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사랑

낙락장송 쓰러뜨리는 도끼자루는 되지 말자

1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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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가 ‘박근혜 퇴진’ 목소리로 가득한 가운데 11월 9일 박기서, 홍소연 두 분을 연구소로 모셨다. 20년 전 사건의 전말을 듣기 위해서였다. 이해를 돕기 위해 우선 조선동 회원(예원학교 국어교사)이 10년 전 어느 신문에 기고한 글을 소개한다.

1996년 10월 23일. 박기서는 안두희에게 물었다. “네가 안두희냐?” 도피와 병마에 지친 늙은 안두희는 소리 나는 쪽으로 겨우 고개를 돌렸으나, 자신이 안두희라는 사실조차 제대로 인정하지 못했다. 박기서는 ‘정의봉’을 꺼냈다. 순간 종교적인 번뇌가 스쳐갔다. 버스 운전으로 겨우 꾸려가는 가정형편과 고등학교 3학년인 딸아이의 눈망울이 떠올랐다. 결국 박기서는 정의봉을 휘둘렀다. 그는 “겨레와 조국에 죄를 지은 자가 하늘이 주는 수명을 다하는 것”을 결코 볼 수 없었다. 이 땅에서 ‘정의’가 영원히 사라진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다. 안두희는 허망하고 처참하게 숨졌다.

육군 소위이던 안두희는 1949년 6월 26일 백범을 암살하고 마치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은 헌병 지프에 실려가서 무기형을 받았다. 그의 수감생활은 고기, 술, 담배가 원없이 제공되는 호화판이었다. 다음해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현역으로 복귀하여 대령까지 초고속 승진했고, 전역 후에는 검은 세력의 비호 아래 군납업에 손을 대 한때 강원도에서 두 번째로 세금을 많이 낼 만큼 큰돈을 만졌다. 자유당 붕괴 후, 그는 이름을 바꾸고 부인과 위장이혼하고 가족을 외국으로 빼돌렸다. 자신도 이민을 시도했다. 그는 백범 암살에 관한 일들에 대해 끝내 거짓과 침묵으로 일관하였다. 죽음은 삶의 단순한 종결이 아니라, 삶의 한 과정이다. 죽음은 종국에 삶의 모습을 반영한다. 그래서 안두희의 죽음은 극적 상징성을 띤다.

박기서는 성당에서 자수했다. 그리고 법이 정한 대로 형을 살고, 예전처럼 운전대를 잡고 살고 있다. 그가 그날 한 일을 두고 개인이 개인을 사적으로 징벌하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가 하는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이 있다.

나는 묻고 싶다. 과연 그가 자신의 종교적인 신념을 저버리고, 개인적인 응징을 결심하고 실행할 때까지 이 나라와 이 사회는 무엇을 했는가라고 말이다. 그가 그날 한 일은 음모와 거짓과 침묵으로 점철된 거대한 악의 구조에 온몸을 던진 도전장이고, 불의에 면역되고 진실을 외면하고 있는 우리들에게 이제 제발 진실을 향해 눈과 귀를 열라는 피맺힌 절규에 다름 아니다.

history

 

다음은 박기서 회원과 홍소연 회원(운영위원회 부위원장, 심산김창숙기념관 전시실장)의 대화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 홍소연 : 안두희를 응징한지 20년이 지났습니다. 소회가 어떠세요?

박기서 : 응징 이후 수감생활을 하다가 많은 분들의 성원으로 국민의 정부 출범 직후인 1998년 3월 특별사면으로 출소했지요. 그리고 참여정부 등 10년 동안에 6‧15 남북공동선언, 친일진상규명활동 등을 지켜보면서 저로서는 하루하루가 보람 있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런데 거꾸로 이명박, 박근혜 정권이 들어선 후에는 정신적으로 견디기 힘들었습니다. 한마디로 희망과 절망이 교차하는 20년이었습니다. 그러던 차에 요즘에는 전국민적으로 박근혜 퇴진 운동이 벌어지는 것을 보고 저도 매주 열심히 촛불집회에 참여하면서 다시금 희망을 보고 있습니다. 이번에는 우리 국민들의 열기가 냄비 식듯이 잦아들지 않고 성과를 낼 때까지 이 열기가 지속되길 바라는 마음 간절합니다.

• 홍소연 : 의거 당시에 저는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협회에 근무하고 있었는데 경찰과 언론에서 전화가 빗발쳤던 기억이 납니다. 박기서가 기념사업협회 회원이냐는 것이죠. 그때에는 회원이 많지 않아서 제가 이름을 거의 알고 있던 시절이라 전혀 모르는 사람이라고 대답했어요. 그러면서 들었던 생각은 부끄러움이었습니다. 당시 기념사업협회에 나오시던 거의 모든 어른들이 ‘안두희 죽일 놈’을 입에 달고 사셨는데 실제로 아무런 행동도 안하셨고 저 역시 마찬가지였어요. 그래서 박기서 선생님을 전혀 몰랐지만 저 자신이 무척 부끄러웠던 것이죠.

• 박기서 : 평소 <백범일지>를 읽으면서 백범 선생님의 대한 존경심을 깊었던 까닭에 안두희를 응징할 결심이 비교적 쉽게 섰던 것 같아요. 넉넉하지는 않았지만 버스 운전을 하면서 생활하고 있었는데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이 별것 아니지만 내려놓자’고 마음먹으니 그때부터 마음이 편해지더라구요. 그리고 제 행동이 백범 선생님의 정신에 크게 어긋나지는 않은 것에 위안으로 삽니다.

• 홍소연 : 당시 논란이 되었던 부분 중에 제가 안타깝게 생각하는 내용이 있는데요. ‘안두희를 죽임으로써 백범 암살의 진상규명이 더욱 어렵게 되었다’는 지적입니다. 그 지적은 그때 상황을 정확히 모르는 데서 기인했다고 봅니다. 그 무렵 안두희는 실어증에다 정신이 극도로 혼미했고 혼자서는 거동도 불가능했으니 사실상 육체적, 물리적으로는 이미 사망한 것이나 다름없었던 상태였지 않습니까. 그래서 박기서 선생님이 의거를 하신 가장 큰 동기도 백범 같은 위대한 독립운동가는 비명에 가셨는데 그 암살범은 천수를 누린다는 사실을 결코 용납하지 못하신 것이지.

• 박기서 : 정확히 말씀해 주셨습니다. 제가 경찰에 자수하면서 경찰서로 들어서니 수많은 취재진이 몰려들어 넘어질 뻔도 했는데 여러 질문을 받았지만 당황해서 어떻게 대답했는지도 몰랐습니다. 나중에 그 상황을 담은 영상을 보니 제가 “정의는 살아 있습니다”라고 외쳤더군요. 그것이 제 행동의 가장 큰 동기였지요. 바로 역사 정의가 살아 있음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 홍소연 : 그 당시 언론 보도를 찾아보니 선생님께서 “아이들이 어른이 돼 아버지는 단순한 살인자가 아니라 큰일을 했다고 자랑스럽게 여겨줬으면 한다. 정의를 위해 큰일을 한 것 같아 후회는 없다.”고 말씀하셨더군요. 20년이 지났지만 ‘정의봉’을 맞아야 하는 사람들이 더 늘어난 것은 아닐까 씁쓸합니다만 그래도 우리나라의 희망인 젊은이들에게 한마디 해주신다면요?

history

 

• 박기서 : 만약 낙락장송 같은 거목이 있는데 그 거목을 베는 것은 날카로운 도끼날이지만 그 도끼날을 휘두르려면 반드시 도끼자루가 필요하지요. 저는 낙락장송은 백범 선생, 도끼날은 미국, 도끼자루는 이승만을 비롯한 친일세력과 안두희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이해한다면 오늘날에도 우리 민족과 공동체의 미래를 해치는 외세가 존재하지만 적어도 우리나라 젊은이들은 그 외세에 부역하는 도끼자루는 되지 말라고 이야기해주고 싶어요.

• 홍소연 : 연구소와의 인연은 어떻게 시작되셨나요?

• 박기서 : 제가 경찰서 유치장에 있을 때 제일 먼저 면회 오신 분이 연구소 2대 이사장을 역임하셨던 독립운동가 조문기 선생님이셨어요. 저를 보시자마자 “박동지. 박동지는 이 시대의 독립운동가요”라고 말하셨어요. 저로서는 너무나 감동적이고 고마운 말씀이셨습니다. 그리고 출소 후 조 선생님께서 전화하시더니 어디를 가자고 하셨는데 그곳이 바로 민족문제연구소였습니다. 그래서 그때부터 회원 가입을 했지요. 조문기 선생님은 나이로는 제 아버지뻘인데도 절대 하대하지 않은 분이셨습니다. 그런 어른이 2008년 돌아가셨을 때는 아버지를 여읜 것처럼 슬펐습니다.

• 홍소연 : 끝으로 요즘 근황은 어떠세요?

• 박기서 : 부천에서 개인택시를 운전하고 있고, 효창원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효사모) 활동을 주로 하고 있습니다. 효사모는 백범 선생을 비롯해 여러 독립운동가들이 모셔져 있는 효창공원을 용산구가 관리하는 근린공원이 아닌 국가보훈처가 관리하는 국립묘지급으로 격상해 성역화하자는 목표를 가지고 활동하고 있는 모임입니다.
누구는 박기서 회원의 행위를 사건으로 또는 응징, 의거 등으로 표현하지만 그의 바람은 20년 전이나 지금이나 한결같다. ‘역사정의와 조국통일’ 곧 백범이 바라던 바로 그것이다. 20년이 지나도록 그의 행위를 치하하는 그 흔한 기념식이나 기념모임은 없었지만 그는 지금도 묵묵히 100만이 모이는 시민 광장에서 하나의 촛불로서 정의를 실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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