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리보는 시민역사관

누구를 위한 개혁인가-침략을 위한 길 닦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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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리보는 ‘식민지 역사박물관’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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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년 동학농민군이 봉기하고 이를 진압하기 위해 조선정부가 청나라에 출병을 요청하자 일본은 거류민 보호명목으로 인천에 군대를 상륙시켰다. 이어 그해 7월 23일 경복궁에 난입해 ‘국왕생포작전’을 벌였다. 왕궁 점령 이틀 후 일본은 아산만의 청군함대를 기습 공격해 청일전쟁을 도발하였다. 그러면서 일본은 김홍집, 박영효를 중심으로 한 친일내각을 구성하고 조선의 내정개혁에 적극 개입하였다.(제1차‧2차 갑오개혁) 그러나 1895년 5월 삼국간섭으로 인해 요동반도를 반환하면서 일본의 기세가 꺾이자 민씨 일족은 친러파인 이범진, 이완용 등을 기용해 일본에 대한 견제를 시도했다. 일본은 1895년 7월경 육군 중장 출신인 미우라 고로三浦梧樓를 주한일본공사로 임명하고 친러 정책을 펴는 명성황후를 제거하고자 ‘여우사냥’ 작전을 획책하였다. 1895년 10월 8일, 새벽 미우라는 흥선대원군을 앞세우고 일본 낭인들을 지휘해 경복궁에 난입하여 명성황후를 시해하고 시체를 불태웠다. 그리고 고종을 위협해 유길준, 서광범 등을 중심으로 한 친일내각을 수립, 을미개혁(제3차 갑오개혁)을 추진했다. 일본은 명성황후 시해로 인한 국제적인 비난에 직면하자 미우라와 가담자들을 일본으로 데려가 히로시마 감옥에 가두고 재판했으나 증거불충분을 이유로 모두 석방하였다.
우리 연구소가 소장하고 있는 「조선정부대개혁도朝鮮政府大改革之圖」(69.2㎝×34.5㎝)는 1894년 일본의 강압으로 이루어진 갑오개혁을 소재로 한 니시키에錦絵다. 니시키에란 근대 일본의 목판화로 무로마치시대 말기부터 에도시대 초기에 걸쳐 그려진 우키요에浮世繪라는 풍속화를 근간으로 한 것이며 이것이 18세기 후반에 이르면 풍부한 색채를 사용하는 컬러판 니시키에로 발전하였다. 초기에는 미인화를 주로 그렸으나 19세기에 들어와서는 풍경화나 일본과 중국의 역사상의 인물을 소재로 삼았고, 일본이 조선과 중국을 침략하면서부터 당시 전황을 알리거나 역사적 사실을 전달하는 보도화報道畵가 많이 그려졌다. 이 그림은 오오토리大鳥圭介 주한일본공사가 배석한 가운데 조정 대신이 신료와 백성들에게 내정개혁안을 공포하는 장면을 화폭에 담았다. 그림 중앙 상단에 당시 정치상황을 설명한 글이 있는데 “민씨 일파의 폐정 때문에 동학농민전쟁이 발생하였으며, 이를 개혁하기 위해 대원군을 내세우고 무력으로 청군을 격퇴했다.”고 적혀 있다. 그림 속의 궁궐을 나서는 기모노 입은 여인은 개혁 조치로 인해 권좌에서 쫓겨나는 민씨 일파를 상징한다.
위 그림과 짝을 이루는 「조선전보실기朝鮮電報實記」(69.2×34.5, 1894.7)와 「조선왕성대원군참전도朝鮮王城大院君參殿圖」(69.2×34.5, 1894)도 연구소가 소장하고 있다. 전자는 오오토리 공사가 일본군을 지휘하여 조선군과 전투를 벌이며 경복궁으로 입성하는 그림이고, 후자는 대원군과 어린 의화군이 경복궁에 들어와 고종을 배알하는 그림으로 함께 있는 오오토리 공사와 왕궁 주위를 경계하며 도열해 있는 일본군의 모습은 당시의 강압적인 분위기를 느끼게 해준다.
1890년대에 그려진 조선‧중국 관련 니시키에는 한국과 중국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일본 국민에게 전파하고 제국주의 침략사상을 확산시키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일본 풍속화를 다년간 연구해온 재일사학자 강덕상 교수는 “다른 어떤 매체보다도 민중을 선동하기에 적합했던 게 우키요에 전쟁화였으며, 이를 통해 일본의 근대화가 당초부터 침략과 병행된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고 지적한다.

∷ 선임연구원 박광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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