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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정역사교과서, ‘친일·유신’ 사상 국민에 강제주입하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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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층인터뷰> 민족문제연구소 박한용 교육홍보실장

국정교과서는 1974년 박정희 유신독재 시절에 태동했다. 국민을 통제하고 장기집권을 획책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렇게 탄생한 국정교과서는 정권의 입맛에 맞는 역사를 알리는 첨병 역할을 했다. 이후 많은 논란 끝에 사라졌던 국정교과서가 박근혜 정부가 집권하면서 ‘역사교과서 국정화’라는 이름으로 다시 등장, ‘제2의 유신(維新)’ 논란을 일으키고 있다. 내년 3월부터 일선 학교에서 가르치게 될 국정역사교과서가 오는 28일 얼굴을 내민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수립’을 ‘대한민국 수립(건국)’으로 못 박은 국사편찬위는 자문위원의 이름조차 비공개로 일관했다.

이에 대해 역사학계와 시민단체들은 1919년 3·1운동 정신을 바탕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부정하는 반 헌법적 역사교과서라며 반발하고 있다. 대한민국은 현재 역사문제와 함께 민주주의와 경제·안보 상황도 매우 위중한 상황이다.

박한용 교육홍보실장
▲ 민족문제연구소 박한용 교육홍보실장

민족문제연구소 박한용 교육홍보실장은 “박근혜 정권이 역사교과서에 ‘1948년 건국절’을 반복해서 주장하는 것은 독립운동 역사를 지워버리고, 친일세력들을 근대화와 건국의 주역으로 세우려는 역사세탁이다. 봉건 왕조시대에도 없었던 괴이한 사건들이 눈앞에서 벌어지고, ‘뉴 라이트’ 등 보수 세력들에 의한 국정역사교과서가 대한민국 미래를 암울하게 하고 있다”고 꼬집는다. 그는 또 “21세기 미래를 위한 교육은 없고 역사교과서 국정화라는 망국적인 역사교과서가 국민을 세뇌하고 억압하고 있다”며 “국정화를 철회하지 않고 이대로 밀어 붙인다면 분노한 국민에 의해 철퇴를 맞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박한용 실장으로부터 왜곡된 근현대사 역사문제, 한·일 관계 등 최근의 정세에 대해 들어보는 자리를 마련했다. 다음은 심층인터뷰 전문이다.

– 정부가 국정교과서를 밀어붙이는 의도가 드러나고 있다.

▲ 지난번 광화문에서 민족문제연구소와 역사문제연구소, 한국사학회 등 47개 학회와 단체들이 최순실 국정농단과 역사교과서 국정화 중단을 촉구했다. 국민들이 국정교과서를 극렬히 반대함에도 그동안 정부가 밀어붙인 이유가 ‘종교적 이유’로 밝혀져 경악을 금할 수 없다. 자라나는 미래세대에게 고대 봉건사상 교육도 아닌, 그보다 훨씬 후퇴한 교육 때문에 ‘백년지계’가 망가져 왔다. 그럼에도 국정화를 계속 고집한다면 이제 국민의 힘으로 중단시킬 수밖에 없다. 정부가 지금까지 강행했던 외교·안보·국방 등 일련의 정책들이 모두 비정상적 ‘비선실세’에 의한 무능국정으로 드러났다. 잘못 기술한 역사내용만 수백 가지가 넘는 오류투성이 역사교과서도 마찬가지다. 봉건 왕조시대에나 있을법한 사건들이 터지고, 수구 기득권 세력들에 의한 국정역사교과서는 21세기 나라에서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망국적인 행태다. 정부는 하루속히 국정화를 폐기해야 한다.

– 정부가 1948년 8월 15일이 ‘건국절(建國節)’이라며 ‘대한민국 정부 수립’에서 ‘대한민국 수립’으로 바꾸기로 했다.

▲ 현 정권이 1948년 8월 15일을 ‘대한민국 정부수립’이 아닌 ‘대한민국 수립’으로 단독적으로 기술했다. 현 정권이 지속적으로 ‘건국절’을 주장하는 것은 선열들의 비장했던 독립 운동사를 역사에서 아예 빼버리고, 일제식민지 당시 일본에 친일행위를 했던 자들을 근대화된 나라의 건국 주역으로 탈바꿈하려는 것이다. 역사교과서에 기술한 ‘1948년 8·15 건국절’은 곧 ‘1948년=대한민국 수립(건국)’을 말한다. 이것이 수구세력들이 말하는 ‘건국절’이다. 그렇게 되면, 이들은 1945년 8월15일 이후로부터 대한민국 건국에 참여했던 ‘건국공로자’로 탈바꿈되는 일이 벌어지는 것이다. 하지만 일본제국 시대에 독립운동을 하고도 해방된 1948년 이후, 단독정부 정부수립에 참여하지 못한 모든 독립 운동가들은 오히려 ‘반국가사범’이 되는 꼴이다. 이는 명백히 제헌헌법에 명시된 상해임시정부의 법통성과 독립운동을 부정하고 민족반역자 세력 친일파를 건국주역으로 세우려는 엄연한 역사세탁이다. 이렇듯 선열들의 독립운동과 제헌헌법 정신을 모독한 역사교과서는 오직 정권의 입맛에 맞는 하나의 관점만 강요하는 잘못된 교과서다. 이는 사상과 역사교육을 통해 국민을 통제하기 위한 도구다. 친일과 독재를 미화한 교과서일 뿐이다. 일본제국주의 입장에서 교과서를 쓰고 과거 박정희 독재정권에 대한 내용을 축소하거나 왜곡한 것으로 후세대에게 뒤틀린 역사를 물려줄 수는 없다.

–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1948년 대한민국 정부’ 무엇이 다른가.

▲ 광복절인 1948년 8월 15일을 건국절로 하자는 거다. 그러나 진정한 정부수립일은 1919년 4월 11일로 봐야 한다. 수구세력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설립을 진정한 건국절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은 헌법상 국가는 영토와 국민이 있어야 하는데, 당시의 임시정부는 제헌헌법은 있었어도 국민과 국토가 없어 국가로 인정할 수 없다는 억지 논리를 펴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거시적으로 역사적 측면에서 바라볼 때, 향후 통일을 향한 민족주의적 역사를 정면으로 거부하고, 분단을 고착화시키려는 국가주의적 역사인식이다. 70년이 넘도록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로 아직도 후손들은 이념차이로 단합하지 못하고 있다. 일본 식민국으로 온갖 고통을 당해 왔으면서도 과거 역사에 머문 채, 영구히 분단국가로 남는다면 장차 남북한 통일은 요원해진다.

한국사교과서반대

– 박정희 판 ‘친일’과 최순실 표 ‘역사농단’ 교과서가 될 것이라는 우려도 나오고 있다.

▲ 진정한 역사라면 왜 떳떳하게 집필을 못하는가. 뭔가 두렵기 때문에 복면집필을 한 것이다. 얼굴을 가린다고 역사가 바로 세워지는가. 국정역사교과서는 한마디로 친일 박정희와 유신을 미화한 역사를 다음 세대에게 물려주겠다는 것이다. 또 국민들은 국정교과서에 ‘최순실 표’ 역사개입이 있지 않았는가 하는 의구심을 갖고 있다. 지금 시국은 엄밀히 말하면, ‘박근혜 및 집권여당 게이트’다. 새누리당 내에 비박계가 있지만 이들에게도 역사면죄부를 줘선 안 된다. 국민들이 이들에게 수많은 문제점들을 제기했지만, 이번 최순실 사태를 겪으면서 단번에 입장이 바뀌지 않았는가. 집권여당과 친박도 그렇다. 자신들도 함께 공조해 놓고 이제 와서 오리발 내미는 극 파렴치를 보이고 있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지금 도마뱀처럼 꼬리자르기를 하고 있지만, 산위의 집이 숨겨지지 못하듯이 양파껍질처럼 수면아래에 잠겨있던 문제들이 벗겨지고 있다. 여기에 과거 방산비리 무기로비스트 린다 김까지 흘러나온다. 문제의 근본은 현 정권에만 따로 연결된 것이 아니다. 캐고 캐면 정치권 모두가 연결되는 중대한 사안이다. 그래서 최순실 사건을 빨리 종결시키고 싶은 거다. 식물이 된 박근혜 대통령이 국민의 동정심을 얻어내고, 이번 사태를 어물쩍 넘어가려는 얄팍한 꼼수를 부릴 것이다. 국민 저항이 더 거세지기 전에 몇 가지 큰 사건만 빨리 덮고 가겠다는 계산이다. 그러나 이미 미르재단 등에서 불거진 문제들은 이미 개인차원을 넘어 정치권의 구조적인 문제와 서로 뒤엉켜져 있다. 어디로 불똥이 튈지는 어느 누구도 모른다. 또 보수언론들이 정권의 지지를 끌어내려고 일종의 ‘시국 컨트롤’ 작업을 하지 않겠는 가다. 그렇게 해서 또 친일기득권 세력이 또 다시 고개를 쳐들고 나오려 할 것이다. 한마디로 다음번 뱃사공만 바꾸면 된다는 식이다. 하지만 국민여론은 이것을 먼저 감지하고 있다. <1회>

<2016-11-15> 위클리서울: “국정역사교과서, ‘친일·유신’ 사상 국민에 강제주입하려는 것”


– 학부모들이 국정교과서 불매운동에 나섰다.

▲ 검인정 교과서는 담당교사가 3순위까지 추천해 학교운영위원회 심의를 거쳐 선정하지만, 중·고교 국정역사교과서는 심의절차 없이 학생 수만큼 교사가 무조건 신청하도록 되어 있다. 전혀 본적도 없고 알지도 못하는 복면집필 교과서 주문을 강요하고 있어 교사들과 학부모들의 불만이 매우 높다. 2017년 3월부터 시작되는 역사교과서에 무엇이 실려 있는지도 모르는데, 책값을 부담해야 하는 고1 자녀를 둔 학부모들이 불매운동을 벌이고 나선 것이다. 중학교는 의무교육이기 때문에 역사1, 역사2 교과서를 무상으로 지급받지만 전국의 역사교사들도 역사교과서에 대한 내용구성을 전혀 모른다. 교육부가 일방적으로 하라는 대로 하라는 식이다. 교육부가 나서서 유신독재를 미화하는 현 정부의 교과서국정화를 어떻게 하든 임기 안에 마무리하겠다는 역사쿠데타를 지금 목도하고 있다. 교과서에는 진정한 우리의 한국사와 근현대사는 빠져 버렸다. 오로지 친일과 유신독재만 가르치겠다는 비상식적인 일이 벌어지고 있다.

– 민족문제연구소에서 발간한 친일인명사전 얘기를 좀 해보자. 방대한 친일인명사전, 편찬배경이 무엇인가.

▲ 지난 2009년 11월 8일 수많은 우여곡절 끝에 친일인명사전이 세상에 나왔다. 4389명이 등재됐다. 이승만 정권 당시 발족했던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이하 반민특위)가 친일경찰의 습격으로 와해된 지 60년 만에 친일인물들에 대한 숨겨진 행적과 친일경력을 보다 체계적으로 집대성한 첫 성과다. 해방 70년 만에 역사적 청산과 학문적 정리절차를 거쳐 일단락 지었다. 만시지탄이지만 다행이다. 무엇보다 국민적 지지와 동참이 컸다. 또한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가 구성된 후 8년 동안 연구소 6000여 회원들과 시민들의 성원이 결실을 거두게 한 원동력이었다. 불가능처럼 보이던 친일인명사전 발간배경에는 많은 시대적인 요인들이 있었다. 먼저 1960년대 미국과 소련의 냉전구조 해체와 국내의 민주화라는 시대적인 상황이 있었다. 또 50여 년간 군사독재 정권하에서 금기영역이었던 친일문제를 객관화하고 공론화할 수 있게 되었다. 그 후로 사상과 학문·언론 자유가 신장되면서, 친일문제에 대한 연구영역도 사회적 합일점을 획득하게 됐다. 사전편찬을 위해 8년여를 고생한 연구원들은 친일역사 사료의 방대함과 이에 대한 정보접근이 어려워 이중고를 겪었다. 그럼에도 외적으로는 국사편찬위원회 등 여러 정부기관이 보유한 사료공개시스템에서 큰 도움을 받았다. 1990년대 말부터 시작한 사전편찬 예산에는 약 30억 원 정도가 소요됐다.

– 사전편찬 작업에 얼마나 많은 인원이 참여했나.

▲ 친일인명사전 편찬을 위한 자료수집과 데이터 구축 등에 막대한 예산과 인력이 필요했다. 민간연구소로서 단독추진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재정 확보와 학계의 지지를 이끌어내는 것도 과제였다. 그렇게 해서 1999년 8월 11일, 대학교수 1만여 명이 친일인명사전 편찬을 결의하고, ‘제2의 반민특위’를 만들자는 ‘친일인명사전 편찬지지 전국 교수 일만인 선언’을 했다. 법적심판과 단죄는 이미 불가능하지만, 20세기가 가기 전에 역사청산만은 반드시 이루어내야 한다는 의지였다. 대학교수 1만여 명이 서명한 것은 유례가 없는 일이다. 멀리서는 연변 조선족 대학교수 700여 명이 참여하고, 미국에서 인터넷을 통해 의사를 밝힌 하버드대 교수, 옥스퍼드대 교수, 소장학자, 원로교수,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출신 체육학과 교수, 역사학자 등 실로 다양한 분야의 교수들이 동참했다. 2개월 만에 전임교수들만 1만 명 이상이 서명을 했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서 역사적 사건이자 ‘새로운 문화운동’을 알린 신호였다.

박한용 교육홍보실장
     ▲ 전시유물

– 특히 친일 지식인·문화예술인·언론인에 대한 책임을 엄중히 물었다.

▲ 그렇다. 무엇보다 지식인과 문화예술인들의 직역봉공(職役奉公)에 대해 강도 높은 책임을 물었다. 일본제국이 한민족을 지배하는데 공을 들인 요소가 이데올로기 통제다. 이에 따라 지식인들을 동원해 내선일체(內鮮一體) 운동과 황민화정책(皇民化政策), 전쟁동원 군국주의 이념선전에 핵심적 역할을 맡도록 했다. 이들은 식민 지배국 일본의 침략전쟁에 힘없는 동포들을 전쟁소모품으로 밀어 넣었다. 이것은 단순히 개인적 출세나 치부를 위해 친일행위를 한 자보다 사회적·도덕적 책임이 한층 더 크다. 차라리 일반 하부 순사나 밀정 등은 출세를 위해서 국가와 민족을 배신한 자들로서 죄질은 극악하지만 지식인들에 비하면 정도는 덜하다. 당시의 최고 식민통치기구의 상부 조직에 적극 참여했던 고위간부나 사회지도층의 친일행각은 해방이후에도 우리 사회 곳곳에 악영향을 끼쳤다. 파급력도 매우 치명적이고 구조적인 악폐와 악습을 낳았다. 그런데도 이들 지식층의 정치적·도덕적 책무는 거의 없고, 국가가 위중해질 때에도 항상 반대로 행동했다. 이런 자들에게 또 다시 면죄부를 준다면, 항일투쟁에서 목숨을 바친 선열들과 전 재산을 팔아 가족을 데리고 해외 망명을 하며 풍찬노숙을 자처한 수많은 독립운동가의 희생은 무의미한 개인사에 그치고 말 것이다. 따라서 부일협력자 상층부, 특히 사회지도층의 친일행적에 더 엄중한 잣대를 적용하게 된 것이다.

– 친일사전 인물선정 기준은 무엇인가.

▲ 친일인물 선정에는 몇 가지 원칙이 있다. 먼저 친일협력행위의 자발성과 적극성이다. 주체적으로 출세를 위해 친일을 택한 것과 강박에 의한 동원, 생계형 친일은 전혀 다르다. 따라서 생계(생존)형 부일협력자는 뚜렷한 친일행적이 없으면 제외하고, 권력과 부 명예를 추구한 기회주의자는 엄중히 취급했다. 예컨대 일부 지원병이나 소년특공대 등은 일제의 선전도구로 악용돼 부정적 영향을 미쳤고, 태평양 전쟁 막바지에서 총알받이로 동원된 역사적 상황을 고려해 선정대상에서 제외했다. 또 학병출신 장교나 B·C급 전범도 행위의 비자발성을 감안해 유보했지만, 개별적 사례 분석만은 남겨 놓았다. 반복적인 친일과 중복·지속성도 고려했다. 일회성 친일단체 참여 등은 배제하고, 많은 단체에서 활동했거나 단일 단체라도 직책을 맡고 반복적이고 장기간의 참여는 당사자 의지가 있었던 것으로 판단했다. 앞서 지적했듯이 지식인과 문화예술인은 잔혹한 식민통치시대에 일본의 광기어린 침략전쟁에 대한 비판과 분별력이 있었음에도 일제의 선전선동에 앞장섰다는 점에서 사회적·도덕적 책무와 영향력을 감안, 맹목적 협력자보다 더 엄중히 책임을 물었다. 또, 군·경찰·헌병·밀정 등 폭압기구 복무자들은 물리적인 식민 지배를 도왔고, 항일세력을 직접 탄압함으로써 독립을 지연시켰다는 점에서 더 가혹한 기준을 적용했다.

– ‘친일파’에 대한 명확한 기준을 말해 달라.

▲ ‘친일파’라는 말은 일제침략이 노골화한 시기부터 광범위하게 회자된 단어다. 해방을 거치면서 역사적 용어로 정착했다. 이 시기 사람들이 인식하던 친일파의 범주는 매국행위 대가로 귀족이나 중추원 참의원 지위를 받았거나 공출과 징용·징병 등을 담당한 말단 행정집행자들이다. 이들은 직접 일반 민중들을 적대시하면서 일제의 수탈과 전쟁동원에 앞장섰던 면서기나 순사 등으로 그 폭이 매우 넓다. 당시 친일파는 상하 신분을 막론하고 모든 일제부역자를 말했다. 엄밀하게 역사적 해석으로 볼 때 친일파는 반민족행위자와 부일협력자로 구분할 수 없다. 다만 학술적 개념으로서 친일파를 반민족행위자와 부일협력자로 대별할 수 있지만 이 또한 경계가 분명하지 않다. 어떤 자는 반민족행위자와 부일협력자 범주에 모두 포함되는가 하면 경계선상에 드는 인물도 있다. 중요한 사실은 반민족행위자와 부일협력자 구분이 반드시 죄상의 경중에 따른 것은 아니다. 행위의 성격상 분간을 하기 위한 유형별 분류일 뿐이다. 민족문제연구소 편찬위원회가 말하는 친일파란 1905년 ‘을사조약’ 전후부터 1945년 8월15일 해방까지 일본제국주의가 자행한 국권침탈·식민통치·침략전쟁에 적극협력하고, 우리 민족과 타민족에게 신체적·물리적·정신적으로 피해를 준 자다. 또한 일제가 우리 국권을 심대하게 또는 완전히 침탈한 기간으로 한정했다. 국권침탈은 일본군이 한반도에 대규모로 진주하면서 한국정부에 노골적으로 간섭하기 시작한 러·일 전쟁 개전 때를 의미한다. <3회로 이어집니다.>

<2016-11-16> 위클리서울: “‘건국절’ 주장, 선열들 독립운동사 지우고 친일파 건국 주역 탈바꿈 위한 것”


– 나라가 극도로 혼란스럽다. 100여 년 전과 유사한 위기국면이라는 지적도 제기되는데.

▲ 대한민국이 전방위적으로 위기다. 19세기 구한말 서구열강들의 약육강식 패권경쟁이 한창이던 시기에 대한제국은 급변하는 국제정세를 읽지 못해 군국주의 일본에게 빼앗겼다. 그럼에도 지금 정부는 이런 위기를 방관한 채 역방향으로 왔다. 국정역사교과서 강행과 한⋅일 위안부 졸속합의, 사드(THAAD) 배치 등 예민한 문제로 국론분열만 조장했다. 국민들은 저항했지만 난국 속에도 교과서국정화를 통해 친일사관을 유일한 역사라며 국민에게 강요하고 있다. 또한 국민합의 없이 단돈 10억 엔에 일본군 위안부 합의를 추진해 피해자와 국민 모두에게 정신적 고통을 가했다. 일본정부의 공식적인 사죄와 보상⋅명예회복⋅재발방지 요구를 아예 빼놓은 채 역사를 팔아먹었다. 현 정권의 결정적인 실책은 사드다. 사드배치로 그나마 평화로웠던 동북아시아에 중국과 미국 간의 군사적 긴장조성과 한⋅중, 중⋅일 외교 갈등만 고조시켰다. 더구나 군사강국으로 떠오른 중국이 동북아에서 주인을 자처하며 미국에 도전하고 있는 급박한 상황에서 사드로 국가적 환란을 초래했다. 그럼에도 현 정부는 국내외 정세를 제대로 파악조차 못하고 최근의 ‘최순실 게이트’라는 전대미문의 국정농단으로 국민의 강력한 저항에 봉착한 상황이다. 국정을 이끌 능력이 없음이 여지없이 드러났지만 여전히 무책임으로 일관하고 있다.

– 국방부의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 체결이 막바지에 왔다.

▲ 위안부 문제와 군사보호협정 모두가 미국의 강력한 요구 때문이다. 박근혜 정부는 초기에는 오히려 미국보다 중국과 가까운 친중 정책을 폈다. 미국은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한국과 일본을 하나의 동맹으로 묶어 한․미․일 군사동맹 ‘트리오 체제’를 구축하려 했지만 한⋅일간 과거사가 걸림돌임을 알고 있었다. 동북아에서 한국과 일본 사이에 군사동맹협약이 없는데다 이걸 가로 막는 것이 한⋅일 ‘과거사’다. 전 세계가 알고 있는 위안부 문제만은 합의가 거의 어려운 상태였다. 과거 MB정권 말기에 이 문제를 풀려는 시도가 있었지만 불발됐다. 박근혜 정권도 같은 궤도를 가고 있었다. 다급한 미국이 한국과 일본에 압력을 넣어 졸속처리된 것이 위안부 합의다. 또 일본은 한국이 위안부 문제를 다시 거론하지 않겠다는 것과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을 같이 끼워 넣어 협정을 밀어붙이고 있다. 그런데 최순실 사태로 일본이 조급해졌다. 한국인에게 정신적 충격을 준 위안부 졸속 합의는 미국의 작품이면서 일본에게 커다란 이익을 주었다. 아베 정권은 과거사 털기와 과거사 재론을 하지 않겠다는 사인까지 받아내 도랑치고 가재를 잡은 것이다. 일본은 레임덕이 오기 전에 내친김에 군사정보보호협정까지 맺자는 것이다. 한국은 거부할 명분이 없어진 거다. 일본에 끌려 다니는 꼴이다. 사드와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은 정부가 그 요구를 한꺼번에 들어주려는 의도가 짙다. 외교와 국방부문은 국가의 명운을 좌우하는 매우 중대한 문제다. 그런데도 아무런 대안도 없이 외교적 실수만 되풀이 하고, 엄청난 문제를 야기 할 안보문제를 일사천리로 몰고 가고 있다.

– 협정은 어떻게 되리라고 보는가.

▲ 개인적으로 11월중에 될 것으로 본다. 일본은 오랜 숙원이던 위안부 문제의 단초를 풀었지만, 그럼에도 가해국과 피해국이 뒤바뀌어버린 분위기다. 가해국인 일본이 오히려 한국에게 10억엔 출연했으니 이제 책임은 없다고 큰소리 치고 있지 않은가. 한국 정부가 지금 쩔쩔매고 있다. 게다가 지난 7월에는 일본의 주력군인 자위대 기념행사를 서울 남산의 한복판인 힐튼호텔에서 가졌다. 일반 군대기념식인 자위대 행사는 통상적으로 대사관 안에서 해야 한다. 이건 영토주권 문제와도 관련이 크다. 무엇보다 힐튼호텔 앞은 일제 당시에 신궁(神宮)이 있던 자리다. 가까이에는 통감부와 조선총독부가 있었다. 그런데도 일본이 서울 한 복판에서 강행한 것은 한국의 여론을 떠보기 위해 ‘간’을 본 것이다. 일본은 별다른 반대도 저항도 없어 보이자 ‘이 정도면 됐다!’는 판단을 했을 것이다. 장차 한국에 자위대 진입을 해도 어렵지 않겠다고 결론을 내린 거다. 거기다 이 행사에 군 정보관계자와 국회의원 등이 참석해 물의를 일으키기도 했다. 시민단체가 극렬 반대를 했지만, 박근혜 정부가 요지부동이었다. 일본은 이때다 싶어 ‘군사정보보호협정’을 강행중이다. 앞뒤 생각이 전혀 없는 현 정권이 추진하는 외교와 안보현안이 심각한 상황이다. 그런데도 대통령은 중차대한 문제를 국무위원이나 국방부 장관과 상의도 없이 무대포로 밀고 가고 있다. 정상적인 정부라면 도저히 있을 수 없는 문제다. 그것도 누구의 손에 의해서 결정되는지 조차 모른다. 국민들은 이런 사태에 공분하고 있는데도, 대통령과 집권당⋅야당은 정국수습을 못하고 사분오열 된 상황이다.

– 광화문 광장에 박정희 동상 건립을 강행하려 하고 있다.

▲ 2017년은 박정희 탄생 100주년이 된다. 박정희 대통령을 말하면 두 개의 단어가 떠오른다. ‘친일’과 ‘유신독재’다. 보수 수구단체들은 과거에 못 먹고 굶주리던 시절에 박정희 대통령이 보릿고개를 해결한 인물로 추앙하고 있다. 근대화와 경제개발에 성공했고 배고픔을 해결한 대통령이라는 단순한 물질적 논리를 펴며 동상을 건립하려한다. 그러면서 광화문의 이순신 장군과 세종대왕은 고대 왕조시대 인물이고, 현대사 영웅은 없지 않느냐고 호도하면서 정당성을 따지고 있다. 과거 박정희 대통령의 독재 문제 자체를 바꾸는 건 안 된다. 게다가 친일행위를 했던 그의 정치경력은 한국사에서 대단히 수치스러운 이야기다. 그런 사람이 대통령이 될 수 있었고, 또 군부 쿠데타를 통해서 대통령이 될 수 있었다는 역사 사실 자체가 우리한테는 대단히 중대한 화두다. 그런데, 이러한 부분을 왜곡했을 뿐만 아니라, 아예 미화하려하는 것이 아닌가.

– 마지막으로 득세하는 친일수구세력으로 인해 남북관계가 단절되면서 통일은 더 요원해지고 있다는 지적이다.

▲ 지금 대표적 친일의 상징적 관계가 박근혜 대통령과 최순실이다. 두 사람의 윗대 아버지까지 올라가게 되면 박정희와 최태민으로 연결된다. 이들은 친일군인이던 박정희와 친일경찰 출신인 최태민과 직결된다. 최태민은 박정희 대통령보다 5살 연상이다. 그 연장선상에서50여 년이 흐른 지금까지 친일청산에 대한 사회적 명분을 찾지 못했고 역사가치관 확립도 못했다. 친일청산이란 어떤 측면에서 보면 사람 자체가 본질은 아니다. 평가가 중요한 것이다. 그런 원칙이라도 있었다면 국가가 이렇게까지 위태로워지지 않았을 것이다. 친일청산을 하지도 않은 국가가 기득권 세력에 의해 뒤틀려지고 변형되면서 다양한 형태로 세력을 유지해왔다. 결과적으로 역사정체성과 사회의 도덕성원칙 시스템마저 무너져 버렸다. ‘저스티스(Justice, 정의)’라는 개념조차 파괴된 국가로 전락했다. 해방 70년이란 긴 시간 속에 박정희로부터 시작된 55년 독재와 국민의 숨통을 조였던 유신역사가 지난 1987년 전 국민의 강렬한 민주화운동으로 완전히 종식됐던 것이었는데, 지금 그 후손인 박근혜 정권은 오히려 한술 더 떠서 아버지 시대 ‘유신(維新)’으로 회귀하려 하고 있다. 이제 다시 과거의 ‘박정희 독재종식’으로 가야한다. 1987년 민주화 역사를 다시 만들지 않으면 또 다른 복사판⋅해적판 독재가 튀어 나온다. 수천 억 원을 들여 곳곳에 박정희 동상을 세우려는 수구세력들의 목표는 영구집권이다. 이들에게 국가 번영이나 국민의 안위는 물 건너 이야기다. 뿐만 아니라 단절된 남북관계 개선과 미래 한반도 통일을 위한 어떠한 통일정책 제시나 정치적인 행보를 적극적으로 하지 않는 세력들이다. 지금은 국민이 나설 때이다.

<3화>

☞기사원문: “수천억 들여 박정희 동상 추진, 국가번영이나 국민안위는 물 건너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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