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열전 친일파·8
윤의사 의거 15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서울운동장에서는 김구 주석 중심으로 윤의사 의거 기념식이 열렸다. 신문에는 의거 당시 홍구공원 전경과 체포된 윤의사 사진, 의거를 소개한 기사가 대대적으로 실렸다. 그런데 윤의사 의거를 다룬 지면 하단에는 또 한사람이 등장한다. 백발이 성성한 수염을 늘어뜨리고 동그란 뿔테 안경을 낀 노인의 사진. 김윤정(金潤晶, 1869~1949)이다.
친일의 망자(妄者), 등용을 애원
노망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괘씸한 친일노구의 최후의 발악 – 시내 필운정 174의 1 김윤정(78)은 소위 한일합병 당시 화성돈(워싱턴) 주미대리공사로 있다 일본 주미공사 日置益(히오키마스)에게 조선공사관을 접수시킨 다음 출신교인 ‘껄레데트’ 대학총장의 소개로 이토 히로부미의 등용추천장을 얻어 조선에 돌아와 태인군수부터 인천부윤을 거쳐 충북지사, 중추원 참의를 역임하여 종3위 훈2등의 꼬리표가 붙기까지 왜정에 바친 충성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자인데, 미군이 진주한 후 하지 중장에게 ‘자기는 친일파도 반역자도 아니니 등용해 달라’는 진정을 냈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또다시 이승만 박사, 김구 총리, 김규식 박사에게 대리공사증서, 이토 히로부미의 추천장 등에 영문번역을 첨부하여 같은 진정서를 제출했다가 역시 축출을 당하면서도 누차 오만하게도 전화로 회답을 독촉하는 등 면회를 강요하여 27일 제1관구 경찰청에 면회강요죄로 취조를 받게 되었다.
김윤정. 〈동아일보〉 1946년 4월 29일 석간 2면.
1945년 8월 해방이 되고 불과 8개월 남짓 시간이 흐른 때였다. 해방의 기쁨도 잠시, 한반도는 미군과 소련군에 의한 군정이 시작되었고, 우리 앞에는 일제 잔재를 몰아내고 민족 국가를 건설할 과제가 놓여 있었다. 기사에 언급된 것처럼, 김윤정은 일제 식민통치에 영합하여 고위 관료를 지내며 호의호식한 인물이었다. 곧 청산되어야 할 일제 잔재였다. 그런데 그는 78세의 나이에도 새로운 권력으로 등장한 미군정에게 자신을 등용해 달라는 진정서를 쓰고 있었다.
냉큼 잡아챈 일본이란 동아줄
김윤정의 출신, 가계, 배경은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몇 해 전 김윤정의 손자가 조부를 변호할 목적으로 펴낸 책에 의하면 김윤정 집안은 대대로 무관의 전통을 이어왔으며, 부친(김영석)과 형(김윤창)에 이어 김윤정은 1893년 무과에 합격했다고 한다. 그렇지만 이 책 이외에는 아직까지 이를 증명할 자료는 없다. 필자가 조사한 바로는 1925년까지 김윤정 가(家)는 그 집안 족보에 올라있지 않다. 조선후기부터 근대로 넘어오는 동안 진행된 신분변동은 족보와 관련된 여러 가지 이야기들을 낳았다. 신분세탁을 원하는 자들은 족보를 위조하거나 돈을 주고 사기도 하고, 남의 족보에 편입하는 등 다양한 방법으로 족보라는 것에 이름을 올렸다. 이제 이 땅에는 족보 없는 사람이 없다. 장담할 수는 없지만 김윤정 역시 그런 케이스의 하나가 아닐까 짐작한다.
역사 속에서 김윤정이란 인물은 미국 유학생으로 처음 등장한다. 1897년 김윤정은 관비유학생으로 미국에 건너갔다. 특이한 점은 아들과 함께였다는 사실이다. 1901년 당시 미국유학생의 학비와 식비를 요청하는 공문에는 김윤정과 아들인 김용주(金用柱)의 이름이 함께 올라있다. 서른이 다된 나이에 아들과 함께 미국 유학에 나선 아버지. 앞으로 나올 그의 행적은 비판의 대상이 되겠지만, 이 당시 아들을 데리고 낯선 미국 땅을 찾는다는 건 보통 결기로는 할 수 없는 것이었으리라. 일제강점기에 나온 각종 자료에는 김윤정이 1903년 워싱턴의 콜로우드대학을 졸업했다고 하는데, 하워드대학교에서 수학한 흔적도 있다.
아무튼 졸업 후 김윤정은 주미공사관 서기생으로 외교관 생활을 시작했다. 그리고 참서관을 거쳐 1905년 9월 주미공사 임시대리를 맡았다. 이때 김윤정에게 선택의 순간이 찾아왔다.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대한제국과 이른바 ‘을사조약’을 체결했다. 일본이 한국의 외교권을 장악한 것이다. 일본은 각지의 한국 공사관에 공관을 폐쇄하고 업무를 일본 공사관에 인계한 후 신속히 귀국하라는 훈령을 내렸다. 당시 상당수 외교관들은 쉽게 공사관을 폐쇄하지 못했다. 기울어가고는 있었지만 대한제국이란 나라가 존재하고, 한 국가의 외교관으로서 공사관을 일본에 넘긴다는 게 그리 쉬운 결정일 수는 없었다. 하지만 김윤정의 결정은 신속했다. 누구보다 먼저 공사관을 폐쇄하고 귀국을 서둘렀다. 김윤정으로선 일본이란 동아줄을 냉큼 잡아챈 셈이었으며, 일본의 인정을 확보한 김윤정은 1905년 12월말 아무 걱정없이 귀국길에 올랐다.
김윤정 아들(김용주)과 며느리. 이 결혼은 곧 파국을 맞았다. <매일신보> 1922년 1월 27일.
미국에서 돌아온 김윤정은 탄탄한 관료 경력을 이어갔다. 태인군수, 인천부윤을 거쳐 강제병합 후에는 전라북도 참여관, 경기도 참여관을 차례로 역임했다. 그리고 1925년 3월 충청북도지사에 임명되었다. 당시 도지사는 조선인이 오를 수 있는 몇 안 되는 고위직이었다. 을사늑약 이후 공사관 폐쇄를 시작으로 병합 과정 및 식민통치에 적극 협조해온 김윤정의 행적이 종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였다. 그런데 김윤정이 도지사에 오르는 과정은 그리 순탄하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오랫동안 참여관을 지내며 여러 차례 도지사 물망에 올랐지만 정작 임명에 이르지는 못했다. 그보다 나중에 참여관이 된 사람들에게 밀리기도 했다. 오죽하면 별명이 ‘할 뻔 댁’이었다. 그래서인지 김윤정은 철저히 일본인다운 삶을 추구했다. 당시 그의 인물평에 ‘순일본화한 가정을 가졌다’, ‘가정은 전부 일본식이며 2명의 딸은 항상 화복(和服, 기모노)을 입게 한다’는 표현이 자주 등장한다. 머리 숙이고 악수 잘하는 사람이라는 평도 있었다.
특히 김윤정은 피의 결합을 강조했다. 1922년 1월 김윤정은 아들을 일본인 여성과 결혼시켰다. 당시 이 결혼은 조선인과 일본인 사이의 결혼이자 내선융화의 일대 사건으로 신문지상에 오르내렸다. 김윤정은 “내선융화(內鮮融化)를 이룩할 수 있는 방법으로 조선인과 일본인의 결혼을 장려해야 한다”는 주장을 신문에 실었다.
대저 일본과 조선은 2천여 년 이래 역사상 지리상 순연한 일가(一家)였으며, 다른 나라가 아니었고 순연한 동족이었으며, 이족(異族)이 아니었던 것은 명백한 사실입니다. 재작년 왕세자전하와 방자전하의 혼약이 성립된 것은 우리 7천만동포에 다대한 모범을 베푸심이니, 나는 이를 체(體)하여 양족의 혈통관계를 더욱 돈독·강대하게 함을 기대합니다. 나는 솔선하여 큰 아들을 일본인 豊田 씨의 장녀와 결혼시키기로 하였습니다. 내가 금일 이렇게 나선 것은 물론 내선융화의 결실을 얻고자 함이며, 또 이로써 내선(內鮮) 동포에게 모범을 보여 이후로 더욱 내선인 결혼을 장려하고자 함입니다. (<매일신보>1922년1월27일1면)
본인이 내선융화의 본보기가 되어서 이를 널리 알리고, 그래서 자신이 일본의 식민통치에 이만큼이나 협조적이라는 것을 식민통치 당국에 보여주고 싶었으리라. 안타깝게도 내선융화를 실천하기에 급한 나머지 며느리가 될 인물을 꼼꼼히 따져보지는 않은 모양이다.<윤치호일기>에따르면이 결혼은파국으로끝났다.부유한일본인상속녀인줄 알았던여성이 실은 조선인이었던 것이다. 그녀는 일본인에게 입양된 조선인 고아로서 일본에서 기초 교육을 받은 후 한상룡의 집에 들어가 있었다. 윤치호의 표현을 빌자면 ‘비열한 한상룡’이 ‘허영심에 눈이 먼 김윤정 부인’을 속여 결혼을 시켰다고 한다.
중추원 참의 김윤정, 태평한 세월을 보내다
1926년 8월, 김윤정은 도지사 자리에서 물러났다. 어렵게 오른 자리였지만 불과 1년 4개월여 만에 그만두어야 했다. 함께 물러난 장헌식, 김관현 같은 사람들이 6~7년씩 도지사를 지낸 것을 생각하면 김윤정의 아쉬움이 컸으리라 짐작이 간다. 대신 그에게는 중추원 참의라는 영직이 주어졌다. 이후 김윤정은 해방 때까지 약 20년간 중추원 참의를 지내며 여생을 보냈다.
중추원 회의 전경. <매일신보> 1938년 5월 21일
중추원은 1894년 왕의 자문기구적 성격으로 만들어졌다. 대한제국 시기 근대 의회적 기능을 두자는 주장도 있었지만, 일제의 식민지가 되는 과정에서 대신들의 명예직 대기직 성격에 머물렀다. 그런데 강제병합 후 일제는 중추원 제도를 유지했다. 강제병합에 공로가 있는 인물이나 대한제국의 고관이었던 인물들을 임용하여 조선총독의 자문기구로 활용할 목적이었다. 그러다가 1921년 일제는 중추원관제를 개정하고 중추원의 실질적 활용을 도모했다. 3·1운동 이후 이른바 문화정치 기조 아래 조선인들의 정치 참여 요구를 무마하고, 동시에 지방 유력자들을 중추원에 참여시켜 식민통치의 안정을 기하려는 의도였다. 1920년대 이후 중추원에서는 매년 정기적으로 회의를 열어 조선총독에게 자문했다. 주로 일제의 식민통치방침에 관한 내용이었다.
중추원 회의는 매년 1차례씩 열렸다. 조선총독이 참석한 가운데 중추원 의장이 회의를 주재했다. 의장은 정무총감이 맡았다. 회의에 앞서 조선총독은 총독부의 통치정책 기조와 방향을 설명하고 중추원 참의들의 협조를 구했다. 참의들은 총독부가 제시한 회의 안건에 대해 의견을 피력했다. 회의 안건은 미리 우편으로 통지하였으므로, 참석하지 못한 참의들은 서면으로 의견을 제시했다. 중추원회의 석상에는 항상 총독부 국장들이 배석하였고, 이들은 참의들 앞에서 각 부국별 현황을 보고했다. 참의들로서는 어깨가 으쓱해지는 날이었다. 총독을 위시한 총독부의 수뇌들이 모두 모인 자리였고, 총독부 고관들의 브리핑을 받으며 총독 통치를 위한 의견을 개진하고 있으니, 참의들로서는 자신들이 굉장히 중요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을 것이다.
제21회 중추원회의답신서와 자문사항
약 20년 동안 중추원 참의를 지내며 김윤정은 매년 중추원 회의에 참석했다. 총독부가 제시한 회의 안건을 놓고 발언도 하고 서면으로 의견을 제시하기도 했다. 1930년대 후반부터 중추원 회의에서는 전쟁 이야기가 빠지지 않았다. 중일전쟁에서 태평양전쟁으로 확전되어가는 상황이었다. 일제는 식민지 조선을 전쟁에 동원하는 일이 절실했고, 이를 위한 대책을 중추원 참의들에게 묻곤 했다. 김윤정의 발언을 몇 가지 소개한다.
전쟁 수행을 위해 국가총동원체제를 완성해야 하고, 조선에서는 특히 내선일체를 굳건히 하여 황국신민으로서의 자질을 향상시키는 것이 시급하다. 국민생활에서 내선일체 정신을 구현하기 위해서는 황거망배(皇居望拜, 일본 천황이 있는 곳을 향해 절함)를 철저히 하자. 학교나 사회교화단체에서는 각 가정에서 황거망배를 실천하도록 교육하고 이끌자.(19회 중추원회의, 1938년)
국민정신총동원운동을 통해 반도 민중 사이에는 황국신민이라는 자각이 강화되고 있다. 국난 극복을 위해 이 운동의 철저한 실행이 필요하다. 정서적으로 민중들에게 접근할 방법을 고민하고, 한편 반도의 유력자 혹은 선각자라 자임하는 자들이 나서서 운동을 지도해 가야 한다.(21회 중추원회의, 1940년)
1944년부터 조선에서도 징병제를 실시하기로 했다. 반도 민중이 진정으로 황국신민의 의무를 다하게 되니 진실로 경사스럽기 이를 데 없다. 그런데 일본어를 이해하지 못한 자가 많아 이 의무를 다하지 못할까 걱정이다. 하루빨리 의무교육을 실시해 진정한 황국신민이란 명예를 지닌 의무를 다하길 희망한다.(23회 중추원회의, 1942년)
이런 발언은 비단 김윤정 만의 것이 아니고, 당시 중추원 회의에 참석한 참의들의 일반적 의견이었다. 그들은 일본의 전쟁 승리를 바랐고, 조선인들이 그 전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중추원 참의는 친일파의 상징과 같은 자리였다. 최린은 중추원 참의 자리에 앉으며 “난 반일적인 자세에서 철저한 친일파로 변신했다는 걸 보여주려고 중추원 직책을 수락했다”고 말했다. 식민지 조선인이 중추원 참의를 맡는 것은 되돌릴 수 없는 친일파가 되었음을 의미했다. 그렇기 때문에 반민특위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도 중추원 참의를 당연직 친일파로 규정했던 것이다. 민간에서 발간한 <친일인명사전> 수록 기준에서도 예외가 아니었음은 물론이다.
김윤정. <매일신보> 1925년 4월 2일.
김윤정은 미국 유학을 통해 영어를 익혔고, 어수선한 정국에서 빠른 승진을 거듭해 운 좋게도 미국 공사 대리의 자리에 올랐다. 그리고 조선이 일제의 식민지가 되는 과정에서 적극적으로 일제에 협력했다. 덕분에 그는 식민지기 내내 고위 관료와 중추원 참의를 역임하며 안온한 삶을 누렸다. 특히 대한제국이 외교권을 빼앗겼을 때 미국 공사관을 일본에 넘기는 재빠른 처신으로 일본의 눈에 확실하게 들 수 있었다. 아마도 김윤정이 78세의 노구를 이끌고 미군정에 이력서를 들이민 것은 이때의 기억에 따른 게 아니었을까. 시류를 살펴 현실적 이해에 충실했던 삶의 자세가 어디 가겠는가. 또한 김윤정의 이런 행동은 해방공간, 좌우 대립의 현실정치구도 속에서 식민 잔재 청산이란 역사적 과제 해결이 요원해져 갔던 당시 현실을 대변해 준다.
한마디 덧붙이자면, 김윤정이란 이름이 처음 나오는 자료는 김구의 <백범일지>다.김구는 명성황후 시해범으로 여긴 일본인을 맨주먹으로 살해했다. 유명한 치하포 사건이다. 인천으로 압송된 김구 앞에 등장한 사람이 경무관 김윤정이었다. 김구의 기억이다. 백범일지를 집필하던 1920년대 중반, 당시 경기도 참여관을 하고 있던 김윤정을 언급하고 있다. 김구의 기억 속에서 1896년 인천감옥에서 만난 김윤정은 죄인 김구를 동정하고, 심문 과정을 감시하고 죄수 차림의 사진을 찍어가려는 일본인에 대한 거부감도 드러냈다. 김구를 응원하는 말도 건넸다. 하지만 인천감옥에서 김구를 취조한 경무관은 김윤정이 아닌 김순근이란 사람이었다. 당시 사건 기록에 김윤정이란 이름은 등장하지 않는다. 김윤정에 대한 김구의 기억은 착각이었던 것 같다.
아마도 김구의 착각에서 비롯된 <백범일지>속 김윤정이란인물이여러형태로재생산되고 있다. 1995년 KBS가 광복 50주년 기념으로 <김구>라는드라마를제작해방영한적이 있다. 드라마에는 인천감옥에서 고초를 겪는 김구를 돕는 경무관 김윤정이 그려졌다. 일반 대중에게 미치는 영상매체의 파급력은 막대하다. 어린이 백범일지 같은 책에서도 김윤정이 소개되고 있다. 일반 대중의 오해에 머물지 않았다. 김윤정의 후손은 백범일지를 근거로 김윤정과 김구의 관계를 확대 해석하고, 김윤정이 친일파가 아니었다는 주장을 하기에 이르렀다. 2009년 반민규명위(2004~2009)는 김윤정의 친일반민족행위를 결정했다. 그의 손자는 김윤정이 독립운동을 지원했으니 친일반민족행위 결정을 취소하라는 행정소송을 냈다. 근거로 내세운 것이 <백범일지>였다. 물론 기각되었다. 법원은 1896년 경무관으로서 김윤정이 김구를 배려한 사실이 인정되지만 특별법이 정한 조사범위에 포함되지 않으므로 고려 대상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반민규명위의 결정이 적법하다는 법원의 판단은 옳다. 다만 <백범일지>에 기록된 김윤정의 행적을 인정하고 들어간 것은 정확한 사실확인을 거치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 이 글은 서울시립대 염복규 교수의 글에서 도움을 받았다.
(레디앙 http://www.redian.org/archive/1000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