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라리 죽음이 부러웠다.”
강제 징용, 지금-여기의 이야기
2016년 6월 1일 미쓰비시[三菱]머트리얼(구 미쓰비시광업)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동원된 중 국인 강제노동 피해자 3,765명에게 공식 사죄와 함께 1인당 10만 위안(약 1,800만 원)씩의 사실상의 보상금을 지급하는데 합의했다. 보상금 총액은 752억 원 정도로, 일본기업의 보상액으 로는 전후 최대 규모이다.
미쓰비시 머트리얼은 이에 앞서 2015년 7월 제2차 대전 당시 강제노역 피해를 입은 미군 포로들을 직접 찾아가 머리 숙여 사죄하기도 했다.
일제강점기 일본의 3대 재벌 중의 하나인 미쓰비시 산하 회사에 동원된 조선인 징용 피해자만 약 10만여 명이다. 그러나 미쓰비시는 같은 시기, 같은 회사에서 똑같이 혹사당한 한국 피해자들에 관해서는 모르쇠하고 있다. ‘당시 조선은 일본과 한 나라였고, 일본 국민으로서 동원 됐기 때문에 법적인 문제가 다르다’는 기막힌 이유를 대면서 말이다.
징용도 서러운 처지에, 국적에 따라 목숨 값마저 차별받고 있는 씁쓸한 현실……광복 71년을 맞고 있는 한일 간 단면이다.
격정과 눈물로 강제 징용을 고발하다
사지를 넘어 귀향까지(소명출판, 2016)는 미쓰비시 탄광에 끌려가 수차례 죽을 고비를 넘기고 탈출한 한 퇴직교사의 강제 징용 수기다. 전남일보가 광복 45주년을 맞아 공모한 일제 강 제 징용 수기 공모전에 당선된 입상작이자 피해자 본인이 직접 작성하여 더욱 귀한 글이다.
지은이인 이상업 어르신이 강제 징용되어 끌려간 것은 1943년 11월경으로, 그의 나이 16세였다. 당시 일제가 제정한 징용령에 의하면 만 17세 이상의 남자에 한해서만 노무자로 동원할 수 있게끔 되어 있었지만 규정은 무시되었다. ‘황국신민의 영예로운 산업전사’는 허울 좋은 말 일 뿐이었고, 실제로는 허기와 죽음에 맞서며 중노동에 시달리는 노동자였다.
“소리 내어 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니 속으로는 차라리 그 소년의 죽음에 모두 소리 없는 축복(?)을 보내고 있었다. 지옥 같은 노동과 굶주림과 구타에서 일찍 해방된(?) 그 소년의 죽음을 차라리 부러워하고 있었다. 지옥 같은 그 막장에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저마다 스스로 목숨을 끊고 싶은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지은이가 징용되었던 가미야마다 탄광은 한마디로 지옥이었다. 독자는 격정과 눈물로 쓰인 그의 글에서 그 현장을 생생하게 확인하게 된다. 징용자들의 비참한 삶, 나라를 빼앗긴 식민지 민중으로서의 고통과 설움이 잘 나타나 있다. 특히 생사의 갈림길에서 느끼는 인간으로서의 본원적 욕구, 고향에 대한 절절한 그리움이 행간마다 묻어난다. 덧붙여 권말에는 지은이가 직접 그린 삽화와 사진 자료를 넣어 보다 생생하게 당시 모습을 느낄 수 있도록 했다.
일본 제국주의의 실상을 기억할 수 있는 세대는 얼마 남아 있지 않다. 사지를 넘어 귀향까 지는 이 귀한 기억이 사라지기 전에 한 권으로 묶어 일제 강제 징용의 처참한 실상을 낱낱이 고발한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겐 미래가 없다는 말이 있듯이, 이 책은 강제 징용의 역사를 보 존하여 더 나은 미래를 만드는 과정의 가치 있는 한 걸음이 된다.
지은이
이상업(李相業)
1928년 12월 18일 전남 영암군 영암읍 망호리에서 6남매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6살이던 1943년 9월 징용 영장을 받고 일본 후쿠오카현 가미야마다[上山田] 미쓰비시 탄광에 끌려가 굶주림과 폭압 속에 지하 막장에서 탄을 캐는 광부로 강제노동을 겪었다.
연이은 동료의 죽음을 목격한 뒤 탈출을 시도했지만 번번이 실패하고, 세 번째 시도 끝에 탈출에 성공해 1945년 해방을 맞아 고향으로 돌아왔다.
1948년 영암남초등학교를 시작으로 영암초등학교와 금정초등학교 등을 거쳐 1994년 덕진초등학교 영보분교 정년퇴임까지 군복무와 영암군청 근무를 제외하고 33년 동안 교사로 재직했다. 서예와 그림 솜씨가 뛰어나 학생들을 지도하고 각종 대회에서 수상하기도 했다. 1951년 결혼하여 3남 2녀를 두었으며, 현재 월출산이 병풍처럼 펼쳐져 있는 고향 영암 망호리에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