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리보는 시민역사관

식민지배의 서막이 열리다 – 통감부개청 기념 엽서

3103
한국통감부 개청 기념 엽서
▲ 「한국통감부 개청 기념」 엽서. 원안은 초대 통감으로 부임한 이토 히로부미

‘을사늑약’으로 조선을 보호국화한 일제는 침략정책의 지휘부인 통감부 개청을 서둘렀다. 「한국통감부개청기념」 엽서는 1906년 일제가 통감부를 새로 설치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제작했다. 엽서는 근대 통신 수단의 하나이지만 일제가 발행한 관제엽서는 식민지 지배정책을 미화하고 근대화 업적을 선전하는 수단으로 악용됐다.

도쿄의 미쓰코시 백화점에서 제작한 「한국통감부 개청 기념엽서」의 기본모양은 일본을 상징하는 벚꽃의 물결 속에 태극기의 4괘(건곤감리)가 초대 통감인 이토 히로부미를 휘감고 돌아 태극문양을 감싸고 있는 듯한 모습으로 만들어졌다. 특이한 점은 이 엽서가 정부기관에서 제작된 것이 아니라 민간 백화점에서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통감부 개청 시기에 공식적으로 제작된 관제엽서는 그 종류가 몇 점 되지 않고 통감의 초상이 삽입되어 있지 않다.

화보근대백년사
▲ 1906년 3월 28일 오후 1시 30분 남산에서 통감부 개청식을 한 후, 초대 통감 이토 히로부미가 일본 기생들과 함께 원유회園遊會를 즐기고 있다.(<화보근대백년사> 제8집1904~1910)

1905년 11월 17일, ‘일본국 정부가 대한제국 황실의 안녕과 존엄의 유지를 보증’하는 대신, 외교권을 박탈하고 통감부를 설치하는 이른바 ‘을사보호조약(제2차 한일협약)’이 조인되었다.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대한제국을 ‘보호국화’하는데 박차를 가했다. 1905년 11월 9일 이토 히로부미가 특파대사로 서울에 도착하였으며 다음 날 수옥헌(현 중명전)에서 고종 황제를 알현하고 일본 ‘천황’의 국서를 전달했다. 15일에 다시 하야시 공사와 함께 조약 초안을 제시하며 체결을 강요하고 각료들을 개별적으로 불러 이를 종용했다. 17일 어전회의가 열리자 하세가와 한국주차군 사령관이 완전무장한 일본군을 앞세워 경운궁을 포위했고, 서울 일대에도 무장한 군대가 배치되었다. 수옥헌 내 회담장에도 착검한 헌병경찰들이 들어가 황제와 대신들을 위협했다.

이토는 대한제국의 학부대신 이완용, 내부대신 이지용, 외부대신 박제순, 군부대신 이근택, 농상공부대신 권중현 등을 매수하여 조약 조인에 찬성하게 하고, 반대하는 국민들을 총칼로 제압하면서 황제에게 ‘보호조약안’을 승인하도록 강요했다.

이렇게 ‘을사늑약’이 체결됨으로써 대한제국은 명목상 보호국이나 사실상 식민지가 되고 말았다. 침략의 원흉인 이토가 초대 통감으로 부임하였으며, 개항장과 주요도시에 이사청이 설치되어 식민지배의 기초가 마련된 것이다.

역대통감
▲ 역대 통감(왼쪽부터 2대 소네 아라스케, 3대 데라우치 마사다케, 초대 이토 히로부미)과 통감부 청사. 통감부는 1906년 2월 1일 대한제국 외부(外部)의 건물에서 개청했으나 곧 남산 왜성대로 옮겼다.

‘을사늑약’에서는 대한제국 황제 밑에 일본정부의 대표자로 1명의 통감을 두어, 한일의정서 이후 제한되던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통감이 지휘·감리하게 하였다. 통감은 “오로지 외교에 관한 사항”만을 관리한다는 명분으로 서울에 주재하도록 하였으며, 개항장 및 기타 지역에 이사관을 두어 통감 지휘 하에 일본 영사가 관장하던 일체의 직권 및 협약을 실행하는 데 필요한 모든 사무를 관리하게 하였다.

통감부는 일본 외무성에서 독립된 일본 천황 직속의 기관으로, 통감 유고시에는 일본제국 육군의 한국주차군 사령관이 그 직무를 대행하도록 하였다. 또한 한국주차군 사령관은 통감의 명령으로 병력을 사용할 수 있고, 긴급한 경우에는 재량으로 병력을 동원하고, 사후에 통감에게 보고하도록 규정되었다. 이처럼 통감부는 일본육군과도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1910년 5월 30일 일제는 육군대신 데라우치 마사타케를 3대 한국통감으로 겸임시키고 6월 30일에는 유명무실하던 한국 경찰을 일본 한국주차군 헌병대에 통합시켜 폐지하였다. 7월 23일 한국에 도착한 데라우치는 이완용과 함께 ‘병합조약’을 진행시켰다. 8월 22일 형식적인 어전회의에서 이완용이 전권위원으로 임명되어 같은 날 ‘한일병합조약’이 강제로 조인되었다. 그리고 8월 29일에 병합 조약이 공포된 것이다.

∷ 강동민 자료팀장


NO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