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사랑

“그깟 종묘의 어보를 잃었다고 꼴푸놀이도 못한단 말이요?” 친일귀족과 총독부 고관들의 신선놀음, 골프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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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식민지 비망록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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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골프놀음에 빠진 시노다 이왕직 차관과 이항구 예식과장의 행태를 질타하는 <동아일보> 1924년 4월 13일자의 보도내용

종묘에 사변이 일어나자 위로는 이왕 전하(李王 殿下; 순종)를 위시하여 창덕궁 내는 주야로 초조한 빛에 싸였으며 더욱이 전하께서는 거의 침담을 잊으시고 ‘어보를 찾았느냐’고 시시로 근시에게 하문이 계시어 실로이 봉답할 길을 모르는 이때에 이왕직의 주뢰자가 되어 소위 이번 사건의 직접 책임자가 된다 하는 이왕직 차관 시노다 지사쿠(篠田治策) 씨와 예식과장 이항구(李恒九) 양씨는 재작 11일 아침부터 자동차를 몰아 용산 효창원(孝昌園)에 이르러 날이 맞도록 ‘꼴프놀이’에 정신이 없었다 하니 과연 이것이 그들의 취할 바 가장 온당한 도리이었겠는가. 차관과 장관은 꼴프놀이에 재미만 보고 지내니 그럴 도리가 있을까 하여 이왕직 안에도 불평이 많으며 이 사건에 대하여 민장관(閔長官; 민영기 이왕직장관)은 다만 낯을 숙이고 묵묵히 있을 뿐이니 과연 그들의 태만한 죄책은 어찌나 징치되겠는가 하여 종척과 귀족 간에 이미 비난이 높다더라.

이것은 <동아일보> 1924년 4월 13일자에 수록된 「꼴푸놀이에 취한 이왕직차관과 예식과장」 제하의 기사이다. 종묘에 봉안된 어보(御寶) 두 개가 도둑을 맞는 큰일이 벌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그 책임자로 지목된 시노다 이왕직차관과 이항구 예식과장이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유유자적 골프나들이에 나선 행태를 질타하고 있는 내용이다.

더구나 이 당시 이항구는 자신의 아버지 이완용(李完用; 후작)과는 별개로 일제로부터 남작(男爵)의 작위를 수여받아 막 조선귀족의 반열에 오른 상태였다. 이 때문에 더 기고만장해진 탓인지는 모르겠으나, 이런 보도가 나가자마자 되려 흥분하여 여러 신문기자들이 모여 앉은 공개석상에서 다음과 같은 막말을 쏟아냈다고 전해진다.

 “종묘의 어보라는 것은 당장 나라에서 쓰시는 것도 아니요, 승하하신 후에 만들어놓은 돈으로 쳐도 몇 푼 어치 안 되는 것인데 그만 것을 잃었다고 좋아하는 꼴푸놀이도 못한단 말이요. 그러면 집에서 술을 먹거나 계집을 데리고 노는 것도 못하겠구료!”(<동아일보> 1924년 4월 15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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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골프’라는 신선놀음에 빠진 이들 두 사람이 뻔질나게 드나들었던 곳이 용산 효창원이라고 표시되어 있다. 효창원은 원래 정조의 장자인 문효세자(文孝世子)가 묻힌 곳으로 정조의 후궁 의빈 성씨(宜嬪 成氏)와 순조의 후궁 숙의 박씨(淑儀 朴氏), 그리고 영온옹주(永溫翁主)의 묘역도 이곳에 함께 조성되어 있었다. 이들 무덤은 일제가 이 구역을 효창공원으로 개발하는 통에 모두 1944년 10월 9일 서삼릉으로 천장(遷葬)되기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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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효창원골프코스에서 제 키 높이의 골프백을 메고 일본인 관리인 듯한 이들을 수발하는 조선인 소년캐디들의 모습이 애처롭다. (<조선>, 1925)

이보다 훨씬 앞서 1919년 5월에는 조선총독부 철도국이 운영하던 조선호텔의 부속골프장을 만들려는 계획에 따라 이곳에 골프장건설이 시작되어 1921년 6월 1일에 개장을 보게 되었는데, 이것이 서울 지역에서 최초로 건설된 ‘효창원 골프코스’였다. 기존의 봉분들이 그대로 남아 있는 상태에서 억지스럽게 9홀 규모의 페어웨이와 그린을 배치하였으니, 그야말로 역사유적의 훼손을 가중시킨 상식 밖의 현장이 아닐 수 없었다.
1924년 4월에는 서울 교외 석관동 지역에 새로운 골프장을 건설하여 그해 12월 7일 ‘청량리(淸涼里) 골프코스’라는 이름으로 개장되었다. 그런데 이곳도 하필이면 의릉(懿陵; 경종의 능)이 포함된 구역이었으므로 효창원의 경우처럼 문화유적의 파괴현장이기는 마찬가지였다. 이때 정무총감 아리요시 츄이치(有吉忠一; 재임 1922.6~1924.7)와 시노다 이왕직차관의 주도로 조선호텔에서 독립된 경성골프구락부가 결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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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골프광’으로 소문난 이마이다 정무총감이 경성골프구락부에서 골프채를 휘두르고 있다. (매일신보」1931년 7월 27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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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릉 터(지금의 어린이대공원 자리)에 조성한 군자리골프코스에서 조선에 유람을 온 일본인들이 골프를 즐기고 있는 장면 (<반도여행의 인상>, 1939)

하지만 이곳에서도 여러 해를 넘기지 못하고 1929년 1월에 이르러 뚝섬 능동에 있는 유릉(裕陵; 순명효황후의 능) 터에 다시 골프장이 건설되었고, 1930년 6월에 정식 개장되면서 여기에는 ‘군자리(君子里) 골프코스’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능원(陵園)이 있던 지역이 잇따라 골프장 건설후보지로 선정된 것은 무엇보다도 이곳의 소유자가 골프광들의 집합처라고 할 수 있는 이왕직(李王職)이었으므로 대규모 토지차입에 협조적이었고, 지형요건으로 보더라도 단기간에 골프장으로 전환하는 데에 유리한 측면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건설된 골프장에는 정무총감을 비롯한 총독부 고위관리는 물론이고 이들에게 기대려는 친일귀족, 일본인 유지, 조선재류 서양인, 중추원 참의, 변호사, 조선인 부호(富豪)와 실업가 따위가 모여들어 친목과 사교라는 이름을 내세워 자신들만의 결탁과 뒷거래를 성사시키는 공간으로 삼곤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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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1년 4월 서울의 도심지인 혼마치(지금의 충무로) 옛 제일은행 경성지점 자리에 들어선 베이비골프장의 전경 (<뻗어가는 경성전기>, 1935)

<삼천리> 1938년 1월호에 실린 「서울의 상류사회, 입회금만 3백 원 드는 꼴푸장」 제하의 기획기사에는 경성골프구락부에 가입된 보통부원 416명 중 조선사람 43인(이 가운데 2인은 일본인을 조선인으로 오인하여 명단에 포함)이 소개되어 있는데, 이를 통해 이들의 면면을 일부나마 살펴보는 것이 가능하다.이 가운데 <친일인명사전>(2009)에 수록여부를 기준으로 친일행적이 농후한 인사들을 다시 간추려 보면 고원훈(高元勳), 김건영(金健永), 김사연(金思演; 캐디위원), 김연수(金䄵洙), 김한규(金漢奎), 민규식(閔圭植), 민대식(閔大植), 박기효(朴基孝), 박석윤(朴錫胤), 박영근(朴寧根), 박영철(朴榮喆), 박용구(朴容九), 박흥식(朴興植), 방태영(方台榮; 핸디캡위원), 유억겸(兪億兼), 이병길(李丙吉), 이승우(李升雨), 이정재(李定宰), 이항구(李恒九), 한상룡(韓相龍) 등 20명이 이 범주에 해당하는 것으로 드러난다. 이 당시 경성골프구락부 가입에는 회원 2인 이상의 추천과 더불어 입회비 2백 원, 연회비 60원, 매월 20~30원의 비용이 수반되었으므로 상당한 재력가가 아니고서는 골프에 빠져드는 것 자체가 힘들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신선놀음은 무한정 지속될 수는 없었다. 제 아무리 이들의 권세가 높다고 하더라도, 전시체제가 길어지면서 골프가 사치 오락의 범주에 속한다는 평판이 속출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비난을 모면하기 위해 경성골프구락부에서는 자계율(自戒律)을 새로 정하여 와타나베(渡邊) 전무이사의 명의로 회원들에게 통보한 일도 있었는데, 그 내용은 <매일신보> 1940년 8월 27일자에 수록된 「꼴푸에 자숙의 선풍」 제하의 기사에 포함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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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일신보> 1940년 8월 27일자에 수록된 골프계의 전시체제 관련 자숙자계(自肅自戒) 내용

1. 30 미만의 사람에겐 거절.
2. 평일 오전 중에 내장(來場)은 거절.
3. 꼴푸장에 자가용차와 택시를 타고 오지 못할 것.
4. 꼴푸용 기구류(器具類)는 실용품을 사용할 것(새로 만들지 말 것).
5. 구락부 주최의 경기는 9월 이후 상품 또는 상배(賞盃)는 전폐하고 이와 동시에 연회(宴會)는 일체 금지.
6. 회원으로서 현재 필요치 않은 은제(銀製) 컵 등을 매장해두었으면 이번에 헌납할 것.
7. 구락부 소유의 일부로 필요치 않은 것은 컵을 이번에 헌납할 것.
8. 구락부 하우스 식당에서는 간소한 음식물 외에는 제공치 말 것.

그러나 일제의 패망 징후가 농후해지면서 경성골프구락부는 1944년 3월에 해산결의가 이뤄졌고, 이와 더불어 ‘군자리골프코스’도 중등학교 생도들을 위한 활공(滑空, 글라이더)훈련장으로 전환하기로 결정되면서 사라지게 되었다. 이에 따라 이곳에서는 그해 11월 25일에 조선국방항공단 경기도지부에서 관할하는 경성활공도장(京城滑空道場)의 개소식이 거행된 바 있었다. 이 자리는 해방 이후 1950년에 골프장이 재건되어 서울컨트리클럽으로 운영되다가 1973년 5월 5일에 어린이대공원으로 전환된 상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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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일신보> 1941년 2월 26일자에 수록된 ‘일평농원(一坪農園)’ 관련기사를 통해 경복궁 내 경회루 후면의 공터에도 총독부 고등관들을 위한 골프장이 존재했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한편, 일제강점기의 골프장에 관한 흔적을 찾다보니 뜻밖에도 경복궁 안쪽에도 총독부 고등관들의 전용골프장이 있었다는 사실이 포착된다. <매일신보> 1941년 2월 26일자에는 전시식량대책의 하나로 국민총력 조선연맹의 주도로 일평농원(一坪農園)을 가꾸도록 통첩한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이에 발맞춰 총독부에서도 모범을 보이기 위해 경복궁 경회루 뒤편 3천여 평의 빈터를 농장으로 바꿔 여기에 배추, 무, 가지, 오이, 감자, 호박, 피마자 등 여러 작물을 심도록 했는데, 이곳은 원래 골프연습을 위한 잔디밭이었다는 언급이 이 기사에 등장한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골프’라고 하면 일부 특권층의 전유물이라는 선입견이 존재하는 것은 보편적인 현상인 듯하다. 그렇더라도 골프대중화의 시대라고 일컫는 지금까지도 여전히 많은 사람들의 뇌리에 골프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가 남아 있는 것은 혹여 이 땅에 골프를 도입한 주체가 바로 식민통치자와 친일귀족들이었다는 역사적 경험이 만들어낸 근원적인 거부감 때문은 아닌지 모를 일이다.

∷ 이순우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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