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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투쟁의 성지 만주 연해주를 가다
정용택 수원지부 회원·경기도교육청역사교육위원장
신흥무관학교기념사업회에서 주관하고 경기도교육청과 경기농협에서 후원한 서전서숙 개교 110주년을 기념하여 8월 29일부터 9월 4일까지 독립투쟁의 흔적을 찾는 학술답사에 참여하였다. 언론 등을 통해 낯익은 분들이었지만 사적인 만남은 없었던 김삼웅, 서중석, 윤경로, 임헌영 선생 그리고 여러 단체에서 온 17명이 일주일간 동고동락한 뜻 깊은 기회였다.
우리 일행이 다녔던 연해주와 중국 동북부의 지린과 헤이룽장은 한말 동포들이 먹고 살려고 그 땅에 숨어들어가기 전까지는 동물의 울음소리만이 가득한 그런 수풀이거나 황무지였다. 동포들이 들어가 억척스럽게 갈고 가꾸어서 사람이 겨우 살만한 곳으로 만들어갈 무렵 조선은 부패하고 무능한 권력에 의하여 망해가고 있었다. 나라를 되찾고자 하는 우국지사들은 지지리 못나고 억울하게 쫓겨 간 이들이 일군 땅에서 독립을 도모하였다. 이들이 없었으면 독립운동기지 건설도 없었으리라. 이들의 피눈물이 없었다면 신한촌도 북로군정서도 청산리 봉오동 전투도 없었으리라.
답사의 처음 3일간은 블라디보스토크를 중심으로 연해주에서 진행되었다. 이상설, 최재형, 홍범도와 관련된 권업회, 신한촌의 흔적을 보았고 1937년 스탈린에 의하여 수십만명의 동포들이 죽음의 열차를 타야만 했던 라즈돌리노예역(驛)과 이상설 선생 유허비, 전로한족대표자회의가 열렸던 곳, 최재형의 집, 안중근을 비롯한 12인의 단지 동맹비를 돌아보았다.
다음 3일간은 중국의 지린성과 헤이룽장성에서 진행되었다. 매일 수백km를 달려서 가고 또 갔다. 서전서숙이 있었던 용정, 왕청현 라자구의 사관양성소, 수분하 대전자지구, 밀산 서일 총재 유적지와 한흥동, 한국독립군과 관련된 동녕현성 등이었다. 이번 답사는 지난해까지 아이들과 우리 역사를 공부하면서 더욱이 우리 독립운동사를 공부하면서 막연하게 말해주었던 내용들을 몸으로 체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지난해 겨울 남만주에서 하얼빈에 이르는 독립전쟁 유적지를 답사하였다. 영하 수십도의 추위와 눈보라 그리고 굶주림 속에서 일본군의 공격과 일본에 매수당한 일부 동포들의 밀고로 독립군들은 외부의 적과 동시에 내부의 적과도 싸워야 했다. 이 분들에게 친일파는 어떤 대상이었을까? ‘무슨 영화를 누리려고 이 고생을 사서하니’라는 생각도 하지 않았을까? 조금만 생각을 바꾸고 조금만 비열하면 그야말로 등 따습고 배부를 텐데 말이다.
청산리 봉오동 전투와 간도참변으로 독립군 조직을 재정비하기 위하여 이동한 독립군들은 조선 독립을 약속한 소련의 배신으로 무장해제를 당하고 이어서 자유시 참변을 겪고 만다. 그 결과 연해주의 독립운동 기반은 급격히 와해되었다. 그 후로는 우리가 흔히 간도라고 불리는 동북3성이 거의 유일한 독립운동 기지가 되어야했다. 그러나 일제의 끊임없는 공작과 소위 민생단이라는 얄궂고 해괴한 단체로 인하여 수많은 독립군들이 억울하게 죽임을 당했고 동포들 사이에 불신은 커져만 갔다.
역사는 이성적으로 또는 합리적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경우가 많다. 특히 독립운동의 역사는 그러한 것 같다. 굶주림과 냉대 속에서 수천, 수만km를 이동해야 했던, 그리고는 그 속에서 죽음을 맞이했던 이름도 남기지 못한 대부분의 독립군들. 그리고 아무런 이름도 남기지 못하였지만 엄청난 도움을 주었던 동포들. 그리고 그 후손들, 수이푼 강가에 만난 이상설 선생, 북로군정서를 이끌고 스스로 죽음을 택한 서일 총재 모두가 고맙고 고맙다. 이런 가슴시린 기회를 준 신흥무관학교기념사업회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