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사랑

우리나라 최초의 위조지폐사건과 이관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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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공동의 위폐범

1946년 5월 15일 수도경찰청장 장택상은 희대의 위조지폐사건을 발표했다. 사건의 개요는 서울시 소공동에 있던 정판사(精版社)라는 인쇄소에서 일단의 무리가 900만 원 이상의 조선은행권 위조지폐를 찍어 유통시켰다는 것이다. 정판사는 해방 전 조선은행 지폐를 찍어내던 곳이었다.

수사당국은 정판사 직원들이 조선공산당의 지시에 따라 정판사에 있던 조선은행권 지폐원판을 가지고 위폐를 찍어냈다고 발표하였다. 위폐사건의 주범은 의외로 손쉽게 잡혔다. 정판사가 있던 근택빌딩에는 조선공산당의 기관지 <해방일보>를 발행하는 해방일보사가 입주해 있었다. 당시 사장은 권오직(權五稷), 편집주간은 조일명(趙一明)으로 모두 공산당원이었다. 장택상은 조선공산당이 남한의 경제를 교란시키기 위해 대량으로 위조지폐를 찍어 유통시켰다고 발표하였다. 이후 수사당국은 백원권 원판 9개, 옵셋트 인쇄용 원판 3개, 잉크 3종을 증거로 제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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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정판사 위폐사건을 보도한 신문기사. 사진에 있는 건물이 조선정판사가 있던 근택빌딩이다. 「위조일당은 16명, 전부가 공산당원, 이관술, 권오직은 피신」 <동아일보> 1946.5.16.ⓒ 민족문제연구소

명색이 희대의 위폐사건인데, 위조지폐가 한장도 안 나온 희한한 사건이었다. 이 사건으로 해방일보사 사장 권오직, 정판사 사장 박낙종(朴洛鍾)을 포함해 정판사 직원 15명에게 체포영장이 발부되었다. 그런데 이들과 함께 조선공산당의 거물급 인사에 대한 체포령이 떨어졌다. 그의 이름은 이관술(李觀述)로, 당시 조선공산당 중앙위원 겸재정부장이었다. 체포령이 떨어진 이관술은 도피 중 7월 7일 경기도 경찰부에 체포되었다. 8월 12일 검사국에 송치되어 8월 21일 정식으로 기소되었다. 그는 공판과정에서 자신은 사건 당시 북한을 여행 중이었다며 무죄를 주장하였다. 권오직과 조일명은 도피에 성공해 월북했다.

재정부장은 공산당의 자금을 관리하는 총책임자라 한시라도 비워둘 수 없었다. 이관술이 체포된 후 재정부장을 맡은 인물은 경남 창녕의 만석꾼집 종손 성유경(成有慶)이었다. 도쿄외국어대학에서 유학한 성유경은 일본에서 사회주의자가 되었다. 해방 후 그의 명륜동 자택은 이강국, 김삼룡 등 공산당 간부들의 단골 회합장소였다. 그는 종로 YMCA 건너편에서 백합원이라는 요릿집을 경영하며 공산당에 자금을 공급했다. 성유경은 1948년도에 월북했는데, 그의 둘째 딸 성혜림이 김정일 전 국방위원장의 부인이자 김정남의 모친이다.

정판사위폐사건에 대한 재판은 1946년 7월 30일에 시작되어 무려 26회까지 진행되었다. 최종 공판은 11월 28일에 열렸다. 이날 공판에서 이관술과 박낙종, 송언필(서무과장), 김창선(평판과장)은 무기징역을 언도받았다. 이관술‧박낙종‧김창선은 서대문형무소, 송언필은 마포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이 사건으로 조선공산당은 위조지폐를 만드는 경제범죄집단으로 간주되어 도덕성에 치명상을 입었다. 미군정은 이 여세를 몰아 조선공산당을 불법단체로 규정하고, 간부들에 대한 체포령을 하달했다. 조선공산당은 미군정에 맞서 급진적 투쟁방식인 신전술을 채택했다. 1946년 9월 총파업과 10월사건은 바로 이 정판사위폐사건에서 잉태되었다.

경성의 꼬뮤니스트들

이관술은 1902년 울릉도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1906년 경남 울산군 범서면으로 이주했고, 상당한 부를 축적했다. 이관술은 할아버지가 세운 학당에서 한문을 배웠다. 그리고 1923년 경성으로 상경해 종로구 수송동(현재 종로구청)에 위치한 중동학교에 입학했다. 중동학교는 최근 친일논란으로 문제가 되었던 백농(白儂) 최규동(崔奎東)이 사재를 털어 재건한 사립학교다. 이관술은 조선인 상점들이 번화한 종로거리를 오가며 공부했고, 1925년 3월 중동학교를 졸업했다.

그는 졸업 직후 일본으로 건너갔다. 이관술이 도착한 곳은 제국 일본의 심장 도쿄였다. 그는 도쿄 분쿄구 오쓰카에 위치한 도쿄사범학교에 입학했다. 이 학교는 일본 최초의 관립 사범학교로 입학이 까다롭기로 유명했다. 이관술은 뛰어난 성적으로 합격해 지리역사과에 입학했다. 그가 이 학교를 다닐 때 여러 명의 조선인 학생들이 재학 중이었는데, 이중에는 저명한 무교회주의자 김교신과 함석헌도 있었다. 그는 학교에서 법제경제연구소에 가입해 활동하며 처음으로 사회주의의 세례를 받았다. 아이러니하게도 1920년대 일본의 대학과 사범학교 강단에서는 공공연하게 마르크스의 <자본론>과 레닌의 <제국주의론>을 가르쳤다.

이관술은 4년의 교육과정을 마치고 1929년 3월 고등사범학교를 졸업했다. 그는 졸업하자마자 귀국해, 그해 4월 동덕여자고등보통학교 교사로 취직했다. 이관술은 학교에서 비밀리에 독서회를 조직해 학생들에게 사회주의를 전파했다. 이 독서회에는 박진홍과 이관술의 배다른 여동생인 이순금도 있었다. 1931년 동덕여자고보 학생들은 동맹휴학투쟁을 벌였는데, 이 동맹휴학을 주도한 학생이 박진홍과 이순금이다. 박진홍은 함북 명천 사람으로, 동덕여자고보 개교 이래 최고의 재원으로 불릴 만큼 총명했다. 그녀는 이관술이 조직한 독서회에서 사회주의사상을 습득했고, 동맹휴학사건으로 퇴학당한다. 그녀는 학교를 나와 노동운동에 투신해 여성노동자들을 조직화했다. 이후 이순금도 학교를 졸업하고 노동운동에 투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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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관술은 1932년 12월 공산주의단체인 ‘반제동맹 경성지방결성준비위원회’에 가입했다. 이 조직은 일본 노동운동가인 와다 모리히토가 경성에서 조직한 단체였다. 그러나 두 달 후인 1933년 1월 조직이 발각되어 경찰에 체포되었다가 병보석으로 가석방되었다. 이관술은 이 무렵 제자 박진홍을 통해 중요한 인물을 만나는데, 그가 바로 이재유다. 당시 박진홍은 이재유와 연애 중이었다. 그는 함경도 삼수군 사람으로, 아버지는 화전민이었다. 이재유는 1926년 일본대학에 입학했다. 그는 도쿄에서 고려공산청년회와 조선공산당에 가입해 활동하다 제4차 조선공산당사건으로 체포되어 경성으로 압송되었다. 그 후 출옥해 이현상과 함께 노동운동을 벌이다 1934년 1월에 다시 체포되었으나, 그해 4월 서대문형무소를 탈옥했다.

이관술은 이재유, 김삼룡, 이현상과 함께 1934년 12월에 조선공산당 경성재건그룹을 조직한다. 그는 교사로 활동한 경력을 바탕으로 조직에서 학생운동을 담당했다. 그러나 재건그룹은 일경에 포착되어 1935년 1월 대대적인 체포령이 떨어졌다. 그는 이재유와 함께 수재민 김씨 형제로 가장해 경기도 양주군 구리면의 시골로 숨어든다. 그는 이곳에서 닭과 돼지를 키우고 참외농사를 지으며 조직활동을 계속했다. 그해 6월 박진홍은 서대문형무소에 수감 중 이재유의 아들을 낳았다.

1936년 12월 25일 서대문경찰서 특별검거반은 창동에서 시골농부로 위장한 이재유를 체포했다. 그는 이관술을 보호하기 위해 하루 동안 모진 고문을 버텼다. 이재유가 돌아오지 않자 이관술은 낌새를 채고 양주를 떠났다. 그는 엿장수와 봇짐장수로 위장해 6개월 동안 시골을 전전하며 도피생활을 지속했다. 그리고 1937년 7월 공산당을 재건하기 위해 경성으로 올라왔다. 이관술은 여동생 이순금과 함께 조직을 재건하다 일본 경찰에 발각되어 다시 대구로 도피했다. 거처를 마려하지 못한 그는 다리 밑에서 노숙했다.

이관술은 김삼룡 등이 석방되자, 1939년 1월 다시 경성으로 올라왔다. 김삼룡, 이관술, 이순금, 이현상 등은 그해 4월 조선혁명의 전위당(前衛黨)을 재건하기 위해 경성콤그룹을 결성했다. 콤그룹에는 당시까지 전향하지 않은 국내의 공산주의자들이 총집결했다. 이관술은 기관지 출판을 담당했다. 1939년 12월 박헌영이 서대문형무소에서 석방되자 그를 콤그룹에 영입했다. 그러나 이관술은 1940년 12월에 김삼룡과 함께 체포되었다. 두 번째 감옥생활이었다. 이때 박헌영과 이순금은 도피에 성공해 전남 광주로 잠적했다. 이관술 남매와 김삼룡‧이현상 등은 해방 전까지 일제에 전향하지 않은 몇 안 되는 공산주의자였다. 조일명과 김한경 등 많은 국내의 공산주의자들은 1940년 이후 전향해 친일단체 대화숙(大和塾)에서 활동했다.

이관술은 1943년 12월 고문으로 생긴 폐병이 심해져 병보석으로 출옥했다. 그는 고향에서 휴양을 취하던 중 1944년 3월에 잠적했다. 그리고 4월부터 대전 인근에서 솥땜질을 하면서 전남지방을 왕래하며 박헌영과 비밀리에 연락했다. 1944년 10월 청주보호교도소에 수감 중이던 이재유는 40세의 나이로 감옥에서 병사했다. 한 달 뒤인 11월, 박진홍은 이재유가 묻힌 조선을 뒤로 하고 중국공산당의 근거지인 연안으로 떠났다. 그리고 다음해 여름, 해방이 찾아왔다.

골령골에 묻힌 영혼

해방 직전 이관술은 대전에 있었다. 그는 해방과 동시에 서울로 올라왔고, 광주에 숨어있던 박헌영도 상경했다. 1945년 8월 20일 박헌영은 서울에서 조선공산당을 재건했다. 이관술은 당에서 중앙위원과 재정부장을 맡았고, 이순금은 중앙당 서기국원에 임명되었다. 해방 후 조선에서 이관술의 명성은 대단했다. 1945년 12월 우익단체인 선구회에서 ‘조선의 지도인물’에 대한 여론조사를 실시했는데, 여운형 33%, 이승만 21%, 김구 18%, 박헌영 16%, 이관술 12%, 김일성 9%, 최현배 7%, 김규식 6%, 서재필 5%였다. 이관술은 1946년에 정당과 사회단체가 망라된 민주주의민족전선에서 중앙위원으로 선출되었다. 그리고 그해 여름 위조지폐사건으로 체포되었던 것이다. 여동생 이순금은 미군정의 체포망을 뚫고 월북했다. 그녀는 1955년 ‘박헌영‧이승엽 간첩사건’ 때 검찰측 증인으로 나와 미군정 당시 박헌영의 친미활동을 증언했다.

이관술은 서대문형무소에서 감옥생활을 시작했다. 생애 세 번째 감옥살이였다. 서대문형무소에 있던 이관술은 수용인원이 초과되자, 1947년 4월 19일 대전형무소로 이감되었다. 얼마 후 마포형무소에 있던 송언필도 대전형무소로 이감되었다. 1947년 5월 9일 법조기자단이 대전형무소를 시찰했는데, 이때 이관술은 감방에서 형무소 기관지 <광명(光明)>을 읽고 있었다고 한다. 그는 기자단이 감방시찰을 마치고 나올 때쯤 얼굴을 들고 밖을 내다보았다. 기자가 보기에 이관술의 얼굴은 무척 수척해 있었다. 기자가 나중에 형무소장에게 물어보니 건강이 좋지 않아 당시 주사를 맞고 있었다고 한다. 1948년 8월, 이관술은 북한에서 개최된 남조선인민대표자대회에서 제1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선출되었다. 궐석상태에서 북한의 국회의원으로 선출된 것이다. 이것이 이관술의 마지막 직책이다.

대전형무소에 수감된 지 약 3년이 지난 1950년 여름, 전쟁이 발발했다. 6월 25일 내무부 치안국장은 전국 도 경찰국에 “전국의 요시찰인 전원을 경찰서에 구금하고 형무소 경비를 강화하라”는 명령을 하달했다. 6월 26일 인민군이 의정부로 밀고 내려오자 국군 헌병대는 경무대 고개를 넘어 서대문형무소로 달려갔다. 그들은 수감 중이던 남조선노동당 중앙지도부 김삼룡․이주하, 북조선노동당 남한총책 성시백을 끌어내 총살했다. 그러나 국군은 황급히 후퇴하는 바람에 나머지 재소자들을 처형하지 못했다. 위폐사건 구속자 중 서대문형무소에 있던 사람들은 운좋게 살아남았다. 당시 대전에는 피난정부가 있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6월 27일 서울을 빠져나와 대구까지 갔다가 다시 돌아와 대전에 머물고 있었다. 대한민국 정부도 6월 27일 대전으로 이전했다. 그리고 6월 28일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했다. 7월 1일 국군 헌병대는 대전형무소를 찾아와 형무소 직원들에게 재소자를 넘기라고 명령했다. 헌병대는 재소자들 중에서 ‘국가보안법, 포고령, 국방경비법 위반 등 좌익사범’과 10년 이상을 받은 일반사범을 따로 불러냈다. 이들은 주로 정치범, 제주4·3사건과 여순사건으로 체포된 사람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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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버트 소령이 찍은 골령골 학살현장 사진(1950.7.3) ⓒ 민족문제연구소

7월 3일 아침, 재소자들은 손이 묶인 채 트럭에 실려 산내면 골령골로 옮겨졌다. 골령골에는 경찰이 미리 산내면 주민들과 청년방위대를 동원해 구덩이를 파 놓았다. 학살은 국군 제2사단 헌병대가 지휘했다. 제2사단 헌병대 1개 분대와 대전경찰서 2개 분대가 재소자의 등을 밟고 뒤통수에 미제 칼빈총을 발사했다. 총살이 끝나면 헌병들이 구덩이를 다니며 살아남은 자를 확인 사살했다. 7월 3일부터 사흘 동안 골령골에서 1,800명의 정치범이 총살되었다. 또한, 6월 말부터 7월 1일까지 약 1,400명의 예비검속자와 국민보도연맹원이 골령골에서 학살되었다. 그리고 7월 6일부터 나머지 재소자 1,700명이 학살되었다. 골령골은 며칠 만에 약 5,000명이 묻힌 공동묘지로 변했다. 시신들 중에는 마포형무소에 있다가 대전형무소로 이감된 송언필과 소설가 김성동의 아버지 김봉한도 있었다. 정판사 사장 박낙종은 서대문형무소에 있다가 목포형무소로 이감되었다. 그러나 그도 후퇴하던 군경에게 형무소에서 끌려 나와 처형되었다.

골령골 학살현장에는 미군 극동군사령부 주한연락사무소(KLO) 총책임자인 애버트(Leonard J. Abbott) 소령도 있었다. 그는 라이카 카메라로 학살현장을 촬영했다. 이 필름을 주한미대사관 육군 무관 부원이 인화했다. 9월 23일 주한미대사관 소속 육군 무관 에드워드(Bob E. Edwards) 중령은 미육군 정보부에 「한국에서 정치범 처형」이라는 보고서를 제출했는데, 이때 학살현장을 찍은 사진 18장을 동봉했다. 그는 이 보고서에서 “처형명령은 의심의 여지없이 최고위층(Top Level)에서 내려온 것이다”라고 썼다. 그러나 미군은 학살을 기록할 뿐, 저지하지 않았다.

이관술도 그 처참한 학살현장에 있었다. 대전형무소 특별경비대 부대장이 총살현장에서 그의 죽음을 직접 목격했다. 헌병대 장교는 이관술에게 마지막으로 ‘대한민국 만세’를 외칠 의향이 있는가라고 물었다. 그는 ‘대한민국 만세’는 외치지 못하지만 ‘조선민족 만세’는 외칠 수 있다고 답했다. 그 직후 골령골에서는 오랫동안 총소리가 울려 퍼졌다. 시간은 1950년 7월 3일 오전 9시, 장소는 충남 대덕군 산내면 낭월리 13번지, 이관술의 나이는 마흔 아홉이었다. 66년 전, 여름에 있었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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