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학술부문 김상숙 전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조사관, 사회부문 조영선 변호사 수상
때: 2016년 11월 11일 금요일 오후 7시
곳: 한국프레스센터 19층 기자회견장
■ 선정경위
제10회 임종국상 수상자 후보 공모에는 학술‧문화 부문 여섯 사회‧언론 부문 다섯 등 11건이 올라왔다. 지난 10월 4일 열린 예비심사에서 두 부문에 각 3배수의 수상후보를 일차 선정하였으며, 이어 10월 11일 열린 본심에서 열띤 토론을 거쳐 최종 수상자를 확정하게 되었다.
심사위원회는 수상후보자의 최근 3년간 저작물과 활동사항 뿐 아니라, 기타 경력이나 관련 자료 등도 널리 참고해 적격자를 선정하고자 노력했다. 수상자 선정에서 가장 우선시한 기준은 금기의 영역에 대한 탐구와 도전정신이었다. 그것은 1966년 『친일문학론』을 발표한 이후 평생 주류 사회의 외면을 받으면서도, 진실을 향한 고독한 투쟁을 결코 포기하지 않았던 임종국 선생이 우리에게 남긴 삶의 지표이기 때문이다.
역대 심사과정에서도 그러하였듯 이번에도 수상자 결정이 쉽지 않았다. 본심에 오른 후보자 모두 업적과 활동에서 우열을 논하기 어려웠으며 수상의 자격이 충분하였지만, 최종적으로 학술부문에 김상숙 씨를 사회 부문에 조영선 씨를 선정하기로 의견일치를 보았다.
학술부문 수상자인 김상숙 씨는, 진보운동의 불모지나 다름없는 대구·경북지역을 근거지로 여성·노동·역사 등 여러 부문에서 오랜 기간 사회운동을 펼쳐온 활동가이자 연구자이다. 특히 2007년부터 4년간은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에 조사관으로 참여하여 한국전쟁 전후 대구·경북지역의 민간인희생사건을 규명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최근의 노작인 수상저서 『10월항쟁-1946년 10월 대구, 봉인된 시간 속으로』는 그동안 금기시되고 있던 10월항쟁에 대한 본격적인 학술연구로 피해자의 목소리를 역사의 영역으로 온전히 복원해 낸 값진 성과였다. 특히 좌우익을 아우르는 400여 명의 관련자를 면담 취재함으로써 문헌자료의 한계를 극복하고, 장기항쟁이라는 관점에서 가장 실상에 접근한 10월항쟁의 역사상을 그려냈다.
심사위원회는 극우세력의 과거사 부정과 역사변조가 날로 우심해지고 있는 현실 속에서, 발로 뛰어 현장을 이해하고 이를 과학화한 『10월항쟁』과 같은 저술이 시대적 요구에 부응하고 있다는 점을 높이 평가하였다. 또 김상숙 씨의 작업들이 임종국 선생이 추구했던바 실천적 학문세계를 지향하고 있다는 점에도 주목하여 그를 학술부문 수상자로 결정했다.
사회부문 수상자인 조영선 씨는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사무총장을 역임한 법조인으로서 우리 사회에 인권과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오랜 기간 헌신적인 활동을 벌여왔다. 한센회복자 문제,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학살 사건, 재일동포 정치범 사건, 긴급조치 사건, 7080 노동탄압 사건, 형제복지원 사건 등 일제강점기로부터 군사독재시기에 이르기까지 인권 노동 과거사 전반에 걸친 진상규명과 피해자보상 입법, 소송지원은 사회적 약자의 권리 회복과 역사정의 실현에 크게 기여했다. 최근에는 박근혜 정부의 한국사교과서 국정화를 저지하기 위한 법률 지원에도 앞장서고 있다. 한마디로 법정과 현장을 넘나드는 그의 치열한 실천정신은 시민사회의 귀감이 되고도 남음이 있다 하겠다.
심사위원회는 인권의 사각지대에서 소외당하고 있는 피해자들과 함께한 그의 일관되고 지칠 줄 모르는 헌신과, 치열한 현실 참여를 통해 과거사청산운동에 새로운 지평을 열고 해결을 한 단계 진전시킨 그의 업적을 높이 평가하여 그를 사회부문 수상자로 결정했다.
임종국상은 올해로 10회째 수상자를 배출하게 되었다. 임종국상의 권위는 사회적 가치기준을 바로 세운 기념비적 저작인 『친일문학론』등 임종국선생의역사와문학에관한두드러진업적과실천적 면모에 기인한 바 크다. 거기에다 공정성과 객관성을 최선의 기준으로 삼은 심사위원회의 일관된 원칙과 역대 수상자의 면면도 적지 않게 보탬이 되었을 것이다.
영예의 수상자들에게 축하의 박수를 보내면서, 이 상이 가지는 의미가 큰 만큼 지금까지의 진정성을 잃지 않고 각자의 분야에서 크게 활약해주시길 기대한다.
2016년 11월 11일
임종국상 심사위원회 │ 윤경로 박찬승 장완익 정근식 정해구 조세열
■ 수상소감
봉인을 풀고 역사적 진실과 마주하고자
2007년, 진실화해위원회에서 ‘대구10월사건’을 맡아 10월 항쟁과 인연을 맺은 뒤 9년이 가까운 시간이 흘렀습니다. 당시 제가 맡은 일은 학살된 희생자들의 신원을 밝히고 그들이 공권력에 의해 불법적으로 살해되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었습니다. 낡은 문서를 뒤지고 목격자를 수소문하며 시골 마을을 돌아다녔고, ‘처형자명부’와 같은 명단을 처음 발견했을 때는 그 이름들 모두 빛을 보게 해야 한다는 압박감에 밤잠을 설쳤습니다. 늘 전쟁터에 사는 것 같았고 마음에는 시신 냄새가 가시지 않았습니다.
진실화해위원회가 산적한 과제를 남긴 채 문을 닫고 난 뒤에도 한동안 습관처럼 학살에 관한 글을 읽고 썼습니다. 그리고 유족들을 만나고 목격자들을 찾아다녔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마음의 여유가 생긴 덕분인지 조금씩 항쟁이 눈에 들어오고 사회운동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오랜 시간 10월 항쟁의 역사적 자취를 찾아다니면서 참 많은 사람을 만나고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제가 구술자 선생님들에게서 들은 이야기는 항쟁 이전의 이야기보다는 10월 항쟁을 출발점으로 하는 사회운동에 관한 이야기가 많습니다. 사회운동에 관한 이야기라 해도 유명한 사람들이 거창한 이론으로 정리한 영웅담이나 이념적 선입견으로 채색한 금속성의 괴담이 아니라 그 시대에는 일상적이었던 삶에 관한 이야기였습니다. 그것은 어둡고 살벌하던 그 시대의 풍경담이기도 했고, 그 속에서도 생명력을 지니며 성장했던 한 세대의 성장담이기도 했습니다.
그것은 한 사회의 역사이기도 했습니다. 해방 후에서 한국전쟁에 이르는 시기를 학자들은 국가형성기이자 분단체제 형성기라고 규정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 기간은 줄기차게 민중항쟁이 일어났던 기간이고, 근대와 현대의 교차점에서 일어난 그 시기의 민중항쟁이 현대 한국사회 형성에 중요한 축이 되었다는 사실은 간과하기 쉽습니다. 그리고 그 출발점이자 뿌리가 되었던 1946년 10월 항쟁은 아직 잊히고 봉인된 채로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봉인을 풀고 역사적 진실과 마주하고자, 그 동안 작업한 것을 모아 올해 10월 항쟁 70주년에 맞춰 『10월 항쟁 – 1946년 10월 대구, 봉인된 시간 속으로』를 출간했습니다.
한국 현대사나 민간인학살에 관한 연구를 하는 다른 분도 마찬가지겠지만, 자료를 보다 보면 감정적으로 힘들 때가 많습니다. 역사 속에서 분노와 슬픔과 공포의 순간을 자주 맞닥뜨리기 때문입니다. 한밤중에 녹취록을 풀면서 구술자가 증언해주신 이야기를 들을 때, 옛 문서 자료더미 안에서 뜻밖의 사진이나 기사를 발견할 때, 혼자 충격을 받고 눈물을 흘렸던 순간도 많았습니다.
그리고 안타까움과 애틋한 연민을 느낄 때도 많았습니다. 그러다 보면 이름도, 무덤도, 기억도 없이 떠난 무명 활동가들 앞에 상주가 된 심정으로 살게 됩니다.
이제 책을 세상에 내고 나니 그런 감정들을 여러 동지와 함께 나눌 수 있어 좋습니다. 이 책이 10월 항쟁의 역사적 진실을 알리고 이 문제를 대중적으로 공론화하는 데 도움이 되면 좋겠습니다. 해방 공간의 거리에서, 공장에서, 학교에서, 또는 산에서 활동했던 무명 활동가들, 형무소로, 골짜기로, 바다로 속절없이 끌려간 임들을 기억하고 해원의 기회를 마련하는 데도 작은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지금 투쟁 일선에 계신 분들께는 우리 내면에 흐르는 항쟁의 역사적 DNA를 확인하는 데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고, 연구자들께는 새로운 이야깃거리를 제공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대구에 계신 분들은 이 책을 통해 대구가 고담의 도시가 아니라 진보의 진원지였음을 기억하고 용기를 얻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활동가로서, 생활인으로서 살았던 기간이 길었고 연구자로서는 아직 신인에 불과합니다. 부족한 제게 이토록 큰 상을 주신 임종국선생기념사업회와 민족문제연구소에 감사드리고 심사위원과 관계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무엇보다도 한평생 끈질기게 친일문제를 파고들어 연구하셨던 역사 독립군 임종국 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선생님께서 제게 이 상을 주시면서 그 동안의 어려움을 잊고 다시 일어설 용기를 주시고 앞으로 나가도록 격려해주시니 한없이 영광스럽기만 합니다.
구술자·증언자 선생님, 유족회의 여러 어르신들을 포함하여 그 동안 도와주셨던 은인들께도 감사의 말을 전하고 싶습니다. 제가 10월 항쟁에 관한 연구를 계속하도록 권했던 동생 김정동에게도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습니다. 그 친구도 사회운동을 하느라 평생을 거리에서 보냈고, 몇 차례 옥살이를 하느라 적지 않은 시간을 감옥에서 보냈습니다. 그리고 수배생활의 피로와 고문의 트라우마와 생활고에 시달리다 작년 여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 자리를 빌려, 누나가 10월 항쟁에 관한 책을 썼으면 좋겠다고 했던 그 유언을 지켰노라고, 동생에게 말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평화롭게 편히 쉬기를 바라는 기도를 간절하게 올립니다.
마지막으로 작업을 도와주고 힘든 시간을 내내 함께 해준 딸 효은에게도 사랑하고 고맙다는 말을 전하며, 이 기쁨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 수상소감
“또다시 20년 후에 다시 만나자”
소록도, 천형의 땅
소록도를 다시 밟은 것은 2004년 7월경. 소록도병원 원생 자치회실에서 한센인들과 처음으로 악수를 하고, 마주앉아 대화를 나눴다. 전염되지 않는다는 ‘지식’은 가졌어도 부끄럽게도 공포는 여전하였다. 일본 변호사들이 기쁨에 겨워 한센인과 껴안고 볼에 뽀뽀하면서 기쁨의 재회를 만끽하는 동안 물끄러미 한쪽 구석에서 구경하여야만 하였다. 참으로 부끄러웠다.
일제강점기에서 비롯된 한센인에 대한 소록도 강제격리, 절멸정책은 오히려 가혹한 차별과 편견이 심화되는 계기가 되었다. 가족과 공동체로부터 버림받았고 이후 한 번도 고향을 방문할 수 없었고 호적은 ‘행방불명’으로 말소되었다. 2001년 5월 11일 일본 구마모토 첫 한센 판결 이래 대한민국 한센인의 대 일본 보상청구 및 소송을 처음 진행한 것은 우리 대한민국 변호사가 아닌 일본 변호사였고, 일본 변호사들의 헌신적인 노고와 양심적인 과거사 해결을 위한 의지로 인해 590명이 보상받기에 이르렀다. 사실 한국 한센인권변호단(단장 박영립 변호사)변호사들의 12년 동안의 노고도 있었지만, 당시 변호사들은 비로소 대한민국 한센인의 아픔을 처음으로 들었고, 처음으로 느꼈으며, 처음으로 함께 울었다. 그 만큼 우리는 부끄럽게도 너무 늦게 다가간 것이었다.
그렇다고 한센인의 삶이 나아졌을까. 대한민국과 일본을 상대로 소송하고 이긴다고 해서, 그들에게 보상금이 지급된다고 해서 과연, 과연 사회적 편견이 해소되고 인간으로서의 자존감을 조금이나마 회복하게 되었을까. 소록도에 다시 갈 때마다, 왠지 머리가 숙여지기만 한다.
한국전쟁, 좌도 우도 아닌 그저 양민 학살
어렸을 적 아버지는 셋째 작은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으셨다. 이후 어른들로부터, 그리고 진화위 조사과정에서 인민군이 아니라 국방군에 의해 희생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목포-무안-함평으로 이어지는 수복 토벌작전과정에서 11사단에 의해 동네사람들 6명과 함께 희생되었다고. 영광 불갑산으로 이어지는 수복 동선에서 수많은 그저 양민들이 희생되었다. 그냥 젊다는 이유로, 감물 들인 옷을 입었다고, 물론 이들은 공적사항에 공비로 기재되었다. 그때는 그랬다.
인민군이 오면 인공기를, 국군이 오면 태극기를 들고 나오기로 되어 있던 마을에서, 인민군복으로 위장해온 국군에게 집단 학살당한 이야기, 총알이 아깝다고 완도 푸른 바닷물에 2∼3인의 다리를 묶어 수장한 이야기, 마을이 좌우 치하가 바뀌면서 줄줄이 학살당한 이야기… 그저 양민이었던, 좌도 우도 아닌 사람들의 희생, 그러나 이보다 더하게 빨갱이 자식, 아내라는 낙인으로 인해 평생 고통스럽게 살아간 이야기는 이젠 세월의 무게에 묻혀 잊어지고 있다.
재일동포는 간첩이다
너의 이름은 조센진. 현해탄을 넘어온 자이니치에게 ‘조국’, 자유 대한민국이 붙여준 이름은 간첩이었다. 사상의 자유를 누리던 재일동포들이 한국에서 보고 들은 것은 획일화된 반공 이데올로기와 박정희, 전두환 군사독재정권의 학정이었다. 빅 브라더의 지침에 따라 움직이는 대한민국에는 자유도, 민주주의도, 그 어떤 꿈도 꾸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다. 그들은 희한한 세상의 이방인이었다.
불온한 꿈을 꾸는 자는 잡혀간다. 그로부터 30여년, 60을 넘긴 사람들이 재심 형사법정에서 눈물을 흘린다. 왜일까. 지나온 세월이 억울해서, 아니면 짓밟힌 청춘이 아까워서? 미움도 서러움도, 한 순간의 억울함도 30년 세월에 모두 그만 익어버렸다. 그들의 조국은 진정 어디일까. 아니면 그들에게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
형제복지원과 선감원
국가가 ‘위탁’이라는 형식으로 만든 강제수용소 ‘아우슈비츠’, 판결 없는 무기징역. 형제도, 복지도 없는 지옥. 같은 시대 사람들이 또 다른 울타리에서 시설지원금의 숫자로 살거나 강제노역의 노예로 살았다는 것은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정의사회, 복지사회를 구현하던 시대에, ‘정의’와 최소한의 ‘복지’조차 실종된 시대를 살았다는 것, 그리고 지금 그 이상의 삶을 살지 못하고 있다는 것. 그 모든 것이 과거나 지금이나 지옥과 다름없다는 것을 보는 것은 참으로 고통스러운 일이다.
법률도 아닌 ‘내무부 훈령 410호’에 근거하여 강제격리, 강제노동 시켰던, 도가니의 ‘원조’이자 염전 노예의 ‘과거’였다. 그러나 지금 이들이 어느 하늘 아래 어떠한 삶을 살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 그저 자신을 책망하며, 인생을 자책하며 스스로를 갉아먹고 있지 않을까. 그들에게 삶의 작은 온기라도 같이 나눌 수 있었으면 좋겠다.
70년 후에 다시 만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아직도 끝나지 않은 과거사, 친일파의 문제만이 아니다. 긴급조치는 고도의 정치행위라면서 국가배상 책임을 부인한 대법원 판결, 국정교과서와 일본군 위안부 문제, 비정규직과 삼성 백혈병 등 직업병 문제, 콜트 콜텍, 최근 조선업 정리해고 문제 등. 우리의 과거와 현재는 아직도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대화하고 있다. 우리에게 진정 정의로운 역사가 있었던가.
“20년 후에 다시 만나자”라는 일본군 병사의 잔인한 각오는 선생님이 ‘친일역사 연구’를 하게 된 깨우침이었다. 그런데 70년 후 오늘, 그 병사의 외침을 다시 만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우리는 그 병사에게 이제는 끝났다고, 돌아가라고 말할 수 있을까. 우리는 정녕 정의보다는 기회를, 항쟁보다는 굴종을, 토론보다는 정답을 배웠던 역사를 바꿀 수 있을까. 다시 20년 후에 오늘보다 더 나은 세상을 보여줄 수 있을까.
선생님은 시인으로, 재야 역사가로 살았다. 사람들에게 기억되지 않거나 잊혀져가도 꿋꿋하게‘홀로’ 역사의 무게를 지고 굴하지 않는 삶을 살았다. 결코 빛나지 않아도 제 갈 길을 갔다. 그 많은 사료를 스스로 복사하거나 필사하고 1만 3천장의 친일인명카드를 만들었다. 어떻게 그게 가능할까. 나는 그렇게 살 수 있을까. 나의 부끄러움이 아직도 치밀어 오르는 것은 꼭 임종국 선생 때문만은 아니다. 변호사로서, 한 사람의 시민으로서 아직도 부족하고 부끄럽고 안타까운 일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경의를 표하며
오늘 이 상은 저의 잘못과 부족한 것에 대한 질책으로, 그리고 더 많은 열정에 대한 기대로 이해하겠습니다. 임종국 선생의 거칠고 외로운 삶, 그리고 지금까지 열성으로 지켜온 ‘임종국선생기념사업회’와 장병화 회장님께 경의를 표합니다. 그리고 저와 변호사로서, 활동가로서, 시민으로서 묵묵히 늘 함께 해온 동지들께, 그리고 저희 가족과 법무법인 동화 식구들에게 그 ‘오랜 인연과 노고’에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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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향신문: 김상숙씨·조영선 변호사, 임종국상 수상자로 선정
☞ 한겨레: ‘임종국상’에 김상숙 조사관·조영선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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