였다. 경성방송은 이를 한글로 번역·소개했고, 그 소식이 퍼져 본격적인 만세가 8월16일부터 전국적으로 일어났다.

1945년 8월16일, 일본인들이 방송 기자재를 파괴할까 우려해 조선건국준비위원회(건준) 소속 청년학생들이 방송국 경비를 맡았으나, 8월17일 일본 군인들이 대거 습격, 방송국을 장악하고 식민통치 시대의 방송을 강압했다. 경성방송이 한국어로 탈바꿈한 것은 미군이 서울에 진주(9월8일), 일본 군인을 방송국에서 축출한 뒤인 9월9일 오후 5시 이후였다.

매일신보는 사정이 약간 달랐다. 무주공산이 된 이 국내 유일의 한글신문 제작 시설을 갖춘 기관에 가장 먼저 손을 뻗은 것은 건준이었다. 8월16일 건준은 이 신문을 ‘해방일보’로 개제, 속간을 시도했으나 좌절당했는데, 그 이유는 연구자들마다 견해가 다르나 일본군의 개입으로 보는 게 합리적일 것이다. 8월17일, 일본군은 경성방송국을 점거하기에 앞서 먼저 매일신보를 급습했고 모든 개혁을 원천봉쇄해 버렸다. 이래서 8·15를 맞고서도 조선은 언론자유를 구가할 수 없었다. 이 기간에 일본은 세월호 학생들에게 외쳤던 것처럼 “은인자중하라”는 취지의 담화를 회유와 위협을 섞어가며 내보냈다. 시위와 폭동을 엄금하고 직장으로 복귀하라며 건준에 대해서도 조직 확대를 비롯한 각종 활동을 방해했다. 마지막까지도 언론탄압 기본정책에 빈틈을 보이지 않으면서 그들은 일본인들의 안전 귀국과 조선인 친일파 보호라는 두 가지를 이뤄냈다.

■미군정의 언론 정책

1945년 9월9일 오후 4시, 총독부 청사 앞마당의 일장기를 하강, 성조기를 게양(4시35분)하면서 미군정은 시작됐다. 마지막 총독 아베 노부유키(阿部信行)가 물러나고 군정장관으로 취임(9월12일)한 아놀드 소장은 하지 사령관의 성명(9월9일)에 입각해 언론 검열은 사라졌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미군정은 일본이 조선 침략 때 자행했던 언론정책을 그대로 되풀이했다. 그 첫 번째가 매일신보에 대한 교묘한 신분세탁과 길들이기였다. 당시 유일한 신문이었던 매일신보는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심지어 한민당도 인수하려고 탐을 낼 정도였다. 1940년 폐간당하고 제작 시설을 팔아버려 8·15를 맞고도 당장 복간할 수 없었던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는 11월과 12월에 각각 복간했는데, 매일신보에 눈독을 들였을 법하다. 이런 인수 전략에 휘말리지 않은 것은 한국 언론사상 처음으로 형성된 종업원자치위원회를 통한 경영과 자구책이었다. 이 막강한 매체는 만주지역 주둔 소련군이 “3개월 내 철군 완료”라는 기사를 긍정적으로 보도(10월10일)했다. 아놀드 군정장관이 여운형의 인민공화국 존재를 전면 부인, “괴뢰극을 하는 배우”로 격하시키며 조선의 유일한 정부는 군정뿐이라고 하자 이를 강력하게 비판(‘아놀드 장관에게 충고함’, 10월11일)한다. 이 사건은 조선의 언론이 점령군에게 가한 첫 맹공이었다.

미군정은 매일신보에 재정조사를 구실로 정간처분(11월10일)을 내린 뒤 인적 쇄신을 단행하고 아예 제호를 서울신문으로 바꿔 속간(11월22일)했다. 연구자들에 따라 다른 견해가 있지만 종업원자치위원회가 주체가 되어 미군정을 비판하는 언론기관을 분해시키기 위한 능란한 점령정책의 수순이었음은 부인하기 어렵다.

매일신보의 신분세탁 이후 미군정은 언론자유란 허울을 벗어던진 채 직·간접적인 탄압에 나서 각종 필화를 양산하게 됐다. 특히 모스크바삼상회의(12월16~25일) 이후 언론은 찬탁지(8개지)와 반탁지(5개지)로 뚜렷하게 나뉘었고, 이후 찬탁지들은 공공연한 습격과 테러의 대상이 되었다. 1946년 5월 조선정판사 사건을 계기로 미군정은 해방일보를 무기정간 처분(1946년 5월18일)하고는 신문 용지 부족을 구실 삼아 군정법령 제88호(5월29일)로 신문 및 정기간행물 등기제를 허가제로 전환했다. 이후 미군정하의 언론은 최악의 상황으로 전락, 언론인 구속, 군재 회부, 벌금, 징역, 그리고 정간과 폐간이 횡행해 그 목록을 다 쓰기조차 민망스러울 지경이다.

■신불출 테러 사건

이런 혼란의 와중에서 희대의 천재 만담가 신불출 테러 사건이 필화의 절정을 이뤘다. 신탁통치를 다루던 미·소공동위원회가 결실 없이 휴회(1946년 5월6일)에 들어간 허탈감으로 세상은 어수선했다. ‘조선영화동맹’과 ‘예술통신’이 공동 주최한 사흘간의 ‘6·10만세운동기념 연예대회’에 신불출이 출연한 것은 1946년 6월11일 밤이었다. 이날 밤 명치정(명동) 국제극장(현 명동예술극장, 1936년 명치좌로 개관, 8·15 이후 국제극장)에 빼곡히 들어찬 청중들은 이 희대의 만담쟁이의 넉살에 넋을 빼고 있었다.

‘실소사전(失笑辭典)’이란 제목으로 재담을 쏟아내던 신불출은 신체장애자 흉내로 쩔뚝거리며 관객들을 웃기다가 “남의 도움을 받으면 편하게 걸을 수 있는데 왜 혼자 쩔뚝거리느냐”며 탁치 지지를 유도했다. 단상에 걸어놓은 태극기를 가리키며 4괘를 ‘4대 연합국(소련, 미국, 중국, 영국)’으로 풀이, 숙명적으로 남북으로 갈라지게 돼 있어 4개국의 신탁통치를 받게 되어 있다고 했다. 이어 그는 남북 양쪽에 다 코 큰 손님에 들어와 있는데 우리 속담에 ‘큰코다친다’는 말이 있듯이 코가 더 큰 미국이 결국 쫓겨나게 된다고 했다. 이때가 저녁 8시쯤. 무대로 뛰어오른 200여 청년들에게 만신창이가 된 신 만담가는 전치 4주의 부상을 입고 치료받다가 13일 오전 11시쯤 구속된다.

이 사건은 ‘큰코다친다’ ‘태극기 모독사건’ 등등 언론마다 그 제목이 각각이었는데, 그는 군재로 넘어가 1년 체형, 2만원 벌금 언도를 받는다. 결국 그는 거듭된 테러에 시달리다가 이듬해 월북했는데, 이북에서 ‘신불출 만담연구소’ 소장, 공훈 배우가 돼 1969년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렇게 첫 필화는 설화로 시작됐다.

<2016-10-05> 경향신문

☞기사원문: [70주년 창간기획-문학평론가 임헌영의 필화 70년](1) 만담가 신불출 테러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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