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신적이고 지속적인 민간인 유해발굴로 ‘노근리 평화상’ 수상
박 교수의 첫 유해발굴은 일본 훗카이도에 아무렇게나 묻힌 한국인 노동자의 유해였다. 일제강점기 댐과 철도공사에 징용됐다 사망한 한국인들의 유해를 발굴하기 시작한 것이다.
2000년부터는 6·25 전사자 유해 발굴단장을 맡아 전국을 누볐다. 수많은 유해와 유품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또 유해발굴의 체계를 만들고 발굴 작업에 참여하는 사병들을 일일이 교육했다. 국방부와 학계를 쫓아다니며 유해 발굴을 지속해야 한다고 설득하는 일도 그의 몫이었다.
강제 징용희생자에서 6·25 전사자 유해까지
결국, 2003년 육군본부 내 사업전담부서가 만들어진 데 이어 2007년에는 국방부 내에 유해발굴 전문부대인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이 창설했다. 그는 유해발굴 및 유해감식 방법과 기법을 상설독립부대에 전수했다.
그의 활동은 한국 전쟁기 민간인학살 희생자들에 대한 유해발굴 과정에서 두드러졌다.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아래 진실화해위원회)가 설립되자 박 교수는 민간인 희생자 유해발굴 조사단장을 맡아 다시 전국을 떠돌았다.
충북 영동군 노근리사건 희생자는 물론, 충북 청원 분터골, 경산 코발트, 지리산 외공리, 진도 갈매기섬, 공주 왕촌 살구쟁이(상왕동), 전남 함평 불갑산 등에서 약 1500여 구를 발굴했다.
그는 당시 군경에 의해 희생된 민간인집단희생사건에 대한 유해발굴사업을 두고 일각에서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자 “국군 유해발굴사업과 민간인집단희생사건은 인권이라는 보편적 가치에서 다르지 않다”며 “국군이든 민간인이든 국가가 나서 이들의 아픔과 상처를 어루만져야 한다”고 일갈했다.
그는 또 정부가 발굴된 민간인 희생자 유해를 안치할 장소를 찾지 못하자 자신이 몸담고 있던 충북대 내에 유해안치시설과 분향소, 유해 감식 및 정리실을 갖춘 ‘6·25전쟁 민간인 희생자 추모관’ 건립을 주도했다.
▲ 25일 노근리평화상을 받은 박선주 교수(오른쪽)와 부인 박데미 씨. 부인 박데미씨는 박 교수의 최대 조력자이자 민간인 희생자 유해발굴의 숨은 공로자다. 유해발굴 현장 촬영은 모두 박씨의 손을 거친다. ⓒ 민간인학살유해발굴공동조사단
▲ 지난 3월, 박선주 교수가 폭설이 내리는 현장에서 유해발굴을 진두지휘하고 있다 ⓒ 심규상
한국 전쟁기 민간인학살 희생자 유해발굴 헌신
하지만 2010년을 끝으로 진실화해위원회마저 활동을 종료했다. 국가 차원의 민간인 희생자 유해발굴 등 과거청산 작업은 전면 중단됐다. 그는 공식 석상에서 ‘매우 유감’이라며 정부를 비판했다.
그러면서도 공주시청 등 지방자치단체를 직접 찾아다니며 못다 한 유해발굴에 관심을 둘 것을 호소했다. 시민사회가 ‘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 유해발굴 공동조사단'(4.9통일평화재단, 민족문제연구소,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민주화운동정신계승국민연대, 포럼 진실과정의, 한국전쟁유족회, 장준하특별법제정시민행동 참여)을 구성하자 박 교수는 자원봉사를 자처했다.
이에 힘입어 경남 진주시 명석면 용산리 유해발굴, 대전시 산내 골령골 유해발굴, 충남 홍성군 광천읍 담산리 유해발굴, 대전 산내 골령골 유해발굴 시굴조사가 가능했다.
‘유해발굴 공동조사단’ 관계자는 “지역사회와 연대해 시민의 참여를 최대한 확보한 것이 성공적인 발굴 요인”이라면서도 “박 교수의 풍부한 경험과 전문적 지식이 없었다면 유해발굴은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흙바닥에 앉아 늘 호미질.. “그가 없었다면 유해발굴 불가능”
주목해야 할 것은 유해 발굴 현장에서 만난 박 교수의 모습이다. 정년 이후 칠순을 눈앞에 두고 있지만, 그의 작업실은 여전히 유해가 묻혀 있는 산골짜기다. 발굴 현장에서는 흙바닥에 앉아 늘 호미를 놓지 않는다. 과로로 쓰러져 심장 수술을 받은 뒤에도 현장으로 향했다. 양심적 지식인, 실천하는 지식인의 표상이었다.
박 교수를 ‘노근리 평화상’ 수상 후보자로 추천한 단체는 ‘친일.독재미화와 교과서 개악을 저지하는 역사정의실천연대'(465개 단체 참여)다.
이들은 추천 이유에 대해 “박 교수는 민간인 희생자 가족들의 한과 아픔을 치유할 때 참된 사회 통합과 민주발전, 인권 국가로 나아갈 수 있다는 소명으로 살아가는 학자”라고 밝혔다.
유해발굴 과정에 과학적, 기술적 노하우를 축적해 새로운 방법을 창출하고 문헌학적, 사회학적 조사기법을 연계해 유해발굴 분야의 기술적, 학문적 질적 발전에 기여했고, 자신의 경험과 지식을 사회에 환원해 역사의 진실을 일궈왔다는 평가다.
박 교수는 이날 수상 소감을 통해 “시민 사회와 주변 사람들의 공감과 도움으로 가능했던 일”이라며 “인권의 가치를 실현하는 일에 남은 힘을 보태겠다”고 말했다.
‘노근리 평화상’은 노근리 희생자를 기리고 기억하자 는 의미에서 제정됐다. 노근리 사건은 1950년 7월 25~29일 미군이 경부선 철도를 따라 이동하는 피란민 대열을 향해 공중 폭격과 기관총 사격을 가해 집단 살해한 사건이다. 정부는 2005년 유족 등의 신고를 받아 사망 150명, 행방불명 13명, 후유장애 63명을 피해자로 확정했다.
<2016-10-28> 오마이뉴스
☞기사원문: 박선주 교수, 그가 없었다면 불가능했던 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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