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1년 12월 8일 일요일, 일제는 선전포고도 없이 미국 태평양함대의 기지가 있는 하와이 진주만에 대한 공습을 감행했다. 태평양전쟁의 막이 오른 것이다. 중일전쟁이 장기화하면서 필수자원인 석유, 고무의 수급이 어려워진 일본은 이들 전략자원 확보를 위해 서구 열강의 식민지였던 동남아시아로 침략의 손길을 뻗었다.
동남아시아를 식민지로 장악하고 있던 유럽 제국주의 국가들은 1941년, 제2차 세계대전의 소용돌이에 휩싸여 있었다. 독일에 항복한 뒤 중부 휴양도시 비시에 새로운 정부를 세운 프랑스는 자국의 주권 유지에 급급한 상황이라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는 신경 쓸 여력조차 없었다.
네덜란드도 독일에 점령당한 상태였고, 버마와 말레이시아를 차지하고 있던 영국은 힘겹게 본토를 방어하면서 동시에 북아프리카에서 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일본의 동남아시아 점령을 막을 유일한 군사적 대안은 미국의 태평양 함대뿐이었다. 그래서 일본군은 기습적으로 진주만 공습을 단행한 것이다.
일제의 침략전쟁이 동남아 일대까지 확산되던 즈음, 일본은 ‘고도국방국가’를 표방하면서 전쟁에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인적·물적 자원을 확보하려고 혈안이 되었다. 식민지 조선에서는 군인, 군속, 노동자, 일본군 ‘위안부’ 등으로 최소한 130만 명이 넘는 젊은이들이 전쟁터와 공장, 광산, 비행장 건설 현장 등으로 끌려갔다. 이들 중에는 군속 신분의 포로감시원도 있었다. 이들은 급속하게 늘어난 연합군 포로를 관리하기 위해 아시아 태평양 일대의 연합군 포로수용소에 배치되었다.
유명한 ‘콰이강의 다리 〈The Bridge on the River Kwai(1957)〉’는 태국 콰이강 철교 건설에 동원된 연합군 포로들을 소재로 한 영화이다. 연합군 포로를 감시하고 가혹한 강제노동에 동원했던 이 역사의 현장에 ‘오행석’이라는 조선인 포로감시원이 있었다. 1919년 2월 전남 장성에서 태어난 그는 1942년 5월초 장성군에서 모집되어 5월 10일 부산 서면 ‘임시군속교육대(일명 노구치野口부대)’에 입대했다. 그는 민간인 신분인 군무원이었지만 군인과 다름없는 혹독한 군사훈련을 2개월간 받았고 싱가포르 포로수용소로 파견되었다. 그곳에서 태국으로 이동해 콰이강의 다리 건설에 동원된 연합군 포로 1,000여 명을 감시하는 임무를 맡았다. 원래 ‘포로감시원’의 업무는 일상적으로 포로를 관리하고 도주를 감시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일본군 상관의 명령에 무조건 복종해야 했던 말단의 조선인 포로감시원들은 피골이 상접한 포로들을 각종 건설현장으로 데려가 강제노역을 시킬 수밖에 없었다. 태국과 버마를 연결하는 태면철도(泰緬鐵道) 건설은 총 700km의 대규모 공사로 미국은 5년, 영국은 7년 걸린다고 예견했다. 그러나 일본군이 주도한 철도공사는 1년 만에 끝났는데 이에는 엄청난 인명손실이 뒤따랐다. 즉 연합군 포로들은 물론 수많은 중국인, 말레이시아인, 인도네시아인들이 열악한 환경에서 밤낮없이 혹사당했으며 학대와 질병, 강제노동으로 수많은 목숨이 희생당했다.
포로감시원 오행석은 해방 후 자신이 목격했던 연합군 포로수용소의 모습을 기록으로 남겼다. 영양 부족과 말라리아로 죽은 수많은 포로들의 시신과 아무 이유 없이 일본 군인에게 목이 잘린 중국인, 건설현장의 포로 처형 등 일본군의 끔찍한 만행들을 그림으로 고발했다. 그는 태국 포로수용소에서 근무하던 중 총칼을 든 일본군이 조선인 여성들을 최전방으로 인솔해 가는 것을 목격하였으며 임시막사를 만들어 위안시설로 쓰던 일본군이 조선인 ‘위안부’들을 강제로 끌고 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증언했다. 오행석은 일본이 패전한 후 조국의 독립과 귀국의 기쁨을 느끼기도 전에 포로학대 혐의로 전범으로 몰렸다. 다행히 무죄가 입증되었지만 고국에 돌아오지 못한 채 3년간 강제노역을 당했으며 강제 저축한 돈마저 지급받지 못했다.
일제 식민지배로 인한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상처는 치유되지 못한 채 여전히 진행형이다. 일본군 ‘위안부’를 비롯하여 야스쿠니 무단합사, 강제노동, 사할린 억류 동포, 시베리아 억류자, BC급 전범, 여자근로정신대, 유골봉환 등 해결해야 할 과제는 아직도 산적해 있다.
∷ 강동민 자료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