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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의학이 ‘우리 고유의 유산’이라는 오해와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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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한의학이 우리 고유의 유산이라는 믿음이 팽배해 있다. 그러나 실상을 따져보면 한의학이 우리 고유의 것이라는 의식은 고작 30년 전에 만들어진 착각이다.

한의학이 ‘국산’이라는 잘못된 믿음이 팽배한 이유는 순전히 한의계의 농간 때문이다. 1986년 한의사협회의 요청으로 바꾸기 전까지는 한의학의 ‘한’은 대한민국을 의미하는 ‘韓’이 아닌 중국을 의미하는 ‘漢’이었다.

대한한의사협회의 영문명칭 조차도 몇 년 전 The Association of Korean Medicine으로 바뀌기 전에는  The Association of Korean Oriental Medicine이었으며 각 대학 한의학과도 College of Oriental Medicine이라는 명칭을 사용했다. 한국한의학연구원의 영문 명칭은 아직 변경되지 못한 채 Korean Institute of Oriental Medicine를 사용하고 있다. 한의계 스스로도 한국 고유의 독창적인 의학이 아닌 ‘동양의학’으로 인식해왔음이 고스란히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예전 사람들이 한의학을 어떻게 생각했는지 알아볼 수 있는 가장 확실한 증거는 국어사전이다. 1938년부터 최근까지의 국어사전에서 ‘한방’과 ‘한의학’을 어떻게 정의하고 있는지 아래 표에 나열했다. 최근에는 ‘한의학’이라는 단어를 많이 쓰지만 국어사전에 등장한 것은 90년대 이후이며 그 전에는 ‘한방’으로 통칭했다.



1938년부터 1991년까지 사전에서는 한결같이 ‘한방(韓方)’이 중국에서 전래했다고 설명하고 있다. 우리의 것이라는 인식이 전혀 담겨있지 않다. ‘우리나라’, ‘고유’ 따위의 단어가 포함된 것은 1996년부터다. 즉, 90년대 이전까지는 탕수육을 중국음식으로 여기듯 한의학을 중국의 전래의술으로 여겼다. 그러다 1986년에 갑자기 명칭을 바꾸고 갑자기 ‘우리 고유의 것’이라는 주장을 시작한 것이다.

일제가 한의학 이미지를 훼손?

한의계에서는 일제 식민지 시대에 일본의 박해에 의해 한의학이 탄압을 받고 우리 고유의 것이라는 인식이 지워졌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한반도에서도 주권을 잃기 이전에 이미 한의학 교육 기관인 혜민서는 1882년에, 전의감은 1894년 갑오개혁 때 폐지되었다. 1894년에 과거가 폐지되면서 국가 차원의 한의사 양성은 완전히 막을 내렸다. 이 시기는 일본의 지배를 받기 이전으로 자주적인 결정에 의해 한의학에 작별을 고한 것이다.

특히 고종은 1884년 중상을 입은 민영익을 서양에서 온 의사 알렌이 치료하는 모습을 보고 크게 감명을 받았다고 알려져 있다. 알렌은 어의들의 반대를 물리치고 민영익을 치료했는데 한의사들이 민영익의 상처에 시커먼 송진 꿀을 집어넣으려는 것을 막고 상처를 꿰매 생명을 구해냈다. 여기에 대해 일부 한의사들은 민영익을 회복시키는 데에는 개고기를 먹인 한의사들의 공로도 빼놓을 수 없다고 주장하는데 잠시 살펴보자.

“알렌은 당시 미국에서 상당한 실력을 갖춘 의사는 아니었다. 하지만 한의사들이 갖지 못한 서양 의술, 특히 외과 의술을 갖고 있었다는 것은 큰 이점이었다. 알렌이 도착하기 전 모여 있던 열네 명의 한의사들은 민영익을 치료하기 위해 애썼지만 자신들의 의술로는 어쩔 수가 없었다.

알렌은 한의사들이 시커먼 송진 꿀(혹은 일종의 고약)을 민영익의 상처에 집어넣으려는 것을 목격하고 놀랐다. 알렌이 치료를 시작하자, 한의사들은 강하게 반발했다. 그러나 알렌은 결국 스물일곱 군데의 상처를 꿰매는 등 치료를 통해서 민영익의 생명을 구했다. 서양 의학의 완승이었다. ” – 박형우. 박윤재 연세대 교수 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95840
“그렇다고, 알렌이 민영익을 살린 사건이 ‘한의학이 서양 의학에 무릎을 꿇은 사건’이라는 평가에도 동의할 수 없다. 자, ‘의학사 산책’에서 미처 언급하지 않았던 뒷얘기를 살펴보자. 알렌의 외과 수술 덕에 위기를 넘긴 민영익은 또 다른 어려움에 봉착했다. 수술로 봉합한 상처가 쉽게 아물지 않았던 것이다.

이런 상황이 오래 지속되자 한의사들은 민영익에게 개고기를 먹어서 몸을 보하는 전통 식이요법을 권한다. 사실상 민영익의 주치의 노릇을 했던 알렌이 이런 제안을 접하고 기겁을 했으리라는 건 쉽게 짐작해볼 수 있다. 알렌은 한의사들의 제안에 딴죽을 걸면서 반대했다. 그러나 계속 상처가 아물지 않아 고생하던 민영익은 곧바로 개고기 복용을 시작했다.
결과는 예상대로다. 개고기 복용의 효과는 즉시 나타났다. 아물지 않았던 봉합 부위의 상처가 아물기 시작했고, 민영익의 전반적인 몸 상태도 눈에 띄게 좋아졌다. 민영익을 지켜본 알렌의 반응은 어땠을까? 내색은 안 했지만 알렌 역시 개고기를 이용한 식이요법의 효과에 크게 놀랐을 것이다.” – 이상곤 갑산한의원 원장 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96037
고종은 한의학 교육을 중단시킨 뒤 1886년 제중원을 설립해 서양의학교육을 시작하였으나 순탄치 않았고, 우여곡절 끝에 1908년이 되어서야 세브란스병원의학교로 명칭이 변경된 제중원에서 최초로 7명의 졸업생을 배출시켰다. 1899년에는 <의학교 관제>를 반포하고 서양의학을 가르치는 의학교를 설립해 한 해 50여명 규모의 의학생을 양성했다. 의학교 설립은 서양의학의 도입을 가장 시급한 개명운동이라고 여겼던 서재필 등의 독립회원들의 건의로 이루어졌으며 1896년 창간된 <독립신문>은 서양의학 도입에도 앞장섰다.

한의계에서는 1900년에 반포된 <의사규칙>에 한의학 관련 표현이 담겨 있음을 들어 서양의사뿐만 아니라 한의사들도 의사로 인정을 했다는 증거라고 주장을 한다. 하지만 1900년에는 국내에서 서양의학 교육을 마친 사람이 한 명도 없던 때라는 점을 감안하면 이는 제대로 된 의학교육을 받은 사람이 없는 시대적 상황을 나타낼 뿐이지 한의학을 서양의학만큼 인정했다는 근거가 될 수는 없다.
1904년 고종은 몇몇 한의사들의 요청을 수용해 한의학 교육기관인 동제의학교 설립을 승인해 3년간 운영되었다. 그러나 1년 만에 예산을 지원받지 못해 중단 위기에 처했다는 등의 기록을 보면 국가 차원에서 한의학 부흥을 목적으로 운영한 것이 아니라 한의사들의 요구에 허가를 내어 준 정도에 불과하다고 평가하는 편이 타당하다.
일본 또한 우리와 마찬가지로 서양의학이 도입되기 전에는 중국에서 전래된 한의학(漢方, 캄포)을 사용해왔다. 일본은 메이지 유신 이후 의료의 틀을 자연과학을 배경으로 하는 서양의학으로 옮기면서 한방 치료를 하는 전통요법사를 더 이상 의사로 인정하지 않았고 일본에서 한의학은 명맥을 잃게 되었다. 일본은 이미 스스로 한의학이 쓸모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폐기한 것이지 한의학이 중국이나 조선의 것이라 여겨서 폐기한 것이 아니다. 일본은 현재도 한의사제도를 두고 있지 않다.
일제 시대에 근대의학을 교육받은 의사만을 인정하고 한의사를 차별한 이유는 한의학이 서양에서 도입된 근대의학에 비해 열등하다는 사실이 드러났기 때문이지 한의학이 조선 민족의 것이라고 여겨서가 아니다.
우리나라에는 삼국시대부터 서로 돌을 던지며 싸우는 석전(石戰)놀이라는 전통놀이가 있었다. 부상자와 사망자가 발생하는 이 위험한 놀이는 일제가 금지시키기 전까지 오랜 기간 유행했다. 물론 현재도 단체로 돌을 던지며 싸우는 행위는 불법이다. 이 위험하고 미개한 행위가 일제시대에 근절되었다고 해서 전통 석전놀이를 다시 부흥시켜봐야 불필요한 인명피해만 발생시키게 된다.
한의계에서는 한의학이 과학에 밀려 점점 설자리가 좁아지니 민족성에 기대고 반일감정에 편승하려는 작전을 펼치려 사실을 왜곡하고 있다.
환자의 인명을 다루는 의학에서는 환자의 건강과 안전에 대한 과학적 근거가 최우선이 되어야 한다. 과학에 밀려 의학으로서의 가치를 입증하지 못하고 허튼 소리를 일삼는 한의계의 장단에 말려들면 그 피해는 고스란히 우리들에게 돌아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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