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친일파 청산 없이는 모조리 헛된 일” 이승만에 직격탄 날린 논객
미군정 3년은 전반기와 후반기로 나뉘고, 1947년 6월 이후인 후반기를 통상 ‘남조선 과도정부’라 부른다. 점령 전반기에 군정은 민족 주체성을 탈색시키기 위해 중국 상해 임시정부와 건국준비위원회를 분해시켰고, 친일파를 앞세워 진보적인 민주통일 세력의 날개를 꺾었다. 이런 바탕에서 세운 남조선과도정부 입법의원은 군정의 자문역할을 넘어서지 못했다.
입법의원이 제정한 친일파 숙청법(민족반역자·부일협력자·간상배에 대한 특별법 조례)이 그 한 예이다. 1946년 대구 10월 항쟁이 친일파 때문에 일어났기에 1947년 7월2일 입법의원은 이 법을 통과시켰지만 미군정은 거부했는데, 그 핑계가 재밌다. “반역자 또는 협력자로서 규정받는 자가 누구인가를 확인하는 문제는 상당히 곤란하다.” 그러면서도 “원칙적으로 이런 종류의 법률이 필요”하지만, 입법의원 전원이 민선으로 선출된 상태에서 해야 된다면서 “본관은 이 법안의 조문을 검토하는 것을 삼간다”(군정장관 대리 G.C.헬믹)고 했다.
1946년 5월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된 후부터 군정은 중도 좌우합작을 도왔는데, 필시 좌파세력을 약화시키고 제2차 미소공위를 파탄내기 위한 술책으로 보인다. 미군정이 진정 한반도 통일과 민주정부를 원했다면 건국준비위원회(혹은 상해 임정, 아니면 두 연립)만 인정했으면 간단했다. 그들은 결국 좌우합작운동 지원을 1947년 3월 철회하고, 노골적으로 친일-친미 정권 창출에 나섰다. ‘남의 불에 게 구워 먹을 수는 없다’는 게 냉혹한 국제정치판이다. 이미 이승만은 단독정부 수립을 주장한 정읍 발언(1946년 6월3일) 이후 사실상 남한의 대통령처럼 행세하면서 통일이나 친일파 청산 같은 문제를 암매장시키는 데 주력했다.
■친일파 청산 강조한 경향신문의 논조
이런 시대적인 배경에서 경향신문은 1946년 10월6일 창간됐다. 당시 언론은 김구계의 조선일보, 한민당계의 동아일보, 안재홍계의 한성일보, 진보적인 신문 다수(조선인민보, 중앙신문, 현대일보, 자유신문 등)에다 극우지 대동신문이 있었는데 후발주자로 경향신문이 뛰어들었다. 일제 말기 국내 최고 수준이었던 고노자와(近澤)인쇄소를 접수한 조선공산당은 조선정판사로 개명, 당 기관지 해방일보를 창간(1945년 9월19일)했으나, 미군정은 위폐사건을 빌미로 이를 1946년 5월 폐쇄시켰다. 미군정에 압류된 이 인쇄시설은 많은 정당과 사회단체, 언론기관들이 탐냈는데 이를 한국천주교 서울교구가 매입, 대건인쇄소로 재개명했다.
가톨릭 서울교구의 삼두마차인 노기남, 윤형중, 양기섭 신부는 경향신문 창간 주역이었고, 친일파 청산과 단정수립 반대 주장자였던 초대 주간 정지용과 편집국장 염상섭이 함께했다. 창간호 4쪽에 실린 기독교적 민족주의 작가 박계주는 ‘나는 놀랐다’에서 8·15 이후에도 일본인에 대한 복수적인 폭동 한 번 못 일으킨 민족이 남의 나라 명령엔 왜 고분고분하냐고 비꼰다. 거기에다 자기 민족끼리는 어찌 이리도 용감하게 잔혹한 폭력을 일삼느냐고 개탄한다. 창간 초기의 경향신문은 좌우합작과 친일파 청산을 유독 강조했다. 그러다가 1947년 7월 정지용, 염상섭의 사퇴를 고비로 논조가 약간 달라지기 시작한다. 한국문제가 유엔으로 옮겨 가면서, 단정수립으로 가닥이 잡히자 경향신문과 서울신문이 보수적인 논조로 변하기 시작했고, 양대 민간지인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도 이승만-한민당 노선으로 논조가 굳어가기 시작했다.
■언론인 우승규, ‘우파 논객의 검정말’
상해 임정 청년당원 출신 언론인 우승규는 경향신문 편집국장으로 이승만 정권 수립을 전후해 친일파 숙청 문제를 가장 집요하게 강조한 ‘우파 논객의 검정말’이었다. 필명이 나절로였던 그는 ‘이 대통령에 역이(逆耳)의 일언’(경향신문 1948년 8월1일자)이란 명문에서 한국의 당면문제는 토지개혁과 민생, 남북통일 공작이라며 이걸 못하면 미군정처럼 실패할 거라고 못 박는다. 그 과업을 성취하려면 친일파 척결이 급선무임을 격하게 강조한다.
선량한 민중은 친일파들의 사타구니에 끼어 고개를 들지 못할 지경에다, “그들의 등쌀에 생명과 재산을 도탈(盜奪)당하고 있는 형편”이라고 직설을 퍼붓는다. 3000만의 해방이어야 하는데, “해방은 저 친일 반역 도배를 위해서 있었던 것과 같은 악인상과 반감”을 주고 있기에 “참 애국자들은 나올 때가 아니라 하여 진토에 파묻혀” 있다는 진단을 내놓는다. “실망한 나머지 심지어 ‘나라가 비록 선다한들 이래가지고야…’ 하고 독립에 환멸을 느끼는 기색이 차차 농후해갑니다”라고 했다. 그리고는 친일파를 청산해야만 “북한 측이 남한에게 ‘친일 반역배의 도피소굴’이라고 남한을 조롱하는 따위의 누명을 깨끗이 씻을 것입니다”라고 덧붙인다.
그는 한국의 모리배들을 “동포의 고혈을 빨고 골육을 저미어 사복을 배불리고 있는 자들”로 규정하고, 그 뿌리는 친일파라고 정곡을 찌른다. 이 모리배들이 정상배의 춤에 장단 맞춰 나가는 현실을 직시하며 그는 친일파 청산 없이는 독립도 건국도 다 소용 없다고 직언한다.
대통령에게 직격탄을 날린 나절로는 이어 ‘초대 이범석 내각의 해부-각료들의 인물로 본 전도의 전망’을 4회에 걸쳐 연재한다. “사벨 내각이니 약체내각이니 또는 단명내각이니 하는 온갖 비방과 갖은 물의를 들으면서 난산된 이범석 내각은 시방 빗발치는 듯하는 구설의 시석(矢石)”을 받고 있다고 서두를 뗀다. 장택상(외무장관), 이범석(국방장관, 국무총리 겸직), 윤치영(내무장관)까지는 비판적인 논조로 잘 나갔다. 그런데 상공부 장관 임영신 편에서 필화에 걸려버렸다.
그는 원고를 써서 바로 제작부로 넘겨 교정까지 다 보고는 안심하고 신문 대장을 보니 자기 글이 빠져 있었다. 명색이 편집국장인 자신도 모르게 기사가 빠져버린 이 상황에서 그는 실무자인 편집부 차장과 정경부 차장에게 물어도 아무런 답을 듣지 못했다. 미군정보다 더 야만적인 필화가 생길 조짐을 보였다. 이범석 국무총리가 명동 성당을 통해 기사를 송두리째 빼버린 특이한 ‘필화 제1호’였다(<경향신문 50년사>).
■국회 프락치 사건과 반민특위 테러
남한 단독정부 수립 직전에 벌어진 이 자취도 안 남긴 필화는 이승만 정권의 언론관과 친일파에 대한 자세가 어떻게 전개될 것인지 예견해준다. 제헌국회는 1948년 9월1일 반민족행위처벌법을 통과시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를 구성해 1949년 2월부터 활동에 들어갔다. 그러자 친일세력에 기댔던 이승만 정권은 즉각 반격에 나섰다. 우선 국회 내의 반민법과 외군 철수를 주창하던 개혁적인 소장파 의원들을 4~5월부터 체포해 나가면서, 6월6일에는 반민특위 사무실을 경찰이 급습해 구타와 파괴, 문서 파기 등을 자행했다. 이어 소장파 의원들을 남로당과 연계된 조직이라며 ‘국회 프락치 사건’(노일환, 이문원, 김약수 등 15명 기소)을 터트렸다.
법률적으로는 국회 프락치 사건을 어떻게 평가하는지 모르겠으나, 의원들의 자유로운 사상과 발언을 침해한 대한민국 국회 설화 제1호임에 틀림없다. 이어 친일파 청산의 민족적 상징인 백범 김구 선생이 암살된다. 이후부터 친일파 청산을 주장하는 행위는 이적행위로 변질되었다. 조만간 나올 국정교과서 내용이 궁금해진다.
필명는 ‘나절로’ 임정 당원 출신
언론인 우승규(禹昇圭·1903~1985)의 아호는 나절로이다. 1919년 중국 상해 임시정부 청년당원으로 참여했고, 1923년 상해 혜령전문학교를 졸업했다. 그는 임정 초기 등사기 한 대로 독립운동의 울분을 토하는 신문을 발행하기도 했다.
1931년 귀국 후 일제하에서 여러 신문사 기자로 활동한 우승규는 8·15 이후 경향신문 편집국장(1948년 6월~1949년 2월), 시사신문 주필 겸 편집국장, 서울신문 편집국장 겸 논설위원, 조선일보와 평화신문 논설위원, 동아일보 논설위원·편집국장·논설위원실장 등을 지냈다.
독립운동가 출신인 이시영 초대 부통령은 1951년 5월 이승만 정권의 실정과 부패를 규탄하는 성명서 ‘국민에 고한다-시위소찬(尸位素餐)’을 발표하고 사직서를 냈는데 성명서의 집필자가 우승규였다. 저서로는 <신문인의 양심>, <나절로 만필-신문생활 반세기의 조각보>, <나절로 독본> 등이 있다.
<2016-10-26> 경향신문
☞기사원문:[70주년 창간기획-문학평론가 임헌영의 필화 70년](4) 경향신문 필화 1호 사건과 언론인 우승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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