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된 박정희
박정희는 민족문제연구소에서 펴낸 『친일인명사전』(이하 사전)에 수록된 4,389명 가운데 한 사람이다. 박정희의 친일행적은 세 쪽에 걸쳐 길게 적혀 있다. 박정희의 아들인 박지만이 사전 발간을 앞두고 박정희가 사전에 수록되는 것은 부당하다고 소송을 제기했지만 법원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사법부도 박정희가 사전에 수록될 만큼의 친일행위를 한 것이 맞는다고 인정한 것이다. 박정희가 친일군인 출신이라는 것은 양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역사적 사실이다.
그런데도 우리 사회 일각에는 아직도 법원마저 인정한 엄연한 사실을 사실이 아니라고 믿는 사람들이 있다. 박정희를 반인반신이라고 떠받드는 ‘박정희교’ 광신도들은 박정희가 친일군인이라는 이야기가 나오면 종북세력이 조작한 것이라고 강변하고 아예 친일청산 자체에 종북이라는 낙인을 찍으러 달려들고는 한다.
더 나아가 박정희는 친일군인이 아니라 비밀리에 독립운동을 벌였다는 황당한 주장을 펴는 사람도 적지 않다. 실제로 온라인에는 박정희를 독립운동가로 변신시키려는 글이 꽤나 많이 돌아다니고 있다. 물론 이런 짓거리에 대해 일부 철없는 자들이 그러는 것이려니 하고 넘길 수도 있다.
그런데 최근 들어 사정이 달라졌다. 정권이 작정하고 박정희의 친일행적을 왜곡하려는 조짐이 곳곳에서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작년에 당시 새누리당 대변인이던 이장우라는 한 국회의원이 박정희는 비밀광복군이라고 주장한 적이 있다. 그리고는 그 공을 인정받은 것인지 올해에는 새누리당의 최고위원이 되기도 했다. 그러더니 바로 며칠 전에는 국방부에서 박정희가 대한민국임시정부(이하 임시정부)의 국군이던 한국광복군(이하 광복군)의 일원이었다는 식의 이력을 공개해 여론의 지탄을 받았다.
미리 밝혀두겠다. 박정희가 한때 광복군에 몸을 담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광복군은 우리가 흔히 이야기하는 광복군이 아니다. 1945년 8월 15일 일제 식민통치에서 해방된 뒤 광복군은 이제 정식으로 수립될 대한민국정부의 국군이 되기 위해 확대개편을 추진했다. 그 과정에서 필요에 따라 중국 각지에 흩어져 있던 일본군과 만주군 출신 한인들을 대거 받아들였다. 박정희는 이때 광복군에 들어갔다. 1945년 9월의 일이다.
그러니 박정희는 독립운동과는 무관하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무관한 것도 아니다. 독립운동의 적대세력이었다. ‘천황’의 군대 곧 황군의 장교로 일제가 벌인 침략전쟁에 가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임시정부는 일제에 선전포고를 했다. 그리고 연합국인 중국, 미국, 영국 등과 여러 곳에서 공동작전을 벌였다. 일본군이 임시정부를 포함한 독립운동세력의 주적이었으므로 황군의 장교이던 박정희도 주적의 일원일 수밖에 없다.
‘천황’과 일본에게 충성을 맹서한 박정희
도사견이라는 일본종 개가 있다. 도사는 지금의 시코쿠 고치현의 옛 이름이다. 고치현 사람들이 워낙 개싸움을 좋아해 여러 종의 개를 교미시켜 개싸움에 최적화된 개로 만들어낸 것이 도사견이다. 그래서 다른 이름으로 도사투견이라고 부를 정도로 사나운 개다. 그런데 주인에 대한 충성심 하나는 남다르기 때문에 사람에 따라서는 애완용으로 기르기도 한다.
박정희를 거론하면서 개 이야기를 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사나우면서도 충성스러운 개 그러면 박정희가 연상되기 때문이다. 박정희가 남긴 말글이 워낙 많지만 내게 가장 강력한 인상을 남긴 것은 1939년 일제의 괴뢰국가이자 관동군의 지배를 받고 있던 만주국 신징군관학교(이하 군관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쓴 두 번째 혈서이다. 이 혈서에서 박정희는 군관학교에 입학해 만주군 장교가 된다면 “목숨을 다해 충성을 다할 각오입니다. (중략) 조국(일본:인용자)을 위해 어떠한 일신의 영달을 바라지 않겠습니다. 멸사봉공, 견마(犬馬)의 충성을 다할 결심입니다”라고 썼다.
원래 박정희는 나이가 너무 많아서 군관학교에 입학할 자격이 없었다. 그러자 궁여지책으로 입학만 시켜준다면 ‘천황’과 일본을 위해 주인에게 무조건 복종하는 개나 말처럼 충성을 다하겠다고 맹서한 것이다. 충성서약은 사실상 만주군을 지배하던 관동군을 감동시켰다. 그래서 박정희는 1940년에 특별히 입학자격을 얻을 수 있었다. 그리고 자신의 충성서약이 구호에만 그치지 않는다는 것을 실천으로 보여주었다.
군관학교에 재학하고 있을 때 박정희의 성적은 매우 뛰어났다. 대구사범학교에서 바닥권의 성적을 기록하던 박정희가 더 이상 아니었다. 마치 물을 만난 고기처럼 박정희는 발군의 능력을 보였다. 게다가 ‘천황’에 대한 충성심도 남달랐다. 군관학교 교장이던 일본육군 중장 나구모 신이치로가 박정희에 대해 “태생은 조선일지 몰라도 천황폐하에 바치는 충성심이라는 점에서 그는 보통의 일본인보다 훨씬 일본인다운 데가 있다”고 칭찬할 정도였다.
박정희가 정작 군관학교와 사관학교에서 가장 중요하게 배운 것은 따로 있다. 모든 권력은 총구로부터 나온다는 믿음이 그것이다. 박정희는 군관학교와 사관학교에 재학하고 있을 때 일본의 극우군인들이 쇼와(昭和)유신이라는 이름 아래 천황제를 더 강화하기 위해 벌인 몇 차례의 군사반란에 매료되었다. 천황제 파시즘의 열렬한 추종자가 된 것이다.
나중에 박정희가 1961년 5·16군사쿠데타를 일으킨데 이어 1979년 10월 26일 죽기 직전까지 절대 권력자로 법과 국민 위에 군림하면서 1인영구집권을 꿈꾼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심지어는 1972년에 쇼와유신을 본뜬 10월유신을 선포함으로써 스스로 한국의 ‘천황’이 되려고 한 것도 황군 장교가 되기 위해 교육을 받는 과정에서 내면화한 천황제 이데올로기와 무관하지 않다.
팔로군 공격에 참여한 황군 장교 박정희
박정희가 군관학교를 졸업한 것은 1942년 3월이었다. 우등생으로 만주국 황제로부터 금시계까지 받았다. 같은 해 1월에는 성적이 우수한 졸업생에게 주어지는 특혜에 따라 일본 육군사관학교(이하 사관학교)에 편입할 수 있었다. 사관학교에서도 우수한 학생이었다. 같은 기수로 편입한 학생 가운데 3등의 성적을 기록했다. 사관학교를 졸업한 뒤 1944년 4월부터 같은 해 12월까지는 일본육군 견습사관의 자격으로 관동군 23사단 72연대와 만주군 보병제8단에서 근무했다. 보병제8단 소대장으로 재직하고 있던 1944년 7월에는 팔로군을 공격하는 데도 참가했다.
팔로군은 흔히 중국공산당의 군대로 알려져 있지만 정확하게 말하면 중국 국민혁명군 예하의 한 부대였다.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중국국민당과 중국공산당 사이에 국공합작이 이루어졌다. 국공합작의 일환으로 중국공산당 산하의 홍군이 중국 국민혁명군 산하 부대로 편입되어 팔로군이 된 것이다. 팔로군이라는 말 자체가 국민혁명군의 여덟 번째 부대라는 뜻이다. 팔로군은 연합국의 일원인 중국의 군대였다. 따라서 박정희가 팔로군 공격에 참가한 것은 연합군과 싸운 것과 마찬가지였고 동시에 일제의 반인륜적 침략전쟁에 적극 동조한 것과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박정희가 황군 장교로 복무한 기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박정희는 1944년 12월 일본군 소위에서 예비역으로 편입되는 동시에 만주군 소위로 임명되었고 1945년 7월 만주군 중위로 진급했다. 그런데 박정희로서는 예상하지 않았던 사태가 벌어졌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항복을 선언한 것이다. 박정희가 얼마나 당황스러웠을지는 충분히 짐작이 된다. 황군에서 장교로 복무하면서 ‘천황’과 일본에게 충성을 다하려고 했는데 갑자기 충성의 대상이 없어져버렸으니 요즘 말로 하면 멘붕에 빠졌을 것이다.
그러나 박정희는 바로 변신을 모색했다. 중국인 군인들에 의해 무장을 해제당한 박정희는 만주를 떠나 1945년 9월 무렵 베이핑(지금의 베이징)으로 갔고 그곳에서 광복군 제3지대의 중대장을 맡았다. 박정희 추종자들이 박정희가 일제강점기에 독립운동을 했다는 황당한 이야기를 퍼뜨리는 계기는 여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박정희가 비밀광복군이라는 조작의 원점
박정희가 대통령으로 권력을 과시하고 있던 1967년에 박영만이라는 사람이 『광복군』이라는 책을 펴냈다. 이 책은 이후 박정희의 친일행적을 물타기하기 위해 벌어지는 일련의 역사왜곡에서 성전이 되었다. 박정희가 만주군 장교로 복무하고 있을 때 사실은 광복군과 연락을 취하면서 만주군 안에 광복군의 조직을 만들려는 비밀공작을 하고 있었다는 황당한 이야기를 처음으로 썼기 때문이다. 박영만이 아무 근거도 없이 엉터리 이야기를 지어낸 이유는 뻔했다. 박정희정권으로부터 무언가를 얻어내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이 이야기를 들은 박정희는 대노했다고 한다. 쓸 데 없는 짓을 했다는 것이었다. 박정희의 이런 반응을 박정희에게 일말의 양심이 남아 있었던 것으로 보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박정희를 광복군이라고 하는 것은 박정희에게 모욕이었다. 군관학교에 들어갈 때부터 황군 장교라는 자부심을 갖고 있던 박정희는 죽을 때까지 그런 자부심을 버린 적이 없다.
한때 심복이던 김형욱이 박정희에 대해 “박정희란 사람의 교육과 사상이란 일제하의 식민주의적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고 평가한 것이야말로 ‘황군의 마지막 장교’ 박정희의 실체를 이해하는 데 많은 것을 시사한다. 박정희는 5·16군사쿠데타를 앞둔 자신의 심정을 “일편단심 굳은 결의 소원 성취 못하오면 쾌도할복 맹세하고 일거귀향 못하리라”고 피력한 바 있다. 여기서 ‘할복’이라는 표현은 보통의 한국인에게는 생소한 것이다. 그러나 황군 장교이던 박정희에게 그것은 조금도 낯설지 않은 것이었다. 어떤 의미에서는 자신의 세계관을 가장 함축적으로 드러낸 것이었다고도 할 수 있다.
박정희는 대통령이 되고 난 뒤에도 일본제국에의 향수를 숨기지 않았다. 보기를 들어 보안사령관 출신인 강창성은 “청와대 집무실에 들어갔더니 박대통령이 일본군 장교 복장을 하고 있더라고요. 가죽 장화에 점퍼 차림인데 말채찍을 들고 있었어요. 박대통령은 가끔 이런 옷차림을 즐기곤 했지요. 만군 장교 시절이 생각났던 모양이에요. 다카키 마사오(박정희-인용자) 소위로 정일권 중위와 함께 말달리던 시절로 돌아가는 거죠. 그럴 때 보면 항상 기분이 좋은 것 같았어요”라고 회고했으며 5·16군사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뒤 술에 취해 흥이 날 때마다 일본군복을 입고 청와대 뜰을 거닐면서 “갓데쿠 로조토 이사마시쿠(이기고 오겠다고 씩씩하게)”로 시작되는 일본군가 <노영의 노래(露營の歌)>를 불렀다는 이야기도 많이 알려져 있다.
박정희에게는 어줍잖은 광복군 비밀요원보다 황군 장교가 더 자랑스러운 이력이었다. 그러니 박정희로서는 광복군 출신이라는 박영만의 책이 자신에 대한 모독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박정희가 비밀광복군이라는 조작의 확산
박영만이 지어낸 이야기는 육군 안에서 마치 사실인 것처럼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육군본부에서 1980년에 펴낸 『창군전사』와 5·16군사쿠데타 당시 계엄부사령관이던 장창국이 1984년에 쓴 『육사 졸업생』에도 버젓이 같은 내용이 실렸다.
그러나 1987년 6월민주화운동을 계기로 우리 사회에서 민주화가 어느 정도 진전이 되면서 박정희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일단 매듭이 지어졌다. 박정희가 비밀광복군이었다는 이야기도 흐지부지되었다. 그러나 이런 상황은 오래 가지 않았다.
민주정부 10년을 거치면서 위기위식을 갖게 된 극우세력의 반격이 시작되었다. 이들은 무덤 속에 들어간 박정희를 다시 불러냈다. 시대착오적인 박정희 향수가 경상도지역과 노년층을 중심으로 퍼져나갔다. 여기에 박정희의 딸이자 후계자인 박근혜가 아버지에 대한 향수를 바탕으로 정치인으로 급성장하면서 종교적 숭배의 대상이 된 박정희의 행적을 왜곡하려는 작태가 다시 벌어지기 시작했다.
대표적인 보기가 이기청이라는 사람이 2004년 7월 24일 『세계일보』에 「친일파 청산, 옥석 가려야」라는 글을 기고한 것이다. 박정희 추종자들이 이 사람의 글을 자주 들먹이고 있기 때문에 좀 길지만 핵심적인 부분만 인용하겠다.
“박 대통령은 일제시대 일본군 중좌 계급장을 달고 만주땅에서 복무했다. 일제가 채용한 공직자가 모두 친일파라면 박 대통령도 친일파이다. 그러나 박 대통령이 일본 군복을 입었지만, 극비리에 독립군을 도왔다면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필자는 의병정신선양회 활동을 하며 마지막 임정요인이었던 백강 조경환 선생을 자주 뵈었다. 백강은 ‘독립유공자로 둔갑한 친일파가 함께 묻힌 국립묘지 애국자묘역에는 절대 가지 않겠다’고 유언을 할 정도로 강직한 인물이다. 그 백강 선생이 하루는 내게 박 대통령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줬다. 5·16쿠데타가 일어나고 얼마 안돼서 한 젊은이가 면목동 집으로 찾아왔는데, 큰절을 하더라는 것이다. 동행한 사람이 ‘대통령이십니다’ 하기에 보니 박정희였다. 박 대통령은 ‘제가 만주에 있던 다카키 마사오입니다’ 하는데, 조선인 병사들을 독립군으로 빼돌렸던 다카키의 이름을 익히 들었기 때문에 놀랍고도 반가웠다. 당시 상해 임시정부는 독립군을 보충해야 할 매우 어려운 상황이어서 박 중좌의 도움은 컸다고 한다.”(강조:인용자)
이 글은 완전히 엉터리이다. 먼저 ‘백강 조경환 선생’이라는 사람이 존재하지 않는다. 백강이라는 호를 쓴 독립운동가는 있었다. 임시정부 국무위원 가운데 마지막 생존자였던 조경한이다. 그렇다면 조경한을 조경환으로 쓴 셈인데 박정희가 독립운동가였다는 엄청난 주장을 하는 데 유일한 근거가 되는 사람의 이름을 잘못 쓴 셈이다. 조경한은 죽기 전에 회고록을 남겼는데 그 어디에도 박정희가 비밀 광복군이었다는 사실은 적혀 있지 않다.
틀린 것은 또 있다. 조경한은 면목동에서 산 적이 없다. 박정희는 일본군 중좌가 아닌 만주군 중위였다. 당시 임시정부는 상하이가 아닌 충칭에 있었다. 더 나아가 만주에 있던 박정희가 중국 남서부의 충칭으로 조선인 병사들을 빼돌렸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일이다. 중국 관내(만리장성 산해관 이남)의 일본군 부대를 탈출해 광복군에 입대한 경우는 꽤 있지만 만주군에서 탈출해 광복군으로 입대했다는 경우는 전혀 없다. 조경한이 박정희에 대해 익히 알고 있었다면 당시 충칭에서 활동하고 있던 다른 임시정부 요인들도 박정희의 공작내용에 알고 있어야 하는데 그런 이야기를 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
이 글의 의도는 뻔하다. 세상 사람들이 친일파라고 하는 박정희가 사실은 친일파가 아니라 독립운동가였다는 식의 억지 주장을 펴려는 것이다. 이 글이 나온 시기는 같은 해 3월 국회를 통과한 ‘일제강점하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이하 특별법)의 개정 문제가 뜨거운 논란이 되고 있을 때였다. 그리고 논란의 핵심이 바로 박정희였다. 처음에는 일본제국주의 군대 장교 이상으로 되어 있던 특별법 원안이 국회를 통과하는 과정에서 당시 다수당이던 한나라당의 반대로 중좌(지금의 중령) 이상으로 바뀌었다. 박정희를 아예 대상에서 제외하기 위한 꼼수였다.
그런데 특별법 통과 직후 치러진 총선에서 열린우리당이 승리하면서 특별법 개정이 추진되었다. 그리고 2004년 12월 중좌 이상으로 되어 있던 조항을 “소위 이상의 장교로서 침략전쟁에 적극 협력한 행위”로 바꾸는 특별법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했다. 이제 박정희도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의 대상에 포함시킬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니 박정희 추종자들로서는 어떻게 해서든 박정희가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결정되는 것을 막아야 하는 절박한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특히 아버지의 명예를 회복하겠다는 일념으로 정치에 입문했고 대권 도전을 준비하고 있던 박근혜에게는 박정희 행적의 세탁에 대한 간절함이 더 컸다. 이기청이 박정희의 구원투수 노릇을 하겠다고 엉터리 이야기를 기고한 데는 이런 상황이 배경으로 작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친일파를 위한 박근혜정권의 역사쿠데타
박근혜정권의 출범 직후에 ‘아버지는 군사쿠데타, 딸은 역사쿠데타’라는 말이 나왔다. 박정희는 군사쿠데타를 일으켰는데 박근혜는 군사쿠데타 대신에 역사쿠데타로 박정희를 따라 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실제로 박근혜정권이 들어서면서 근·현대사를 왜곡하는 일이 빈번했다.
작년에 법무부에서 광복70주년을 기린다고 청소년용 동영상을 만들어 배포한 적이 있다. 동영상에는 열 명 남짓의 독립운동가가 나오는데 일본 제국의회 귀족원 의원을 지낸 거물급 친일파 윤치호가 윤봉길과 함께 대표적인 독립운동가로 소개되었다. 윤치호가 누구인가? 국가기구인 반민규명위에서 중대한 친일반민족행위를 했다고 결정한 1,006명 가운데 한 사람이다. 일제강점 초기의 대표적인 친일파가 이완용이라면 윤치호는 거기에 비견할 만한 일제강점 말기의 대표적인 친일파였다. 이런 친일파를 대표적인 독립운동가의 반열에 올려놓는 작태가 광복70주년에 벌어진 것이다.
작년 초에 교육부는 교육자로서 시대를 초월해 온 국민의 존경을 받는 분을 대상으로 ‘이 달의 스승’이라는 것을 시행하기로 하면서 첫 번째 대상으로 “헌신적인 교육자의 표상이자 민족운동가”인 최규동을 선정했다. 그런데 최규동은 민족교육자가 아니었고 민족운동가는 더더군다나 아니었다. 대표적인 친일행적은 ‘중동학교장 최규동’의 명의로 조선총독부 학무국의 관변단체인 조선교육회 기관지 『문교의 조선』에 일본어로 쓴 「죽음으로써 군은(임금의 은혜-인용자)에 보답하다」라는 글을 기고한 것이다. 글의 내용은 조선의 젊은이들이 기꺼이 징병제에 응해 ‘천황’을 위해 목숨을 바치라는 것이었다. 이밖에도 현재 확인되는 최규동의 친일 행적은 많아서 무려 10여 건에 이른다. 그런데도 교육부는 친일교육자에게 첫 번째 ‘이 달의 스승’이라는 영예를 안기려고 한 것이다.
법무부와 교육부는 국방부에 비하면 그나마 나은 편이다. 시민사회의 비판을 받자 바로 꼬리를 내렸기 때문이다. 그런데 국방부는 줄기차게 친일군인을 미화하는 작업을 벌이고 있다. 국방부는 이명박정권 시절에 이미 “항일무장세력에 대한 탄압 활동과 일제의 침략전쟁에 협력”했다는 이유로 반민규명위에서 친일반민족행위를 한 것으로 결정된 백선엽을 한국전쟁의 전쟁영웅으로 기려 명예원수로 추대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백선엽은 “조선인 항일세력은 조선인의 손으로 잡는다”는 목표 아래 친일파를 앞세워 만든 조선인부대로 악명이 높던 간도특설대 출신(만주군 중위)이었다. 그런 백선엽에게 국방부는 한국군인의 최고명예를 부여하겠다고 한 것이다.
시민사회의 강력한 항의에도 불구하고 국방부의 백선엽 영웅 만들기 작업은 중단되지 않았다. 아니 박근혜정권 들어서는 더 노골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2013년부터는 아예 한미동맹60주년을 맞아 10대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백선엽의 이름을 붙인 ‘백선엽 한미동맹상’이라는 것을 만들었을 정도이다. 박근혜정권이 백선엽으로 상징되는 친일파를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작년 3월 6일 당시 새누리당 대표이던 김무성이 백선엽을 방문했을 때의 모습이다. 이 날 김무성은 백선엽에게 거수경례로 인사를 한 뒤 “장군은 6·25전쟁 때 나라를 지켜준 영웅으로 생각하고 새누리당원 모두의 마음을 모아 존경을 표하기 위해 왔다”라는 극찬의 인사말까지 했다.
친일파를 대표적인 ‘위인’으로 만들려는 후안무치한 작태는 단지 일부 정부부처나 새누리당의 무지와 몰상식의 탓만이 아니다. 거기에는 근본적으로 친일과 독립운동, 더 나아가서는 근·현대사의 전반적인 흐름을 극우적 사시로 바라보는 박근혜정권의 인식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박근혜정권의 역사쿠데타와 친일군인 박정희의 복권
물론 친일파의 역사적 복권 시도는 이명박정권 시절부터 뉴라이트에 의해 꾸준히 이루어져 왔다. 그러나 박근혜정권에 들어서는 정권차원에서 친일파에 대한 미화와 찬양을 공식화하는 것이 더 두드러지고 있다. 박근혜정권은 대한민국의 정체성 또는 정통성 확립이라는 명분 아래 친일파의 복권을 꾀하고 나아가 민족의 지도자로 표상하는 데로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2013년에는 친일을 미화한 교학사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를 준국정 교과서로 밀어붙이려 했고 교학사 교과서가 사실상 0%대의 채택률로 교육현장에서 퇴출되자 2015년부터는 국정 교과서를 밀어붙이고 있다. 이제 불과 얼마 후면 국정 교과서가 나온다는데 집필진도 집필기준도 깜깜이 상태이다. 박근혜정권이 복면집필을 강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어떤 교과서가 나올지 짐작만 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런데 몇 가지는 분명하다.
먼저 현행 검정 교과서에 정부가 수립된 날로 적혀 있는 1948년 8월 15일을 대한민국이 수립된 날로 바꾸는 것이다. 대한민국 수립 곧 건국을 교과서에 집어넣어 몇 년 전부터 극우세력이 줄기차게 주장해 오던 건국절 타령을 국가 차원에서 공인하겠다는 것이다. 1948년이 건국 원년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친일파와 독재권력이야말로 근·현대사의 주류라고 본다. 친일파와 독재자라고 비난을 받는 사람들이야말로 반공국가 대한민국을 건국하고 한강의 기적을 이룬 주역으로 비난이 아니라 칭송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거꾸로 현행 헌법에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으로 표현되어 있는 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은 근·현대사에서 아예 지워버리고 싶어 한다. 오늘날의 잘 사는 나라 대한민국은 독립운동이나 민주화운동과는 무관하다는 것이다. 이들의 일차적인 목표는 일단 독립운동을 대한민국의 역사에서 분리시키는 데 있다. 그러기 위해 시민사회의 강력한 저항에도 불구하고 국정 교과서를 통해 1948년이야말로 대한민국 건국 원년이라는 억지 주장을 밀어붙이고 있는 것이다.
또 하나 분명한 것이 있다. 박정희 미화이다. 박근혜정권이 박정희를 미화하기 위해 국정 교과서를 밀어붙인다는 것은 초등학교 학생들도 아는 공공공연 사실이다. 친일 미화도 궁극적으로는 박근혜정권의 염원인 박정희 역사 세탁 작업의 일환이다. 친일행적만이 아니라 독재행적마저 세탁할 것도 분명하다.
현재 초등학교 학생들이 쓰는 교과서가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초등학교 학생들은 5학년 2학기와 6학년 1학기 사회 과목에서 한국사를 배운다. 근·현대사는 6학년 1학기에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초등학교 교과서는 오래 전부터 교육부가 발행하는 국정 교과서였다. 그런데 올해 초에 나온 6학년 2학기 사회 교과서를 보면 노골적으로 박정희를 미화하고 있다. 단적인 보기가 박정희 정권 앞의 이승만정권이나 뒤의 전두환정권에 대해서는 독재정권이라고 쓰면서도 두 정권보다 더 지독한 독재정권이었던 박정희정권에 대해서는 아예 독재라는 말을 쓰지 않는 것이다.
심지어는 유신체제의 문제점을 대통령에게 권한이 지나치게 집중되었다는 식으로 쓰는가 하면 마치 유신체제에 반대하는 민주화운동 때문에 민주주의가 발전하지 못했다는 식으로 썼다. 박정희정권의 잘못에 대해서는 무한 면죄부를 주는 한편 치적은 다른 정권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자세하게 나열해 놓았다. 교욱부에 펴내는 국정 교과서이기 때문에 곧 나올 중학교 역사 교과서와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도 마찬가지일 것으로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굳게 믿는다. 박근혜정권의 역사쿠데타는 결코 성공하지 못할 것이다. 당장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라는 사태가 벌어지면서 과연 교육부가 이미 식물이 된 대통령의 생각대로 끝까지 국정 교과서를 밀어붙일 의지를 갖고 있는지 확신할 수 없다는 이야기까지 나온다. 설사 국정 교과서가 나오더라도 그 교과서는 곧 쓰레기통으로 들어가 아무도 돌아보지 않는 역사의 폐기물이 될 것이 뻔하다. 학교 교사들과 학생들 그리고 학부모들이 국정 교과서를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아무리 박근혜정권이 엉터리 이야기를 근거로 박정희가 비밀 광복군이었다고 떠들어도 박정희가 친일군인이었다는 역사적 사실은 바뀌지 않는다. 역사학계는 박정희의 정체를 그대로 드러낼 수 있을 정도의 역량을 갖추고 있다. 이미 교학사 교과서 사태 때 드러났듯이 그리고 작년에 건국절 관련 여론조사를 했을 때 1948년이 건국 원년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보다 두 배 가량 많았다는 데서 드러났듯이 다수 시민이 근·현대사를 바라보는 시각은 매우 건전하다.
보수정권 9년 동안 민주주의가 위협을 받는 가운데서도 그에 앞선 시기에 쌓아놓은 민주주의의 힘은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탄탄하다. 아무리 박정희교 교도들이 패악질을 해도 이 땅에는 아직도 독립운동가를 존경하고 민주주의를 믿는 시민들이 더 많이 있다. 건전한 역사의식, 시민의식 때문에라도 박근혜정권에 의한 박정희를 위한 역사쿠데타는 반드시 좌초할 것이며 박정희의 군사쿠데타와 마찬가지로 역사적 심판의 대상이 될 것이다.
<2016-10-30> 민중의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