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사랑

[ 시론 ] 역사의 심판을 받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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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이화 역사학자 / 시민역사관건립위원회 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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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한국은 온 세계의 모순을 걸머진 화약고가 되어 있다. 우리는 식민지 경험에 이어 분단구조 아래에서 독재정권을 겪으면서 빛나는 민주화와 눈부신 경제성장을 이룩하였다. 그런데 보수반동 정권이 연달아 들어서서 모든 걸 뒤엎어 놓았다.
박근혜 정권이 들어선 뒤 갈등과 분열의 양상이 온 사회에 걸쳐 짙게 깔렸다. 무엇보다 인사정책을 보면, 고위 공직자를 불법으로 부동산 투기를 일삼고 요리조리 병역을 기피하고 출세를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인물로 채웠다. 게다가 무슨 은혜를 갚는다고 해 자신의 선거캠프에 있던 사람이나 곁에서 아첨하는 인사를 골라 요직에 앉혔다. 이는 바로 족벌주의나 환관정치로 추악한 권력의 남용이었다.
다음. 재벌에게 법인세 인하 등 온갖 특혜를 주고 노동자의 권익을 짓밟았으며 민주인사를 종북좌파로 몰아붙여 숨을 죽이게 만들었다. 남북대화는 파탄을 가져왔으며 사드 배치 문제로 인접국과 마찰을 빚고 있다. 일본과는 위안부 문제를 두고 단돈 10억엔을 받고 마무리 짓는 해괴한 일도 벌였다. 세월호 사건의 진상규명을 막고 고사하게 만들었고 시민단체의 활동을 무력화시키고 있다.

게다가 마침내 ‘박근혜 게이트’(최순실 게이트는 틀린 말)가 곪아서 터졌다. 양식이라고는 한 푼 없는 무식하고 사이비종교를 받드는 최순실이라는 간악한 여인이 대통령을 등에 업고 막후에서 국정을 농단하다 못해 기업인에게 강요해 비리재단을 만들고는 사유화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19세기 끝 무렵, 고종과 민비는 진령군이라는 무당에게 빠져 국고를 탕진하였고 진령군은 그 위세를 업고 온갖 이권을 차지하고 재물을 갈취한 게 100여년 전에 일이다. 추악한 권력이 현대 민주정치 제도 아래에서 재현되었다.
하나 더 있다. 역사 교과서를 국정으로 지정하고 건국절을 새로 지정하려 하고 있다. 세계 민주국가에서는 교과서를 검인정이나 자유 채택제로 선택해 역사의 다양성과 창의성을 가르치고 있다. 국정교과서를 채택하는 국가는 현재 김일성 교조를 강요하는 북한과 종교교육에 충실한 이슬람권 국가뿐이다. 또 정부수립일을 건국절로 지정하는 건 한국 근현대사를 왜곡하고 헌법정신을 유린하는 작업이다. 왜 이러는가? 이승만 때문인가, 박정희 때문인가?
지난 29일 서울 광화문 일대와 전국 여러 곳에서 수많은 시민들이 일어나 박근혜와 최순실을 규탄하고 ‘박근혜 하야와 탄핵’을 외쳤다. 이 기세대로라면 동학농민혁명과 3·1운동, 4·19혁명, 6월항쟁이 다시 일어날 분위기이다. 오늘날 그런 사태가 일어나야 모순의 사회를 바로잡고 국가 기강을 세우며 역사의 정의를 실현하는 길이 될 것이다. 이승만은 하야하고 박정희는 살해당하고 전두환은 감옥에 가지 않았는가?
지금 여당에서는 비리에 연루된 청와대 비서진을 개편하고 대통령의 중립을 보장한 거국내각을 구성하는 게 그 해결 방법이라고 여기는 모양이다. 어림없는 해결책이다. 현행 헌법은 대통령중심제이므로 그 권한을 어떤 편법으로 어떻게 분산하든 박근혜 주도로 이루어질 것이다. 이런 미봉책을 국민 정서는 용납하지 않을 것이며, 양식 있는 인사는 그런 자리에 들어가려고 하지 않는다. 그래 봐야 그 나물에 그 밥이 되고 말 것이다. 너무나 썩어 문드러져서 어지간한 집도로는 치유가 불가능하다. 이를 푸는 방법은 두 가지밖에 없다고 판단한다.
첫째, 박근혜 대통령은 유신독재의 향수를 잊고 일대 결심을 굳혀 이 사회의 비리와 갈등을 풀어가는 것이다. 편중 인사를 전면 철폐하고 양식과 청렴, 전문성과 능력을 헤아려 공직자를 임명하고 환관과 같은 간상모리배를 제거하는 기풍을 만든다. 재벌의 특혜를 막고 비정규직 노동자와 저소득자의 권익을 보장하며 남북의 대화 물꼬를 트고 반민주적 국정 교과서를 철폐한다. 그러고 나서 참된 민주가치가 무엇인지, 소득 불균형을 어떻게 바로잡을지 처절한 성찰을 해야 한다. 이를 해내지 못한다면 마지막으로 사퇴하는 방법밖에 없다.
대통령은 우리 헌법이 명시한 최고 통치자다. 통치자는 용기와 결단력과 판단력이 있어야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다. 자질이 모자라면 물러나는 것이 국가를 위해 현명한 선택이다. 하야를 선택하라. 일시의 혼란은 긴 역사에 비추어 보면 짧은 시간에 지나지 않는다. 터지는 둑을 미봉으로 막으려 하다가 정작 둑이 터지고 나면 모든 게 쓸려간다. 그때는 개인도 나라도 그르친다. 박근혜 대통령의 준엄한 자기 성찰과 결단이 요구된다.
루이 16세는 거대한 프랑스 혁명의 노도(怒濤) 앞에서 머뭇거리다가 단두대에 올라갔다. 이게 역사의 교훈이요, 심판이다.

* 이 글은 경향신문(2016.11.1.)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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