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땅에서 나고 자란 청년이 있는 한 우리 민족의 맑은 정기는 더욱 굳게 이어질 것이며 우리들 젊음의 기백이 꺾이지 않는 한 친일파 청산의 노력은 계속될 것이다.”
비장감마저 감도는 위 글은 민족문제연구소 청년회 출범 선언문(1998년 12월 29일)의 일부입니다. 많은 회원들이 ‘연구소에 청년회가 있었나’ 하고 의아해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위 선언문에서 보듯이 연구소 청년회는 ‘얼산이’(얼이 살아 있는 사람들이라는 뜻의 순우리말)라는 애칭으로 불리며 연구소 대외 활동의 한 시대를 풍미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청년회의 시작은 1998년 9월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당시에는 전국적으로 회원이 겨우 200명 정도였으니 지부 모임은커녕 회원들 모임도 거의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IMF의 영향도 있었겠지만 여하튼 회원 관리가 거의 안 되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러던 차에 그해 8월 군대를 막 제대하고 연구소 상근활동을 시작한 방학진 당시 조직부장이 연구소 인근에 거주하는 20~30대 회원들에게 일일이 전화를 걸었고 그 결과 9월 29일 연구소 사무실에서 한호석, 유현도, 김훈식 회원이 모였는데 이것이 청년회의 시작이었습니다.
청년회는 의외로 빠르게 두각을 나타냈는데 그 이유는 이화여대가 김활란상을 제정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청년회가 가장 발 빠르게 반대운동의 중심에 섰기 때문입니다. 청년회는 이화여대 앞에서 김활란상 제정 반대 집회를 열었을 뿐 아니라 하이텔, 천리안, 나우누리 등 PC통신상에서도 열심히 반대운동을 전개했습니다. 그 결과 이듬해인 1999년 5월 이화여대가 김활란상 제정을 포기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이에 앞서 4월에는 일본 오자와 이치로 자유당 당수가 과거사에 대한 반성없이 효창원을 참배하자 청년회원 5명은 기습 항의 시위를 벌여 잠시 경찰에 연행되기도 했습니다. 이외에도 2000년 10월 서울 문래공원 박정희 흉상 철거를 비롯한 박정희기념관 반대운동 그리고 연구소 후원주점 주최, 대중강좌 개최와 산행 모임 주도 등 청년회는 그야말로 연구소의 손과 발이자 기동대 역할을 톡톡히 해냈습니다. 그 당시 ‘마음은 청년’이라면서 자신들도 청년회에 가입시켜 달라는 떼를 쓰는 장년회원들이 적지 않았을 정도로 청년회는 인기짱이었지요. 시간이 지남에 따라 각 지부가 조금씩 활성화되기 시작했고 공교롭게도 청년회의 활동은 시들해 갔습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초대 청년회장 한호석 회원의 말처럼 지역 모임이 활발하지 않았던 시절, 조직에 활력을 불어넣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바로 청년회였기 때문입니다. 즉 청년회는 지부 조직을 되살리는 불씨를 자임했고 그 역할을 초과 달성했던 것입니다.
‘청년이 서야 조국이 산다’라는 말처럼 당시 소수의 청년회원들은 ‘청년회가 서야 연구소가 산다’라는 신념으로 뜨겁게 활동했습니다. 18년이 지난 지금 그때의 청년들은 어김없이 40~50대의 장년이 되었지만 그들은 연구소의 어려운 시절을 몸으로 함께 버텨준 버팀목이자 가교와 같은 존재들이었습니다. 특히 초대 청년회장 한호석 회원을 비롯해 노은숙, 김점구, 남호정, 유현도, 김훈식 회원의 노고를 잊을 수 없습니다.
∷ 방학진 기획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