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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제단에 희생된 광주학생운동의 주역 장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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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70년 특별기획 사건과 인물로 보는 우리 근현대사 21

박광종 선임연구원

11월 3일 1차 시위
1929년 10월 30일 광주와 나주 간 통학열차 안에서 일어난 한일 학생 간의 시비가 나
주역에서 난투극으로 발전하여 광주지역 한일 학생 사이에는 일촉즉발의 긴장감이 감돌
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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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3일은 메이지 일왕의 생일인 명치절(明治節)이자 우리의 개천절(당시는 음력)이며 ‘전남 산견(産繭 : 누에고치 생산) 6만석 돌파 축하기념식이 열린 날이기도 하였다. 일제는 학생들을 등교시켜 명치절 경축식을 거행했다. 경축식을 마치고 광주고등보통학교(광주고보) 학생들이 시내로 쏟아져 나오던 중 우편국 앞 수기옥정(須寄屋町) 앞에서 일본인 중학교 학생들과 시비가 붙었다. 이것이 광주역 광장에서 한일 학생간 집단 패싸움으로 발전하자 광주경찰서 경찰들이 동원되어 이들을 해산시켰다.
광주고보로 돌아온 뒤 독서회 회원들이 주도하여 사건 경위를 보고하고 사후대책을 논의하였다. 이 자리에서 일본인 중학교를 타도하겠다는 강경론이 압도적이어서 다시 학생들은 시가로 진출하였다. 광주농업학교(광주농교) 학생들도 합류하여 시위 학생들의 기세는 더욱 높아졌다. 시가로 나온 학생들은 조선 독립 만세를 소리 높여 외치고 애국가, 응원가를 불렀고 “식민지 노예 교육을 철폐하라!” “광주중학교를 철폐하라!” 등의 구호를 위치면서 시내 중심가를 누볐다. 이때 광주사범학교 학생들도 문을 부수고 시위 행렬에 합류하였고 주변에 있던 일반 시민도 합세하여 참여 군중의 수는 3만 명을 헤아렸다.
이날 한일 학생들 간의 유혈 격투가 일어났다는 소식을 들은 광주고보 졸업생인 장재성은 곧바로 전남청년연맹 위원장 겸 신간회 광주지부 간사였던 장석천 등 청년운동가들과 협의하여 첫째 투쟁대상을 광주중학생이 아닌 일본제국주의로 돌려야 하며 둘째 광주중학생에 대한 적개심을 일제에 대한 투쟁으로 바꾸고 셋째 앞으로 다른 동지들과 연락하여 다음 투쟁을 준비하고 계획할 것 등을 결정하였다. 그리고 그가 지도해왔던 독서회중앙부 학생들을 통해 광주고보 중앙강당에서 열린 회의를 이끌어 나가며 위의 방침을 관철시키고 학생들의 시가행진을 추동했던 것이다.

광주학생운동의 구심체인 성진회 그리고 독서회중앙부
1908년 광주의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난 장재성은 광주서석국민학교를 거쳐 광주고등보통학교에 진학했다. 1926년 9월 장재성은 식민지배 하의 민족차별에 대하여 독립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동교생 왕재일과 광주농업학교 박인생과 의기투합하여 비밀결사를 조직하기로 계획하였다. 11월 3일 장재성은 광주 부동정에 위치한 최규창의 집에서 왕재일, 박인생을 비롯한 광주고보생과 광주농교생 15명과 함께 조국의 독립과 사회주의 연구, 식민지노예교육 반대 등을 강령으로 하는 성진회를 조직하고 성진회의 회계를 담당했다. 또한 “1. 매월 첫째와 셋째 주 토요일은 정기 집회일로 정하고 2. 경비는 10전씩의 월 회비로 충당하고 3. 각자가 회원의 확충에 노력하고 비밀을 엄수할 것”이라는 운영규약도 결의했다. 이들은 광주 청년사회의 지도급 인사들인 장석천, 강석원, 박오봉, 나승규 등의 지도 조언을 받으면서 회원을 확충하고 의식을 심화시켜 나갔다. 그런데 회원 중 이반자가 생겨 기밀누설의 위험이 있고 또한 장재성·왕재일·박인생의 졸업으로 인하여 간부 진용의 공백이 생기자 1927년 3월에 회원 정남균의 집에 모여 성진회를 해체하였다. 하지만 동회의 해체는 형식적이었을 뿐으로 주동학생들의 활동은 계속되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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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7년 3월, 장재성은 광주고보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 주오대학 예과에 진학하였다. 1928년 4월 광주고보 5학년 재학 중이던 이경채가 독자적으로 「조선독립선언문」 등 격문을 살포하다가 일경에 체포되었고 학교당국으로부터 퇴학처분을 받았다. 광주고보와 광주농교에서 이에 항의하는 동맹휴학사태가 일어나자 장재성은 ‘도쿄유학생 모교분규사건 대책강구회’ 특파원 자격으로 급히 귀국, 성진회 잔류 인원들을 중심으로 ‘맹휴중앙본부’를 설치하여 격문을 발행하는 등 동맹휴학을 조직적으로 지도하였다.
1929년 6월 주오대학에서 퇴학을 당한 장재성은 곧바로 귀국하여 장석천이 전라도 책임자로 있던 조선공산청년회(책임비서는 차재정)에 가입했다. 조선공산청년회의 지도 아래 장재성은 각 학교별 조직을 담당하고 있던 핵심학생 7명-김상환, 김보섭, 윤창하, 송동식, 강달모, 조길룡, 김문복과 함께 ‘독서회중앙부’를 조직하여 책임비서를 맡는 한편, 이들을 중심으로 광주고보, 광주농교, 광주사범학교에서 독서회 조직을 만들어갔다. 독서회중앙부는 중앙부원의 손으로 각 학교별로 독서회를 조직하고 중앙부에 연락을 도모할 것과 학교별 결사회원에게는 중앙부의 존재를 절대 비밀로 할 것을 결의하였다. 이리하여 6월 하순 광주고보생 20여 명이 독서회를 조직하고 김상환이 대표를 맡았고 6월 하순에 광주농업학교, 9월 중순 광주사범학교에 독서회가 구성되었다.

11월 12일 2차 시위
앞서 1차 시위를 성공적으로 이끈 장재성은 11월 4, 5일경부터 전남청년동맹 위원장 장석천, 동 위원 강석원, 동 집행위원 국채진, 전남인쇄노조의 책임자 박오봉, 보통학교 교원으로 있던 임종근, 장성청년동맹 집행위원 나승규, 강영석 등과 함께 광주지역에서의 지속적 투쟁과 이를 전국적으로 확산시키는 것에 대해 협의하고 ‘학생투쟁지도본부’를 결성하였다. 11월 12일에 2차 시위를 강행하기로 정하고 전국학생, 사회단체 연락, 광주 및 전남 지역 학생지도, 노동자 동원, 전남 지역 교사 연락, 운동자금에 대해 업무 분담을 하여 장재성은 광주지방 학생지도를 맡았다.(학생투쟁지도본부 구성원 중 임종근을 제외하고는 모두 조선공산청년회의 조선공산당 재건 야체이카 성원이었다)
11월 10일 투쟁지도본부는 장재성이 기초한 「조선민중이여 궐기하라」, 「학생대중이여 궐기하라, 우리들의 슬로건 아래」 등 격문 4종을 승인하였고, 장재성은 격문을 광주고보 독서회중앙부 학생인 오쾌일 이형우 등에게 넘겨 각각 2천 장씩 등사케 하였다. 또한 독서회중앙부의 각 학교별 담당자를 집결시켜 시위시 행동지침과 격문 배포요령을 지시하는 등 2차 시위의 준비에 만전을 기하였다.
11월 12일 수업 시작종을 신호로 광주고보생들은 일제히 교문을 박차고 시내로 쏟아져 나왔다. 학생들은 격문을 뿌리고 구호를 외치며 시가지를 누비고 광주형무소를 목표로 진격하였다. 학생들은 수기옥정 우편국과 궁정의 광주형무소를 거쳐 광주사범학교까지 행진하였다. 광주농업학교 학생들도 9시 15분경 조회가 끝난 뒤 김남철, 김현수 등의 지도로 교문을 나와 경찰의 저지선을 돌파하고 광주고보를 지나 광주역을 통과, 사범학교 방향으로 진출하여 광주고보생들과 합류하였다. 시위대가 도중 광주여고보와 광주사범학교 앞에서 합류를 외쳤으나 학교 측의 엄중한 경계와 정문 폐쇄로 합류하지 못했다. 광주고보와 광주농교 연합 시위대가 광주형무소를 향해 진출할 즈음 일제 경찰은 이들을 포위하고 트럭을 총동원하여 무차별 검거하였다.
이날 시위로 겁을 먹은 총독부 경무국은 12일부터 학생시위에 대한 보도금지령을 내렸으나 학생시위는 11월 19일 목포 학생시위, 11월 27일 나주 학생시위를 필두로 하여 서울 등 전국적으로 번져나가 다음해 3월까지 이어졌다.
광주학생운동을 총괄 지도한 장재성은 2차 시위 바로 전날인 11일 밤 검거되었고, 12일 이후 대대적인 검거선풍이 불어 성진회와 독서회 회원들은 모조리 구속되었다. 1929년 12월까지 광주고보생 240여 명과 광주농업학교생 80명이 검속되었고 1930년 1월에는 독서회와 소녀회 관련자들이 추가로 체포되었다.

광주학생운동 이후 장재성의 행적
장재성은 1930년 2월 27일 광주지방법원 1심 판결에서 광주학생운동 관련자 가운데 최고형인 징역 7년형을 언도받았고, 1931년 6월 13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열린 독서회-성진회사건 복심판결에서 기소된 85명 중 최고 형량인 징역 4년을 선고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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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4년 4월 만기 출옥한 후 장재성은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 니혼대학 상경과를 다녔다. 니혼대 재학중이던 1936년 6월에 도쿄에서 결성된 조선인유학생연학회(朝鮮人留學生硏學會)에 참가하였다. 이 단체는 우삼홍과 박용칠이 중심이 되어 메이지대, 와세다대, 주오대, 릿쿄대에 재학중인 한국인 학생 30명을 모아 결성된 것이다. 표면상 학술단체를 표방하고 있으나 좌익이데올로기에 기반하여 민족해방운동을 추구하는 단체로 조선농촌문제와 일본제국의 조선통치방책, 시국문제를 논의하고 사회운동가 다카쓰 마사미치(高津正道) 등을 수차 초빙하여 강연회를 열었다. 귀국 후 장재성은 광주학생운동 참가자들과 함께 비밀리에 조직을 모색하던 중 1938년 2월 검거되기도 하였다. 해방 직후 장재성은 건국준비위원회 광주지부 위원, 전남지부 조직부장, 광주청년동맹 의장을 역임했다.
1946년 2월 민주주의민족전선 결성대회에 전남 대표로 참석했으며 1946년 3월에는 민주주의민족전선 전남지부 결성준비회의 총무부에서 활동했다. 세 차례에 걸쳐 38선 이북을 왕래하다가 1948년 검거되어 징역 7년을 선고받고 광주형무소에서 복역하였다. 6・25전쟁이 일어난 직후인 1950년 7월 광주형무소에 수감 중이던 좌익계 죄수들과 함께 경찰에게 집단 사살당하였다. 당시 유족으로는 광주학생의거 때 소녀회 결성에 참여하고 1929년 10월 장재성과 결혼, 출옥 후 일본 유학시 동행했던 부인 박옥희 씨가 있다.
장재성의 건국공로훈장 수훈 취소
장재성은 광주학생운동의 주역이라는 뛰어난 공적이 있었지만 여태껏 남북한 어느 정부로부터도 독립운동가로 서훈받거나 현창되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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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욱 안타까운 것은, 장재성이 1962년 3월 1일 포상했던 건국공로훈장 단장을 받을 뻔 했다는 사실이다. 대한민국에서 최초의 독립유공자 서훈은 1949년 건국공로훈장령이 반포된 직후 이승만 대통령과 이시영 부통령에게 수여된 건국훈장 대한민국장뿐이었고 그후 전혀 독립유공자 서훈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나서 1962년 3·1절에 있었던 대대적인 서훈이 두 번째로 정치적 의도가 담긴 것이었다. 즉 5·16군사쿠데타를 자행하고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으로서 권력을 장악한 박정희가 친일 전력을 가리고 독립운동가 보훈 및 현창사업을 통해 자신의 정통성을 강화할 목적으로 시행했다고 생각된다.
????경향신문???? 1962년 2월 24일자를 보면 내각사무처의 상훈심의위원회의 최종 심사를 거쳐 독립유공자 208명을 포상하기로 했다고 하여 그 명단을 실어놓았는데, 건국공로훈장 단장(單章) 수상자 132명의 이름 속에 ‘장재성’이 들어가 있었다. 하지만 ????경향신문????과 ????동아일보???? 1962년 3월 1일자에는 〈장재성 수훈 취소〉라는 제목으로 내무부가 실시한 수상자들의 개별 신원조회 결과, 장재성 씨가 광복 후 공산당에 관련한 혐의로 7년 징역을 언도받은 사실로 인해 2월 28일 독립운동유공자심사위원회가 장재성의 수훈을 취소했다고 기술되어 있다. 원래 상훈심의위원회에서는 ①국시위배 ②정치적 과오 ③납북 ④변절 ⑤해방후 월남치 않은 자로 ⑥확인할 만한 기록이 없는 경우 등 제외규정을 두었는데 이 중 ‘반공’이라는 ‘국시위배’에 해당했던 것이다.
참여정부 때인 2005년 3월 그동안 서훈 대상에서 제외되었던 여운형, 권오설 등 54명의 사회주의계열 인사들이 서훈된 바 있다. 일제강점기 조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한 독립운동가들을 좌우익으로 나누어 편향된 시각으로 서훈 여부를 결정한다는 것은 시대착오적인 발상이 아닐 수 없다.
참고로 악명 높은 간도특설대 출신 친일 군인 김백일의 이름을 따 1992년 개교한 광주 백일국민학교의 명칭이, 민족문제연구소 광주지부의 끈질긴 노력 끝에 2016년 장재성이 결성한 비밀결사 ‘성진회’를 기념하는 성진초등학교로 바뀌었음을 부기해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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